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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90화 (90/150)

# 90

90화. 결전(5).

김시연을 위협하던 살수에 이어 한 명의 S급 헌터를 더 죽였을 때, 세 자루의 비수가 나에게 날아들었다.

S급 헌터도 쉬이 막아내지 못할 거력이 실린 세 자루 비수가 빛과 같이 쏘아지고 있었다.

챙!

전부 피할 수 있었지만 두 개만 피하고 하나는 쳐냈다.

내가 피한 두 자루의 비수는 나를 지나쳐 중국 헌터들의 몸에 틀어 박혔다.

S급 헌터를 죽이기 위해 적진 한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한 자루는 아군을 향하고 있었기에 막아낸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한 공격은 비수뿐만이 아니었다.

비수는 눈속임이었고, 진정한 공격은 그 뒤에 이어진 이기어검이었다.

강기가 서린 여문휘의 검이 비수 뒤에 숨어 있었다.

“하압!”

앞서 쏘아진 비수로 인해 피하기에는 늦었다.

나는 기합을 내지르며 마주 검을 찔러 들어갔다.

쾅!

검 끝과 검 끝이 맞닿았다.

검과 검이 부딪쳤음에도 폭발이 일었다.

실제로는 검과 검이 아닌, 강기와 강기의 부딪침이었다.

그 안에 실린 힘은 주변을 찢어발겼고, 인근에 있던 헌터 몇이 휩쓸려 한줌 핏물로 변해버렸다.

“피해!”

그 광경을 목격한 헌터들은 전투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나와 여문휘의 주변에서 멀어지고자 했다.

죽음이 두렵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누구라도 남의 싸움에 휩쓸려 사라지고 싶을 리는 없었다.

순간, 치열했던 전투가 멈췄다.

여문휘와 나만이 서로를 바라본 채, 기세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여문주!”

그러나 한 차례의 공방 이후, 더 이상의 충돌은 없었다.

권왕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아해야. 놀이는 여기까지 해야겠구나.”

박동석을 상대로 유희를 즐기던 권왕은 내 등장에 주먹을 거두고 물러났다.

“허억...허억...”

박동석은 이번에도 대답대신 거친 숨을 토해낼 뿐이었다.

고작 몇 분을 막아서는 것만으로 방패가 본래의 형상을 잃고 고철처럼 우그러졌고, 박동석의 전신은 넝마처럼 변해버렸다.

자신이 무너지면 모두가 죽는 다는 일념으로 버텨낸 것이 고작이었다.

권왕이 물러난 것이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여문주.”

권왕이 여문휘를 막아섰다.

“분명 놈은 내게 맡기겠다고 약조하지 않았소.”

“반가움에 가볍게 인사를 나눴을 뿐이외다.”

이어진 권왕의 말에 여문휘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여문휘는 나를 죽이려 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거짓을 내뱉었다.

“약조를 잊지 마시오.”

“알고 있소.”

여문휘는 권왕을 살막에 영입하기 위해 태빈, 아니 무영살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었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권왕은 당장이라도 돌아설 수 있는 인물이었다.

여문휘는 제 손으로 직접 태빈을 죽이고 싶었지만 권왕을 적으로 돌려서 좋은 건 없었다.

“자네가 무영살이 맞는가?”

여문휘를 한 발 물러서게 만든 권왕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조금 의아한 점은 그 시선에 적의가 담겨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렇습니다.”

적으로 만난 사이다.

그럼에도 나는 권왕을 향해 어느 정도 예를 갖췄다.

권왕은 내가 봐온 무인들 중, 가장 무인다운 인물이었고, 내가 유일하게 경외의 마음을 품은 인물이었다.

과거에도 권왕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나는 처음으로 살행을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겠나.”

권왕이 손을 내리며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권왕! 지금 뭐하자는 거요?!”

뒤에서 여문휘의 고성이 들려왔지만 권왕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문휘에게 개입하지 말라는 듯, 기세를 내뿜으며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당장은 나와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앞서의 전투만 살펴봐도 그는 아군을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저 박동석을 잡아두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을 뿐이다.

지금 보인 여문휘와의 관계 또한 살막과 뜻을 함께 한다기보다는 나와 만나기 위해 모종의 거래를 한 듯했다.

[ 헌터들을 수습하십시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

나는 김원철에게 전음을 보냈다.

대화를 이어나감으로서 아군의 진형을 수습할 시간을 벌 셈이었다.

나아가 생각보다 얘기가 잘 풀린 다면, 지금 적으로 마주한 권왕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 죽음 뒤에 화련이가 어찌됐는지 알고 있나?”

“화련?”

“내 딸아이의 이름이네.”

권왕의 딸은 권왕이 관과 얽히게 된 원인이었지만 내게는 썩 중요한 이름이 아니었기에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소식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내 손으로 죽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경외한 을 품었던 인물의 딸이기에 소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권왕님의 따님에 대해서라면, 알고 있습니다.”

“정말인가?”

권왕이 한 발짝 몸을 앞으로 내밀었고,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미 열 보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한걸음의 간격도 중요했다.

당장 적의를 보이지 않다고는 하나, 권왕 정도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면, 준비 자세 따위는 필요 없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흠. 급한 마음에 내가 실수를 했군.”

권왕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순순히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

다가왔던 것보다 한 걸음 더 물러남으로서 사과를 표하기까지 했다.

“권왕!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는지, 여문휘가 검을 뽑아들었다.

중국 헌터들도 나와 더불어 권왕에게까지 검을 겨눈 채, 살기를 흘렸다.

“무엇을 말이오.”

“놈과 한가로이 대화나 나눌 셈이오?!”

“흠... 문주는 나를 무영살과 만나게 해주고, 나는 살막의 일을 돕는 게 약조의 전부가 아니었소? 만나서 무얼 하든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소만.”

“놈이 당신을 죽인 살수라는 사실을 잊은 것이오?!”

“잊지 않았소. 헌데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말이오?”

여문휘가 소리쳤지만 권왕은 처음부터 태빈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눈앞의 태빈이 자신을 죽인 살수, 무영살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자신은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딸을 지키지 못했다.

관에 붙잡히면서 단전은 파괴됐고, 사지근맥마저 잘렸다.

딸과 평생의 무공을 잃어버린 자신은 그저 육체가 생을 유지하고 있을 뿐, 정신은 죽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무영살은 이미 의미를 무의미하게 숨 쉬고 있는 육체의 죽음을 확정지었을 뿐이다.

악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따님은 겁간을 당한 것도 모자라, 아비까지 잃고 폐인처럼 지냈습니다. 저를 두고 떠나간 아비를 원망했다고도 합니다. 그녀가 바란 것은 복수가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권왕의 뜻을 이해했다.

그는 자신의 의문만 푼다면, 나와 적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아... 연화야...”

내 말에 권왕이 무너져 내렸다.

몸의 무너짐이 아닌, 마음의 무너짐이다.

표정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절망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마냥 불행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따님은 주가장의 삼남의 도움으로 마음을 다잡았고, 둘은 혼례를 올렸습니다.

주가장이 권왕님 사후, 실전된 무공을 노렸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만, 제가 아는 주가장의 장주와 삼남은 그런 이유로 혼례를 올릴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정말인가.”

“예. 아무리 확인할 수 없다고 해도, 제가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주가장이라... 주가장의 삼남은 모르지만 주가장의 장주는 믿을 수 있는 이지.”

권왕은 내가 말한 주가장의 장주와 면식이 있는지 안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답해줘서 고맙군.”

동시에 나를 향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의외의 상황에 모두의 시선이 권왕에게 집중됐다.

중국 헌터들도, 한국 헌터들도 권왕이 보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

권왕을 적으로 돌리지 않을지 모른다는 기대는 무너졌고, 상황이 복잡하게 다가왔다.

“내 목숨에 대한 빚은 이것으로 없던 셈 치겠네. 지금부터는 순수한 무인으로서의 호기심이네. 그래도 전생에 나를 죽인 이의 무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이어진 권왕의 말에 내 얼굴은 굳어졌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권왕의 모습은 정말 전율적이었다.

살행이라면 모를까, 솔직히 정면대결로는 자신이 없었다.

오죽하면, 오로지 자유만을 갈망하던 내가 살행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을까.

“하하. 권왕. 잘 선택 하셨소.”

득의에 찬 여문휘의 웃음이 들려왔다.

권왕은 여문휘 스스로도 자신할 수 없는 강자.

모습을 드러낸 살수 따위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선공은 양보하지.”

“배려에 감사합니다.”

나는 포권을 취하는 것으로 마지막 예를 다한 뒤, 검을 들어올렸다.

권왕을 눈을 보고 피할 수 없음을 느꼈다.

애초에 적으로 마주한 바, 지금까지 시간을 벌고 선공을 양보 받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 천천히 헌터들 뒤로 물리고, 준비 하고 계십시오. ]

김원철에게 전음을 보냈다.

피하고 싶은 결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권왕을 이겨낸다 하더라도 여문휘가 남는다.

당장 권왕과의 승패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은영중에 흘러나오는 기세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운 좋게 승리한다 해도 여문휘까지 상대할 여력이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권왕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한 뒤, 전력을 다해 달려 나갔다.

그나마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건, 내가 살공을 익히고 있다는 점이다.

살수의 무공은 초식 하나하나가 일격 필살이나 다름없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려울 터. 그 허점을 노린다면 의외로 쉽게 승패가 갈릴 수도 있었다.

검에 강기가 서렸고, 내 몸에는 제어되지 않은 살의가 솟구쳤다.

살혼심법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을 때에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천라지망에 둘러싸여 마지막 순간에서나 꺼내 보였던 것이다.

“내 눈이 틀리진 않았군.”

권왕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주먹을 다잡았다.

과거, 무공은 잃었으나 눈이 먼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이 살수와 붙어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던 그는 천생 무인이었다.

쿠콰쾅!

내 검과 권왕의 주먹이 부딪쳤다.

권왕은 내 공격을 피하거나 막지 않았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정권으로 맞부딪쳐왔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기에 여문휘와의 충돌 때부터 더한 여파가 사방으로 퍼져났다.

충분히 거리가 있었음에도, 경지가 낮은 몇몇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고, 일부는 몇 걸음을 뒤로 물러난 다음에야 그 여파를 겨우 해소해냈다.

다행히 한국 헌터들은 슬슬 물러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충격이 덜했다.

“컥!”

단 한 번의 공방에 내 입에서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분명 내가 공격한 것임에도 장기가 다 터져나가는 것만 같은 충격이 내부를 휩쓸었다.

“과거의 나라면, 정상이었다 해도 자네의 살수를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권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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