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85화. 폭풍전야(4).
“김태빈 헌터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한지 열흘.
처음으로 나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분명 집안에 들어서기 전까지 나를 은밀히 따라오던 자들 중 하나였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시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내게 따라붙은 시선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 시선이 속한 세력도 각기 다르다.
남은 시선들은 여전히 집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나에게 접근 하는 인물로 인해 그들의 감각이 한 층 더 곤두서 있는 느낌이었다.
“차주한 길드장님.”
나를 찾은 이는 차주한이었다.
차주한은 이제는 해산한 신의 길드의 길드장이자, 수십의 동료를 잃고 살막에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남자다.
다른 시선들과 다르게 수 시간 전부터 새로이 느껴지던 시선의 주인이기도 했다.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예. 들어오십시오.”
사실 차주한이 나를 찾은 이유는 짐작이 갔다.
그렇기에 나는 차주한을 곧장 집 안으로 들였다.
“차, 커피. 어느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럼 차로 준비하겠습니다.”
무림에서의 과거 때문인지 아직 커피보다는 차가 입에 맞다.
김원철이 내 편의를 위해 고용해준 가정부가 있었지만 그가 내린 차 맛은 별로다.
또한 차주한과의 대화를 들려줄 수도 없었기에 오늘은 이만 퇴근하라고 한 뒤, 손수 차를 내려 내주었다.
“신의 길드가 해산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차를 내어주며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먼저 찾아왔음에도 차주한이 뭔가 말을 꺼내기 망설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그렇게 됐습니다.”
수 년 간 키워온 길드의 해산에 미련이 남는지, 차주한의 얼굴에 얼핏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그러나 그도 잠시, 씁쓸함을 분노가 집어 삼켰다.
잠시 눈을 질끈 감으며 길드를 해산한 이유를 다시금 되새기는 차주한이었다.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그렇게 대화의 물꼬를 튼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미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얘기를 질질 끌는 건 시간 낭비였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김태빈 헌터님은 살막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렇군요.”
내 대답에 차주한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 또한 김태빈 헌터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억울하게 떠나간 동료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놈들을 쳐 죽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허나, 복수를 위해 알아본 살막의 힘은 제가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거대했습니다. 어쩌면 중국 전체가 살막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수를 다짐하고 차주한은 지난 열흘간 살막에 대해 조사했다.
수도권의 한축을 담당하는 길드의 장이었다.
자연스레 접하게 되는 정보로 인해 살막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여겼다.
그러나 착각에 불과했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점점 커져만 가는 살막의 힘은 놀랍고, 두려웠다.
타오르던 복수심이 꺼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맞습니다. 살막의 힘은 아직까지도 드러난 것보다 숨겨진 부분이 더 많을 정도입니다. 복수를 하려다 오히려 길드장님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십중팔구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겁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막에 대해 조사를 했다면 차주한 또한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두렵다고 복수를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역시, 차주한 또한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복수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불가능하게 여겨진다 해서 포기할 거였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의 길드를 해산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상징적 의미에 불과했지만 차주한은 돌아갈 곳을 없앰으로써 배수의 진을 쳤다.
“혹시, 살막의 막주가 누구인지도 알고 계십니까?”
“...그것까지는 제 힘으로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차주한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복수를 다짐하고 모든 역량을 다해 알아내고자 했지만 막주에 대한 것만큼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여문휘.”
“여문휘요?”
“이번에 새로 중국의 국가주석에 오른 여문휘가 바로 살막의 막주입니다.”
차주한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정말입니까?”
그리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어왔다.
끄덕.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을 거라 생각했다.
중국이 살막에 좌지우지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에 그친 그의 말이 아직 여문휘에 대해 모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 때는 그런 얘기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 때 말했다면, 차주한 길드장님은 몰라도 다른 헌터들의 입을 막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까?”
“으음...”
나는 전주의 던전에서 살막에 대해 다른 헌터들에게 말할 때, 여문휘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었다.
살막의 힘이 중국을 집어 삼켰을 정도로 거대함을 알게 된다면, 헌터들의 입을 막지 못할 거란 판단에서였다.
차주한도 내 뜻을 이해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생각에 잠긴 차주한으로 인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묵묵히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역시, 김태빈 헌터님을 찾아오길 잘 한 것 같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저를 비롯한 전 신의 길드원들을 김태빈 헌터께서 이끌어 주셨으면 합니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차주한이 고개를 숙였다.
“신의 길드원들을 말입니까?”
“예.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복수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태빈 헌터와 함께라면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차주한은 골렘과 싸우는 태빈을 봤다.
전투 중에도 눈이 돌아갈 만큼, 전율적인 무위였다.
태빈과 함께라면, 복수를 이룰 수 있다 믿었다.
“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바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문제였다.
일단 평생을 홀로 했기에 누군가를 이끈 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팀원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무공을 가르쳐주긴 했지만 그 외에는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함께 하기에는 그들의 성취가 낮은 것도 이유이긴 했지만 그 보다는 혼자인 편이 편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수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누군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에 쉽사리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기다리겠습니다.”
차주한 또한 리더의 자리가 주는 무게를 안다.
하물며 그러한 힘을 가지고도 세력을 만들지 않고 있던 태빈이다.
곧바로 받아들일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오늘은 그저 자신의 뜻을 전한 것만으로 만족했다.
***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하루 만에 차주한을 비롯한 신의 길드원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사실 차주한이 찾아온 순간부터 어느 정도 마음을 먹고 있었다.
S급 헌터 차예린을 포함해 A급 이상만 오십에 달하는 전력.
살막의 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전력이지만 확실히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죽을 지도 모르는 길을 확실히 걷게 됐음에도 감사를 표하는 차주한의 모습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필요에 의해 그들을 받아들였다.
신의 길드원들은 나에게도 훌륭한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앞으로 여러분은 박동석 헌터, 그리고 제 팀원들과 함께 수련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이제 막 함께 하기로 결정됐지만 한 시도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곧장 차주한과 전 신의 길드원들을 박동석과 팀원들이 있는 수련장으로 소집했다.
“차주한 길드장?”
한창 수련에 열중하던 박동석은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하게 된 차주한을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신의 길드원들도 저희와 함께 하게 됐습니다.”
“정말입니까?”
박동석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 또한 지금의 전력이 살막과 맞서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전력의 증가는 반길만한 일이었다.
“예. 저 또한 앞으로는 이곳에서 머물며 여러분들의 성취를 위해 노력할 겁니다.”
팀원들은 당연하고, 박동석 또한 내 요청으로 팀원들과 머물며 수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신의 길드원들을 더해 내가 직접 가르칠 생각이었다.
무공을 전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삼류 무공이라 하더라도 무공은 하루아침에 익힐 수 없다.
이미 체내에 마나를 가지고 있는 헌터들이긴 하지만 단전을 만드는 데만 최소 일주일은 걸린다.
실제로 박동석이 체내의 마나를 가지고 단전을 만드는데, 딱 일주일이 걸렸다.
당장 내일이라도 살막과 부딪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무공을 익히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꼭 무공이 아니더라도 그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마나.
이 세계의 헌터들은 자신이 쓰는 힘의 원천임에도 마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저 우연히 얻게 된 능력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이들이 마나를 이해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접목시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마나에 대한 이해도만 높아져도 지금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질 것이다.
“그럼, 이 인원이 전부 이곳에서 지내는 겁니까?”
“예.”
수련장은 과거 김원철이 마련해준 곳으로 숙소로 쓸 만한 건물까지 딸려 있었다.
수십의 인원을 수용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씩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지내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
“저희도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내가 신의 길드원들을 가르치기로 하자, 원 길드에서도 헌터들을 보내왔다.
원 길드는 박동석에게 어느 정도 가르침을 받고 있긴 했지만 내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원 길드의 헌터들 또한 같은 적을 두고 함께하는 동료.
나는 그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이미 신의 길드의 합류로 오십 명으로 늘었던 인원이 백 가까이로 늘어버렸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여러분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가지고 있는 힘. 즉, 마나를 느끼고 이해하는 겁니다.”
헌터들에게 마나를 느끼게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나는 단전에 내공을 일으켜 사방으로 퍼트렸다.
삼 갑자에 가까운 내공은 수련장에 전체를 메우고도 남았다.
던전의 기운에 몇 배는 될 정도로 충만한 기운이 헌터들 주위에 가득 찼다.
“이게... 마나?”
“항상 느끼던 거잖아?”
한순간에 뒤바뀐 공기에 헌터들은 신기한 듯, 마나를 느꼈다.
그리고 이내 지금 느끼고 있는 마나라는 것이 던전 내부에서 느꼈던 상쾌한 기운이나, 자신들이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쓰고, 혹은 활 등을 쏠 때 느꼈던 기운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우선 여러분의 능력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 뒤에 나는 신의 길드원과 원 길드원의 능력을 파악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능력을 선보이는데 약간 꺼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차주한과 차예린이 앞서 나서면서 다른 헌터들도 망설임을 지워냈다.
그렇게 모두의 능력을 파악해 분류한 뒤,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