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살수다-89화 (89/150)

# 89

89화. 결전(4).

[ 김원철 헌터. 마지막 준비를 염두 해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

나는 곧장 김원철에게 전음을 보냈다.

살막과의 전투.

전력이 열세인 상태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준비 했지만 아군이 패하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고, 패배를 염두 해둔 준비 또한 해두었다.

내가 김원철에게 말한 마지막은 다량의 폭탄과 독으로 일대를 초토화 시키는 것으로, 폭발이 동반된 함정임을 생각하면 결국 아군까지 집어삼킬 동귀어진의 수였다.

끄덕.

김원철은 전음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몇몇 헌터들에게 비밀리에 신호를 보냈다.

희생을 전제로 하는 작전을 모두가 알아서 좋을 것은 없었고, 김원철을 비롯해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아니, 김원철도 아군이 희생될 거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내가 적 진형을 고려해 함정을 설치한다고는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김원철이 나를 신뢰한다 해도, 수백의 목숨을 희생하는 작전에 동의 할 리는 없었다.

“후...”

권왕의 개입에 여문휘가 긴 숨을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가 아무리 감정에 충실하다 해도 화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

스스로의 감정조차 제어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숨기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마지막임을 알기에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부 죽여라. 그러면 결국 놈도 기어 나올 테지.”

여문휘가 싸늘한 음성으로 명했다.

수백을 죽음을 명하면서도 그는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예.”

그와 마찬가지로 수차례의 함정을 뚫고 오느라,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중국의 헌터들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동수의 적을 앞에 두고도 특별한 진형 없이 돌진하는 것은 절대 패하지 않는 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권왕과 여문휘.

두 명의 화경의 고수가 포함된 전력이다.

그 둘이 아니더라도 S급 헌터만 다섯이나 됐다.

함정에 수십의 헌터를 잃긴 했지만 가져도 될 만한 자신감이었다.

“탱커! 충격에 대비하라!”

“딜러들! 준비해!”

한국 헌터들도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이미 진형은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고, 그간의 수련을 토대로 자신감도 충분했다.

콰쾅! 콰콰쾅!

중국 헌터들이 수백 미터 거리를 좁혀오는 짧은 순간에 양측 원거리 딜러들 간의 공방이 있었다.

결과는 백중세.

갖가지 마법과 화살 등, 수백에 달하는 공격이 서로를 향해 쏟아졌지만 양측 모두 전위에 선 탱커들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쿵! 쿵!

한차례의 원거리 공방 후, 거리를 좁혀온 중국 헌터들과 한국 헌터들 간의 충돌이 시작됐다.

중국 측에는 사이사이 S급 헌터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아군의 방어를 단숨에 뚫어내지는 못했다.

수련의 성과였다.

마나를 이해하고,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하게 둘 수 있게 된 한국 헌터들은 중국 헌터들의 돌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열세인 S급 헌터 전력 부분도 두셋이 힘을 모았고, 그것도 부족하면 대여섯이 달라붙어 버텨냈다.

그 중, 가장 고무적인 점은 박동석이 홀로 권왕의 발걸음을 막아 세웠다는 것이다.

“크읍.”

훨씬 이전부터 무공을 배우고 단전까지 만들어낸 박동석이다. 이제는 S급을 뛰어 넘어 SS급에 근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실기사단장으로서 공격뿐 아니라, 누군가를 보호하는 방어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왕을 막아 설 수 있었다.

물론 막아냈다 뿐이지, 그 이상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고작 S급 헌터인 박동석이 권왕의 발걸음을 막아 세웠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대단하다 할만 했다.

“무림인은 아닌 듯한데, 제법이구나.”

권왕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박동석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개인적으로 원치 않는 전투였기에 전력을 다하지 않긴 했지만 평범한 헌터가 막아낼 수준의 공격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 와서 재미없는 일뿐이었던 권왕의 입 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

박동석은 권왕의 말에 대답대신 방패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권왕과의 격차는 여실히 느꼈다.

상대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에도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도 가까스로 참아냈다.

대답할 여력은 없었다.

“이것도 한 번 막아 보거라!”

다행히 권왕은 더 이상 전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전히 전력을 다하지 않은 채, 박동석을 상대로 유희를 즐기기 시작했다.

박동석 정도는 단숨에 끝낼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럴 생각은 없어보였다.

“막아!”

“진형 유지해!”

전황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권왕이 박동석 하나에게 묶여 있는 덕분에 전투의 양상은 치열하게 흘러갔다.

중국이 공세를 퍼붓고, 아군은 방어에 치중하는 형세이긴 했지만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여문휘.’

나는 그 속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인지, 여문휘도 전투가 시작된 이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챙! 채챙!

치열하게 돌아가는 전장을 사이에 두고 나와 여문휘가 대치했다.

나는 그를 보고 있지만 그는 나를 보지 못하는 상태로.

그렇다고 내가 먼저 공격을 시도 할 수는 없었다.

이미 한 번 목을 내어줬었기 때문인지, 여문휘에게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네 명의 헌터들을 방패막이 삼아, 여문휘 또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나나 여문휘나 누가 먼저 섣불리 나섰다가는 역으로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부터는 인내심 싸움이다.

먼저 인내심이 바닥나는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는.

***

“크악..”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수백이 맞붙는 전투다.

양측 모두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비명이 끝없이 울려 퍼졌고, 선혈이 낭자했다.

“정신 차려!”

그렇게 죽고 죽이는 전투가 지속되면서 밀리기 시작한 건 아군이었다.

대부분 무림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중국 헌터들과 다르게 한국 헌터들은 사람과의 전투가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여야 할 적일뿐이다.”

살인을 해 본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변혁이 시작된 이후부터 5년 간 헌터 생활을 해온 이들이다.

아닌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 한둘쯤은 죽여 봤다.

헌터 사이의 분란으로 인해, 길드간의 항쟁으로 인해. 아니면 고작 돈 때문에.

그러나 이처럼 치열한 전투를 치러본 경험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첫 공방을 무난히 이겨낸 덕분이다.

그러나 시체가 쌓여가면서 대규모 난전에 대한 경험의 차이가 눈에 띄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장의 광기 속에 반복되는 살인에, 미처 눈을 감지 못한 동료의 시신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일부 헌터들의 점차 몸이 굳어졌다.

시체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속에서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고, 머리는 사고를 멈춘 듯 멍해져갔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동료가 죽어!”

“망설이지 마!

독려하는 외침이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그들의 귓가에는 닿지 않았다.

시간이 있었다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들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나 자비는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팽팽하게 유지되어 오던 전세가 중국 측으로 기우는 순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살려줘.”

“죽기 싫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자, 도망치는 헌터들까지 생겨났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모두가 결심을 굳혔다.

국가를 위해. 가족을 위해. 동료를 위해 싸우겠다고.

그러나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 결심은 까맣게 잊혀졌다.

“전투에 나설 때의 결심을 떠올려라!”

“내가 도망치면, 동료가 죽는다!”

도망치는 병사들의 목을 거침없이 베어버리는 장수들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길드장들은 그처럼 냉정하지 못했고, 고작 말만으로는 죽음의 공포에 질려버린 헌터들을 다시 전장에 세울 수 없었다.

전장의 치열함에 집어 삼켜진 헌터들부터, 도망치는 헌터들까지.

전황은 여러모로 아군 측에 불리하게만 흘러갔다.

***

‘음.’

나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이대로라면, 내가 개입하지 않는 한 아군의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아니 내가 개입한다 해도, 여문휘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

계획대로라면, 나는 마지막 함정을 발동시켜야 했다.

그러나 나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나는 무엇을 망설이는 거지.’

아군 사이에서 물러섬 없이 맞서고 있는 형과 팀원들이 보였다.

이번 전투에 그들을 배제하고자 했지만 강력한 반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함께 하게 됐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나서는 상황에서 그들의 안위만을 생각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존재가 내 결정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최소한 형은 구해낼 수 있다.

나머지 팀원들은... 냉정히 생각해 그들의 목숨을 대가로 여문휘를 죽일 수 있다면 이득이다.

팀원들 뿐만은 아니지만 고작 수백의 희생이다.

내 목적을 위해 수십, 수백의 죽음을 외면하는 일은 익숙했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다.’

전황은 이미 기울었다.

이대로 의미 없는 죽음을 맞이하기보다는 동귀어진이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망설였다.

‘내가...’

그럼에도 내가 망설이는 이유는 더 최선의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희생이 필요한 이유는 여문휘를 비롯해 중국 헌터들의 발을 묶기 위함이다.

그들의 목표는 나 하나.

굳이 모두가 남을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는 전혀 염두 해 두지 않았다.

모두를 희생시키더라도 내가 죽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때가 되자 행동에 옮길 수가 없었다.

푸욱.

결국, 내 검이 어둠 속에서 김시연의 목을 노리던 살수의 목을 꿰뚫었다.

난전 속에서 수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수였다.

목이 꿰뚫린 살수는 피거품을 물며 꼬꾸라졌고, 김시연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봤다.

“팀..팀장님. 감사..”

나는 그녀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고 몸을 날렸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순간, 여문휘가 나를 놓칠 리는 없다.

그 또한 화경의 고수.

이미 드러난 상태에서 그의 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푸욱. 푸욱.

나는 S급 이상의 헌터들만을 노려 움직였다.

당장 눈앞에 죽어가는 아군이 보였지만 A급 헌터 한둘 살린다 해서 뒤바뀔 전황이 아니었다.

여문휘가 개입하기 전까지 균형이라도 맞추려면, S급 헌터를 하나라도 줄여야했다.

“크하하. 살수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제 목숨을 포기하다니. 다시 살아나니, 재미있는 구경을 다하는구나.”

그 모습에 여문휘가 대소했다.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거라 여겼는데, 어이가 없는 결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