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살수다-88화 (88/150)

# 88

88화. 결전(3).

퍼억. 푹.

“커억...”

담을 기점으로 펼쳐진 진을 넘어 침입한 헌터가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냈다.

침입한 헌터는 둘.

하나는 마법에 머리가 터져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고, 가슴팍에 화살이 박힌 하나가 토해낸 비명이었다.

물론 그 역시 곧장 숨이 끊어졌다.

그렇게 담장 앞에 두 구의 시체가 쌓였다.

공격을 가했던 헌터를 비롯해 아무도 시체 근처로 다가가지는 않았다.

처음 공격을 쏘아낸 자리에서 그대로 시체를 바라볼 뿐이었다.

“둘이라.”

중국 측 헌터의 수는 삼백 오십.

단순히 수만 따져보더라도,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다.

나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고, 진은 그 중 하나였다.

돌담에 펼쳐진 진은 환각을 일으키고, 오감을 교란시키는 효과가 있는 진이다.

나는 진의 영향으로 혼란에 빠진 헌터들을 요격할 계획이었고, 최소 수십의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여문휘는 확실한 전력의 우위에 있을 때, 망설이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입힌 피해는 고작 둘.

굉음과 함께 한차례 원거리 공격이 있던 순간, 계획은 틀어졌다.

“역시, 돌담 때문인가.”

사실 돌담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생각하긴 했다.

분명 돌담은 적들의 경계를 살 수밖에 없는 구조물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의 진법으로는 매개체를 두지 않고서 주택 전체에 달하는 공간을 망라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시간은 벌었으니.”

원하던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진은 준비한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또한 적의 전력을 줄이지는 못했지만 발은 묶어뒀다.

헌터 둘을 투입한 뒤에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진의 파훼법을 알지 못함을 의미했다.

여문휘가 진을 파훼할 때까지 나는 조금 더 준비할 시간을 얻었다.

***

“문주님.”

여문휘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서 제갈민의 얼굴이 흘러 나왔다.

사라진 자신을 대신해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느라 조금은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문제가 생겼다.”

“예. 진이 설치되어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문주님의 이목을 속일 정도로 진법에 조예가 다니, 생각보다 제법이군요.”

제갈민이 순수한 감탄을 쏟아냈다.

물론 살수이기에 어느 정도 진법에 대해 알긴 하겠지만 직접 설치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무림 최고의 두뇌임을 자랑하는 제갈세가 소속이었던 제갈민이라 하더라도 저택을 둘러쌀 정도의 진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정도다.

그러한 일을 일개 살수가 해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파훼 법은 있나?”

제갈민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여문휘는 곧장 핸드폰 방향을 틀어 돌담을 비췄다.

“음... 일단 돌담이 진의 매개체인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경계심만 사게 될 돌담을 세워 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제갈민은 ‘제갈’의 성을 이어받은 자.

직접 본 것이 아님에도 진에 대해 정확히 파악해냈다.

물론, 직접 보지 않았기에 곧바로 파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또한 시간 문제였다.

“지(地) 속성의 마법사들이 필요합니다. 탱커들도 준비해주십시오. 접근하면, 분명 공격이 있을 겁니다.”

제갈민은 차분히 진을 파훼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서른 가량의 헌터들이 탱커들을 앞세워 마법사들이 돌담 가까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

돌담은 매개체일 뿐이다.

실제로 저택 주변 전체에 돌담이 쳐져 있는 것은 아니었고, 나와 헌터들은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삼십 가량의 헌터들이 떨어져 나와 돌담 5m 앞에 섰다.

콰콰쾅!

나와 헌터들은 곧바로 적들을 향해 공격을 쏟아냈다.

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위치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공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진의 생문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십여 명의 헌터들만 가능한 공격이었다.

“흠.”

아쉽지만 이번 공격은 적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인원이 제한된 만큼, 철저히 실력만으로 선별했음에도 탱커들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탱커 가운데 S급 헌터가 셋이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화살은 그들의 방패에 부러져 나갔고, 마법은 불꽃놀이마냥 허망하게 터져 버렸다.

“다음 작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다음 장소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S급 탱커들이 마법사들 앞에 버티고 있는 이상, 어설픈 공격은 무의미했다.

내가 전력을 다한다면, 한둘쯤은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공 낭비다.

“예.”

진 주변에 포진해 있던 십여 명의 헌터들이 생로를 따라 차례로 사라졌다.

내가 준비한 전장은 이곳이 아니었다.

쿠르릉.

헌터들이 떠나가고,

진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

콰콰쾅!

무너져 내리는 진을 보며 여문휘는 다시 인상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폭발과 함께 거대한 독무가 일었다.

사방으로 퍼진 독무는 순식간에 마법사와 탱커들을 집어삼켰다.

육안으로 확인 될 정도로 강한 독무.

오로지 살상력만을 높인 독을 헌터들은 견뎌내지 못했다.

수십의 헌터들이 한순간에 한줌 독수로 녹아내렸다.

“사...려줘...”

S급 탱커들만이 독에 저항하며 아군 쪽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도움의 손길보다는 몸이 녹아내리는 게 더 빨랐다.

그들의 죽음 뒤에 남아 있는 것은 부서진 돌담의 잔해와 저택뿐이었다.

“짜증나는군.”

고작 입구에 불과한 돌담 앞에서 서른둘을 잃었다.

S급 헌터들도 셋이나 있었다.

제대로 된 전투도 아닌, 고작 함정 따위에 잃었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여문휘는 멈추지 않았다.

저택에도 함정이 있음이 분명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화르륵.

저택도 함정의 하나였다.

분명 저택에서 기척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여문휘와 헌터들이 저택 한 가운데에 들어서는 순간, 폭발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앞서의 함정으로 철저히 주변을 살폈지만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저택에서의 폭발로 다시 삼십을 잃었다.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는 저택 뒤에는 마치 따라오라는 듯 작은 소로가 이어져 있었다.

“문주님.”

“간다.”

유송히가 우려를 드러냈지만 여문휘의 뜻은 완고했다.

그 뒤로도 갖가지 함정들이 이어졌다.

앞서의 독과 폭발이 일기도 하고, 무림의 기관과 이 세계의 과학이 결합된 형태의 함정도 있었다.

때문에 무림에서의 기관에 대한 기억으로도, 유송히의 지식으로도 대비가 완벽하진 않았다.

함정이 하나 발동될 때마다, 약간이지만 피해를 입었다.

적게는 한둘에서 많게는 일고여덟까지.

처음에는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피해였다.

그러나 그 피해가 누적되면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저택 뒤로 일곱 번의 함정이 발동돼, 이십을 잃었다.

두 개는 조기에 발견해 파훼했지만 다섯 개는 막지 못했다.

“문주님.”

유송히기 다시 한 번 여문휘를 불렀다.

이미 팔십에 달하는 헌터를 잃었다.

여전히 이백이 넘는 수가 남아있긴 했지만 함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피해가 큽니다.”

“안다.”

“속도를 늦추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실 지금까지의 피해는 여문휘가 빠른 진군을 명했기에 발생된 것이다.

파훼하지 못한 다섯 번의 함정 중, 적어도 두 개는 무리한 진군만 아니었다면 피할 수 있었다.

나머지 세 개도 피해가 줄었을지도 몰랐다.

네다섯이 죽어 나갈 걸, 한둘 갈아 넣는 것으로 막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니, 지금부터는 내가 앞장서겠다.”

몇몇은 화경의 경지인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공들인 함정들이다.

벌써 일곱 개. 진과 저택의 화공까지 더하면, 아홉이다.

제 아무리 미리 준비한 것들이라 해도 그 수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놈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아껴두려 했지만 계속해서 피해를 감수하기에는 놈의 뜻대로 놀아나는 것 같아 맘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수준으로 보아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함정은 없었던 만큼, 선두에 서서 빠르게 치워버리는 편이 나았다.

***

“네 놈!”

여문휘가 고성을 터트렸다.

마주한 여문휘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에 타고 찢어진 옷은 그가 이 자리에 오는 게, 평탄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여문휘의 성격상 결국 그가 나서게 될 것임을 알고, 뒤에 더 강력한 함정들을 준비했다.

물론 함정으로 그를 죽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성을 잃고 흥분한 것만으로도 함정을 설치한 목적은 충분히 이뤘다.

그와 함께 내가 고른 전장에 도착한 것은 이백 남짓.

부족한 S급 헌터를 고려해도 이제는 해볼 만했다.

“국내에 소란을 일으키는 무리가 있어 준비한 함정인데, 중국의 국가주석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혹, 소란을 일으키는 무리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이미 몸을 숨기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나를 대신해 김원철이 검을 들며 말했다.

문주의 자리에 오르면서 현장을 떠났기에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잊은 여문휘다.

아니 오랜 세월 감정을 억눌러 왔기에 지금은 더 충실했다.

이런 사소한 도발도 지금의 여문휘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무영살! 언제까지 이런 조잡한 짓을 반복할 셈이냐?! 부끄럽지도 않느냐?!”

여문휘는 김원철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나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잔뜩 분노한 여문휘는 앞에 있는 수백의 헌터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여문주.”

그런데, 그런 여문휘를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너무 흥분하셨소.”

나는 그 사내를 보고 순간 굳어졌다.

권왕.

내게 죽임을 당했던 세 명의 화경의 고수 중 하나다.

물론 세 명 중, 혈귀는 가짜였지만 권왕 고영은 절대 가짜가 아니다.

세력들이 판치는 무림을 홀로 오시한 진정한 강자였다.

나는 권왕 고영의 마지막 전투에서 보인 기개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딸을 겁보인 관리를 죽이고 관과 척을 지게 된 그는 사만의 병사 앞을 두고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맨 손으로 수천에 달하는 병사들과 수십 장군들의 머리를 수박처럼 으깼다.

결국 사만의 수를 넘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지만 권왕은 도망칠 수 있음에도 결코 등을 보이지 않았다.

잘못한 것이 없기에.

내가 권왕 죽인 것 또한 처절한 전투 뒤에 붙잡혀 사지근맥이 절단되어 있던 이의 목숨을 끊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이미 폐인이 됐음에도 의뢰인은 권왕의 죽음을 바랐다.

내 손에 죽음을 맞이할 때, 오히려 편안해 보였던 권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정에 불과하지만 권왕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당대의 천하제일이 됐을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 또한 내 손에 죽음을 맞이한 만큼, 이 세계에 살아 숨 쉬고 있을 줄은 알았다.

혈귀가 죽기 전, 절규하듯 권왕에 대해 외쳤던 것도 기억 한다.

그러나 혈귀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권왕은 죽을지언정 누군가에게 고개 숙일 자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권왕의 존재는 예상 밖이었지만 어차피 내게 죽임을 당했던 인물.

적으로 마주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중요한 건, 그 한 명의 존재만으로 지금까지 중국 헌터들의 전력을 깎아 놓았던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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