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82화. 폭풍전야.
“벌써 세 번째인가.”
여문휘가 의자 손잡이를 검지로 톡톡 치며 말했다.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고저 없는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 살의가 담겼다.
지금 여문휘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장 분노하고 있었다.
“...”
여문휘가 말한 횟수가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는 제갈민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세 번.
태빈을 죽이고자 했다 실패한 횟수다.
사마휘와 왕추가, 혈귀가, 마지막으로 왕인귀가 실패했고,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직접 놈의 목을 따겠노라고. 그 때 군사가 뭐라고 했나.”
“...”
제갈민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유구무언.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했는가 물었다.”
“...왕인귀와 마랑이면 충분할 거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의 실수는 없을 거라 하였습니다...”
어렵게 입을 여는 제갈민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제갈민은 어쩌면, 오늘 자신은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랬지. 헌데,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들려온 거지?”
“...죄송합니다!”
여문휘의 물음에 제갈민은 곧장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빌었다.
쿵! 소리와 함께 이마가 깨져 피가 흘러나왔지만 제갈민은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바닥에 머리를 찧어 댔다.
“그만. 두 번 묻게 하지 마라.”
여문휘는 지금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까닥하는 순간, 제갈민을 죽여 버릴지도 모를 정도의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김태빈의 일은 죽어 마땅하지만 그 외의 일은 완벽하게 처리해 온 제갈민이다.
한 번, 아니 두 번의 실수로 죽여 버리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경쟁에 반목하던 한국 헌터들이 힘을 합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희 측에 회유됐던 신유연 또한 변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
“그리고... 정확하진 않지만 왕인귀가 방심한 게 아닐까싶습니다. 보고를 듣고 분석해본 결과, 앞서 이유들을 고려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당할만한 전력은 아니었습니다.”
제갈민이 실패의 이유를 늘어놓았다.
여문휘가 분명 두 번 묻게 하지 말라했다.
구차한 변명임을 알지만 물음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게 지금 제갈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렇군. 그래... 그래서 군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ㅇ..예??”
“아직도 내가 군사나 다른 놈들을 믿고 기다려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여문휘의 의도는 명확했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겠다는 뜻이다.
무영살로 추정되는 김태빈의 목을 치기 위해.
“그...그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제갈민은 반대 하지 못했다.
여문휘는 불구대천의 원수를 두고도 자신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사마휘와 왕추는 차치하더라도, 혈귀와 왕인귀까지.
자신이 안배한 두 번 모두 실패했고, 아까운 인재를 수십이나 잃었다.
더 이상 여문휘의 뜻을 막을 수 없었다.
“권왕을 데려가십시오.”
반대할 수 없다면, 최선을 생각해내야 하는 게 군사다.
권왕은 살막, 아니 중국 전체를 통틀어 둘 뿐인 화경의 고수.
여문휘와 권왕, 두 명의 화경의 고수라면 이번에야 말로 틀림없이 김태빈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나 혼자로 부족하다는 뜻인가.”
여문휘의 검미가 꿈틀댔다.
가뜩이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듯, 권왕을 언급하는 제갈민의 언행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절대 아닙니다! 문주님께서 놈을 맡는다 해도, 놈 휘하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맡을 사람은 하나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제갈민이 손사래까지 치며 열변을 토했다.
불안한 마음이 없다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솔직히 말해 기껏 피한 화를 자초할 바보는 아니다.
권왕을 데려가라 한 이유는 한 때 김태빈의 제자로 추정됐던 헌터들이나, 태빈에게 협력하는 헌터들을 맡기게 하기 위함이다.
살수이기에 정면으로 맞붙지는 않겠지만 권왕이 먼저 나서준다면, 여문휘가 태빈을 상대하기가 한결 수월해 질 터였다.
“흠... 알겠다.”
한 차례 턱을 쓰다듬은 여문휘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제갈민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다.
태빈을 제외하고는 전부 손짓 한 번이면 쓸려나갈 것들이지만 훌륭한 칼을 놔두고 직접 손을 쓸 필요는 없었다.
***
장웨이가 떠나가고 한국에는 잠시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언제 동기화가 발생할지 알 수 없어 시한폭탄과 같던 재앙급 던전 두 개가 사라졌다.
물론 던전이 고작 두 개뿐인 것은 아니지만 그 외의 것들은 현재 한국의 헌터 전력으로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신의 길드가 해체를 선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일반인들만 누리는 것에 불과했다.
김원철의 설명에 따르면, 삼척과 전주의 공략에 참여했던 길드들을 시작으로 헌터들은 여느 때보다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예 전력의 절반가량을 잃은 신의 길드 길드장 차주한이 길드의 해체를 선언하고, 길드원들에게 해산을 명령했다.
삼척의 공략에서 부상자를 더해 A급 헌터만 마흔일곱 명을 잃은 탓이다.
신의 길드가 보유하고 있던 A급 헌터는 백 명 남짓.
절반에 달하는 정예를 잃고 예전과 같이 길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물론 신의 길드가 다수의 A급 헌터를 잃긴 했지만 1세대 길드 다섯 곳 중, 청룡 길드와 함께 유이하게 S급 헌터들 보유한 길드인 만큼, 길드를 유지하고자 했다면, 예전만은 못하더라도 명맥은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주한은 복수를 택했다.
전주의 공략에는 차예린만 가담했지만 차주한 또한 왕인귀를 넘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살막을 향해 이를 갈고 있었다.
원통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길드보다 복수가 우선 한 것이다.
이는 차주한 뿐만 아니라, 신의 길드의 모든 헌터들의 뜻이 같았다.
길드는 해체됐지만 길드원들은 해산 명령에 따른 A급 이상의 헌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전히 차주한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바뀐 거라곤, 길드라는 굴레를 벗어던졌다는 것뿐이다.
신의 길드는 해산 선언과 동시에 오로지 복수만을 위한 단체로 탈바꿈됐다.
“태백 길드와 태양 길드 신의 길드의 영향 아래 있던 수도권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최근 새롭게 창설된 원 길드를 제외하고, 다섯 개의 1세대 길드들이 각 지역에 근간을 두고 그 지역을 맡아 수호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의 길드와 청룡 길드가 서울과 경기를 양분하고 있었고, 주작 길드는 충청도, 태백 길드는 경상도, 태양 길드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마지막으로 반쯤은 몬스터 소굴로 전락한 강원도에는 중소 길드와 함께 주민들이 주축이 된 자경단이 있었다.
변혁이후부터 유지되어 온 세력구도였고, 호사가들은 이를 삼국 시대에 비유해 오 길드 시대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한 세력 구도가 신의 길드의 해체로 인해 무너졌다.
신의 길드는 더 이상 수도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이 틈을 파고들며 야욕을 드러낸 것은 태백 길드와 태양 길드였다.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전력에 비해 저평가 됐다고 평가 받던 두 길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도권 진출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신의 길드가 해체했다고는 하지만 청룡 길드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수도권을 기반으로 하는 길드는 신의 길드만이 아니다.
청룡 길드의 신유연 또한 S급 헌터를 보유하고 있는 길드.
신의 길드가 사라졌다고는 하나, 청룡 길드가 버티고 있는 한 수도권은 태백과 태양 길드가 쉽사리 넘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사실 최근 두 길드에서 차례로 S급 헌터를 영입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기에 소문으로 그쳤을 뿐이지만 사실이라면 그들이 수도권 진출을 노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S급 헌터 말입니까? 대체 어디서?”
“살막의 헌터들이 아닐까싶습니다.”
확실히 살막의 힘이라면, S급 헌터 한둘쯤 지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S급 헌터가 있다면, 태백과 태양 길드로서는 지금 시기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태양 길드도 살막에 회유된 겁니까?”
“태양이 영입한 S급 헌터가 살막의 헌터가 맞다면, 그렇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태백이 살막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태양 길드는 여태 흔적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그 흔적이 드러났다.
확실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확인이 필요했다.
***
그 시각.
유럽 쪽에서도 거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아시아의 살막과 버금가는 음지 단체였던 타이탄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타이탄은 폴란드부터 시작해 슬로바키아와 체코를 단숨에 집어 삼켰다.
이미 각국의 대통령들이 티탄교에 귀의한 상태였기 때문에 세 나라의 복속은 정말 순식간에 이뤄졌다.
세 나라를 집어 삼킨 타이탄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인 티탄교와 신, 타이탄을 믿지 않는 이들을 전부 이단으로 칭하고, 죽음과 파괴를 선사했다.
각국의 대통령들은 직접 언론을 통해 티탄교로의 귀의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했지만 종교는 지도자가 강요할 수 없는 부분.
타이탄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 국가 내에서는 다른 종교를 믿는 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린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세 나라를 피로 물들인 타이탄은 행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타이탄의 궁극적인 목적은 종교의 일원화.
티탄교로 전 세계가 하나 된 신성제국을 건립하고, 전 인류에게 티탄교에 귀의하게 함에 있다.
때문에 타이탄은 서쪽으로는 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동쪽으로는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등으로 계속해서 마수를 뻗쳐나갔다.
타이탄의 존재를 알고 대비하고 있던 유럽의 국가들은 독일,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즉시 연합을 형성해 그 준동에 맞섰다.
삽시간에 폴란드와 체코, 슬로바키아를 잃었지만 그 이상은 허락 할 수 없다는 듯,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수 년 간 음지에서 영향력을 넓히며 힘을 기러온 타이탄은 홀로 유럽 전부와 맞설 만 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힘을 모은 유럽 연합이 근소한 우위에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우위는 점하진 못했다.
타이탄에 속한 헌터들의 힘이 상상이상으로 강력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광신도들이었다.
종교라는 이름아래 죽음도 불사하는 광신도들은 연합 세력 내에도 스며들어 있었고, 이는 연합의 힘이 온전히 한데 모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로 인해 폴란드와 접한 독일 국경과 체코, 슬로바키아와 접한 오스트리아 등에 거대한 전선이 형성 됐고, 매일 같이 크고 작은 전투가 지속되는 중이었다.
또한 유럽 연합이 막아낸 곳은 동쪽, 유럽의 절반에 불과했다.
타이탄은 유럽 연합과 맞서면서도 남은 여력으로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등, 동쪽으로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