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3화. 폭풍전야(2).
폴란드의 대통령 궁,
이제는 타이탄의 신전으로 바뀐 그곳에서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21세기에 중세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회색빛의 갑옷을 입은 사내는 단순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에 닿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지평선 너머, 성전이라는 이름 아래 쉬지 않고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전선에 향해있었다.
“교황님.”
후드가 달려 얼굴까지 가려진 회색빛 로브를 입은 누군가가 창밖을 보고 있던 사내를 교황이라 불렀다.
사내가 바로 유럽 전역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티탄교의 교황, 요한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클레이 사제님.”
“마흘 성기사단이 승전보를 전해왔습니다. 벨로루시가 티탄교을 국교로 제정, 타이탄님의 하늘 아래 평화를 누리게 될 성역이 되었습니다.”
클레이가 요한에게 타이탄 소속의 기사단 중, 하나인 마흘 기사단의 승전을 전했다.
마흘은 티탄교의 주신 타이탄을 섬기는 네 명의 종 중 하나로, 크고 작은 세상의 모든 다툼을 관장하는 종의 이름이었다.
“잘됐군요.”
기다리던 승전 소식에 요한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입가만 희미하게 올라간 작은 미소였지만 그 안에는 세상을 전부 감싸 안을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우크라이나로 향한 차디 기사단 또한 머지않아 승전 소식을 전해 올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마흘 기사단에 이어 벌레와 같은 작은 미물들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의 생사를 관장하는 종의 이름을 딴 차디 기사단의 미래 또한 밝았다.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너머는 러시아.
유럽의 동부는 전부 타이탄의 성역에 포함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모두 타이탄님의 은총덕분이지요. 조금이나마 더 넓은 땅의 많은 사람들이 타이탄님의 뜻을 알게 될 테니, 정말 잘 된 일입니다. 마흘 기사단에게는 무지한 백성들에 대한 포교활동에 힘쓰라 전하십시오.”
사실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된 성전은 말이 전투지, 진정한 전투라 보기는 어려웠다.
타이탄이 피에 미친 살인귀들도 아니고,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티탄의 신도가 될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다.
우선 각 백 명으로 이뤄진 기사단이 우선 각 국의 수뇌부들을 개종시키는 것을 목표로 포교활동을 펼쳤고, 이단으로 판단될 시에 처형, 티탄에 귀의한 수뇌부만 남겨놓음으로써 국가를 장악하는 수순을 밟았다.
성전이라 칭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의 경우에는 양국의 수뇌부를 개종시켰다 보는 게 옳았다.
그 뒤부터는 국민들에게 티탄교를 포교하며 이단을 가려내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단의 구분은 복잡하지 않았다.
티탄교도들의 포교활동에도 티탄교에 귀의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이단이었다.
“하지만!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서쪽의 아난과 프긴 기사단의 성전은 그 성과가 지지부진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장차 온 세상에 타이탄님의 뜻을 전하고 그 분의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우리가, 고작 육대주 중 하나에 불과한 유럽의 땅조차 성역으로 만들지 못해서야 어찌 타이탄님이 주신 은총에 보답 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타이탄은 지구의 모든 땅을 성역화하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티탄의 품에 안고자 한다,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에서의 승전은 승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물론 작은 시작이라도 기쁘기 그지없다.
그러나 성전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두 곳에서만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쪽에는 이단들이 힘을 합쳐 스스로가 이단임을 깨닫지 못한 채, 티탄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쪽이야 말로 진짜 전투고, 성전이다.
두 개의 기사단과 신도들이 매일 같이 피를 쏟으며 그들을 교화시키고자 하고 있었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요한은 이를 지적하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 세계는 타이탄님에게 버림받은 세계. 버려진 시간 동안, 뿌리내린 이단들이 제 잘못도 모르고 힙을 합치기까지 한 탓에 저항이 워낙 거센지라...”
“제가 직접 성전에 나설 것입니다.”
요한이 클레이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 말에 클레이의 눈이 커지고,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교황님께서 직접 말입니까?! 그럼, 타이탄 기사단도 함께 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요한이 교황임에도 갑옷을 입고 있는 이유였다.
그는 교황임과 동시에 티탄교의 다섯 기사단 중 하나인 타이탄 기사단을 이끄는 성기사이기도 했다.
“타이탄님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그 날, 폴란드의 대통령 궁에서 출발한 백 명의 타이탄 기사단과 이 세계에서 헌터라 불리는 성전사 수천이 성전이 벌어지고 있는 독일과 폴란드의 접경 지역으로 향했다.
***
나는 살막뿐 아니라, 유럽에서 태풍이 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오랜만에 형과 팀원들을 만나고 있었다.
형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막 헌터로 첫걸음을 내딛었을 때부터 함께한 팀원들이다.
전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태 함께하지 못했지만 어떻게 보면 내가 김원철보다 더 믿고 있는지도 모를 이들이었다.
“태빈아.”
“팀장님...”
“노력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나보군. 축하한다. 형도 축하해.”
그들의 마주한 내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서렸다.
넷은 안본 사이에 어엿한 한 사람의 무인으로 성장해있었다.
사실 보는 이에 따라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나는 한 사람의 무인이라 할 수 있는 경지를 절정이라 본다.
오랜만이라고는 하지만 경지를 이루기에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음에도 형과 팀원들 모두 절정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그리고 절정 무인이 됐다는 것은 넷 모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영약 등을 이용한 내공의 뒷받침만으로도 오를 수 있는 일류 무인의 경지와 달리, 절정에 오르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통해 임독 양맥을 타통하는 벽을 넘어야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운도 따라줘야 하지만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박동석 헌터께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고마워. 나도 동석 형님 가르침 덕을 봤다.”
“박동석 헌터가?”
나와의 첫 만남 때부터 무림에 대한 동경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무공을 갈구했던 박동석이다.
이후, 나는 박동석에게 팀원들과 형이 익힌 것과 같은 무공을 가르쳐줬었다.
물론 박동석이 이미 황실의 검술을 체득하고 있었고, 무공을 배우기 원한 것은 호기심에 가까웠기 때문에 무공 구결과 초식 등을 몇 차례 봐주는 것으로 가르침을 다했다.
그 이후에는 이런저런 일로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놀랐다.
막 가르침을 내렸을 때, 무서우리만치 수련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기는 했고, 후에 무공을 파고들고 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몇 달이나 먼저 무공을 익혀온 팀원들에게 가르침을 내릴 정도로 성취를 이뤘을 줄은 몰랐다.
박동석의 무재가 상상이상일지도 모른다는 놀라움과 함께 한 번쯤은 자신의 사람들을 봐준 것에 대한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형은 왜 박동석 헌터를 형님이라 부르는 거야?”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내가 물었다.
방금 전 형의 말에서 느낀 의문이었다.
안 본 사이에 형은 박동석을 형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아. 서로 호칭 문제로 고민하다가, 알고 보니까 나이가 비슷하더라고. 그래서 편하게 형, 동생 하게 됐어.”
첫 만남에서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그 뒤로 박동석은 단 한 번도 내게 예의를 잃지 않았다.
무공을 배운 뒤로는 나를 더욱 깎듯 하게 대하며 스승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런 박동석이기에 형과 서로 간에 호칭으로 인한 문제가 있었고, 그 결과가 형, 동생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기에 그렇게 잠시 서로 안부와 근황을 주고 받은 뒤, 김시연이 입을 열었다.
“저희도 이제 짐이 되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절정은 이 세계의 A급 헌터보다 반수 정도 높다 할 수 있다.
전력상 지금까지 함께 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제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경지였다.
“알고 있겠지만 죽을 수도 있다.”
앞으로 대적하게 될, 살막의 힘은 A급 헌터도 위험한 수준이다.
실제로 신의 길드 등에서 살막의 수작으로 수십의 A급 헌터들이 죽어나갔다.
협회에서 원 길드로 거처를 옮겨 오긴 했지만 듣는 귀가 있으니, 다들 알고 있을 터였다.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웠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도 팀원들과 같은 생각이야. 아니 입니다. 앞으로는 저도 팀원들과 똑같이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시연은 일전에도 보였던 결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다른 길드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형 또한 같은 얼굴을 한 채로 말을 보탰다.
함께 생활하더니, 완전히 팀에 녹아든 모습이었다.
“알겠어. 너희들의 뜻은 알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고 품에서만 감싸고 돌 수 없다.
애초에 팀원들에게는 그런 대우를 하지도 않았지만 형 또한 마찬가지.
서른이 넘은 형이다. 스스로 내린 결정을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살막이 사라지던가, 아니면 우리가 사라지던가. 힘든 시간이 될 거다. 그러니 오늘은 마음 편히 쉬도록 하자.”
내가 그들을 찾은 이유는 성취를 확인하기 위함도 있지만 지친 나를 달래기 위함도 있다.
중국 헌터부터 골렘까지 이어진 전투는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믿을 수 있는 형, 그리고 팀원들과 회포를 풀며 내일을 위한 짧은 휴식을 취했다.
***
결국, 태백과 태양 길드는 본격적으로 수도권으로 진출을 시작했다.
세력 다툼이라고는 하나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미미했다.
실질적으로는 태백 길드는 부길드장, 태양 길드는 S급 헌터로 추정되는 헌터를 중심으로 백 이상의 상위 등급 헌터들이 수도권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일반 시민 등은 두 길드의 수도건 진출을 반기까지 했다.
신의 길드의 공백을 두 길드가 메워준 셈이었으니, 시민들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시민들의 환영을 받은 두 길드는 수도권 인근의 건물을 매입해 이동시킨 전력을 주둔시킨 뒤, 신의 길드가 독점하다시피 했던 수도권 내의 B급 이상 던전의 공략을 경쟁하듯 진행해나갔다.
문제는 두 길드의 과도하게 던전을 공략해나가면서 시작됐다.
한 개의 길드가 있던 자리에 두 개의 길드가 들어섰다.
최근 새롭게 창설된 원 길드 또한 신의 길드의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청룡 길드와 신의 길드의 배려를 받던 원 길드였지만 이제 반은 태백과 태양, 두 개 길드와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세 개 길드가 자리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타 지역에 비해 좁은 수도권이다. 청룡 길드의 영역을 제외하면, 다시 절반으로 줄어든 지역에 세 개 길드가 몰려버린 셈이었다.
던전이 원한다고 생성되는 것도 아니고, 세 길드가 나눠 먹기에는 그 수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