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살수다-81화 (81/150)

# 81

81화. 변심.

뚜벅. 뚜벅.

나는 골렘의 사체에서 내려와 걸음을 옮겼다.

헌터들은 고고하게 느껴지던 내가 걸음을 내딛자, 일제히 시선을 집중했다.

내가 옮기는 걸음의 끝에는 신유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선택은 하셨습니까?”

“예...예?”

갑작스런 물음에 신유연은 멍청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있던 그로서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한국과 살막. 신유연 길드장께서는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어...어떻게...?”

신유연의 눈이 커졌다.

태빈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태빈만이 아니었다.

원 길드의 김원철도, 주작 길드의 백현민도,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몰랐을 거라 생각 했습니까?”

김원철의 물음에 신유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살막의 존재를 알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살막이 처음 접촉해왔을 때, 신유연은 망설임 없이 그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느낀 살막의 힘은 대단했고, 그 결정을 후회하는 순간이 오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으니까.

중국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집어 삼킨 소식을 듣고서는 자신의 결정이 현명했다 여기기까지 했었다.

그 뿐이랴.

중국 헌터들이 살막의 일원이라는 것과 그들이 일부러 한국 헌터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삼척의 던전에서 신의 길드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때도 신의 길드의 피해보다는 재앙급 던전의 공략 결과를 고작 서른 명이서 좌지우지 한 살막의 힘에 다시 한 번 놀랐을 뿐이다.

그렇기에 진주의 던전이 삼척보다 10,000 이상 높음에도 망설임 없이 청룡 길드의 정예를 투입할 수 있었다.

살막과 같은 편에 서 있는 한 청룡 길드가 피해를 입을 일은 전혀 없을 거라 믿었다.

게다가 예정과 달리, 원 길드와 주작 길드의 헌터들이 참가하면서 계획이 틀어졌음에도 이를 반겼다.

이번 공략에서 그들의 전력 또한 약화 된다면, 청룡 길드가 단숨에 한국 제일의 길드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생각했던 살막 헌터들이 김태빈이란 헌터 한 명에게 역으로 당해버렸다.

신유연이 ‘절대’라고 생각했던 살막이 단 한 명에 의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잠시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신유연은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결국 이 자리에서 선택을 해야 함을.

그 선택이 만약 태빈의 뜻과 다르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말이다.

물론 다른 선택을 한다 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이 자리에서 살아나간다 한들, 중국 헌터들의 일이 밝혀진다면, 살막이 그들의 죽음을 방관한 신유연을 살려둘 리 없었다.

“...한국의 편에 서겠습니다...”

결국 신유연은 한국의 편에 서기로 결정을 내렸다.

신유연이 변심한 이유는 하나였다.

태빈.

태빈이 S급 헌터라는 사실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이상 현상 던전의 해결 방법으로 인해,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묻히긴 했지만 한국에서 손꼽히는 청룡 길드의 길드장이 모를 소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빈의 실력은 소문, 아니 상상 이상이었다.

SS급 헌터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골렘을 상대로 선보인 앞도적인 힘은 신유연의 의지를 꺾어놓았다.

살막의 힘은 대단하다고만 알고 있을 뿐, 신유연이 경험하지 못한 힘이다.

그러나 태빈의 힘은 눈앞에서 직접 마주했다.

그 압도적인 힘은 살막이 얼마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건, 결코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졌다.

태빈 한 사람으로 인해 신유연은 후회했고,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럼 신유연 길드장님까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 배를 탔군요.”

내가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적이기에 죽였을 뿐이지, 살인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무의미한 살육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지은 미소였다.

오십의 청룡 길드원은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

보스 몬스터였던 골렘을 죽이고, 모든 몬스터들을 처리했지만 어느 누구도 던전 핵을 파괴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뿐이었다.

중국 헌터의 몰살.

지금 막, 공략이 끝나기 전까지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문제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어떠한 변명을 한다 한들, 최소한의 의심은 피할 수 없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내가 말했다.

한국 헌터들의 피해는 다섯에 불과하다.

중국 헌터들이 포위망을 뚫고자 할 때, 둘이 당했다.

마지막 전투에서 둘이 더 죽고, 한 명이 부상을 입었다.

중국 헌터 스물여덟이 전멸한데에 반해, 한국 측의 피해는 고작 다섯. 부상자를 제하면, 사망은 넷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가 봐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의심은 의심일 뿐입니다.”

그러나 삼척의 던전에서 신의 길드의 피해에 그러했듯, 던전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살아남은 모두가 입을 맞춘다면, 의심은 할지언정 증거가 없는 것이다.

“백여 명이 넘는 인원입니다. 통제한다 해도 모두의 입을 막을 수는 없을 터. 결국 드러나게 될 겁니다.”

내 말에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신유연이었다.

변심을 결정한 순간, 신유연은 가장 적극적으로 변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살인멸구라도 하지 않는 이상, 백 명이 넘는 사람의 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겁니다.”

진실을 알고 있는 헌터가 몇 명도 아니고, 백 명이 넘는다.

살막이 정보를 캐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진실을 알 수 있다.

아니, 굳이 캐내고자 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밝혀질 지도 모를 정도다.

“하지만 어설픈 거짓이라도 살막이 진실을 알아낼 때까지 약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잠시간 시간을 버는 건 어렵지 않다.

아무리 살막이라도 이제는 양지로 드러난 이상, 의심만으로 무턱대고 병력을 투입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각 길드가 길드원들을 통제해 외부와의 접촉을 막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면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고작 며칠, 길어야 일주일 정도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약간의 시간으로 한국은 살막에 대항할 최소한의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와~~아!! 아...”

던전이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의 환호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하나둘, 돌아오지 못한 헌터들의 수가 적지 않음을 눈치 챘다.

그리고 돌아온 헌터들 중에 중국 헌터들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연합 공략 과정에서 특정 세력만 돌아오지 못하는 일은 드물다.

아니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발생한 게 아니라면, 결코 발생할 리 없는 일이기도 했다.

“...”

잦아들던 환호가 완전히 그치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무사한 김원철을 보고 밝게 웃던 현 협회장 유인원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고, 정부 관계자들의 얼굴은 당황으로 물들었다.

각 길드의 헌터들 또한 동료가 무사히 돌아왔음에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뭐야?! 대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헌터들의 귀환을 기다리던 이들 가운데, 한 사내가 고성을 지르며 튀어 나왔다.

사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귀환한 헌터들을 두리번거렸다.

“장웨이씨...”

사내는 중국 헌터들의 비서 격인 장웨이는 헌터들의 편의와 정부 등과의 통역 등 공략을 제외한 모든 대소사를 책임지는 인물이었다.

그 또한 헌터였지만 B급에 불과했기에 공략에는 함께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지금은 한국에 투입된 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되었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김원철이 코앞까지 달려온 장웨이를 보며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백여 명이 넘는 헌터 모두가 나름대로 숙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사고?!! 대체 무슨 사고로 중국 헌터들이 돌아오지 못했단 말이야?!”

장웨이는 그런 숙연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대뜸 김원철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한참이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습이 있었습니다.”

장웨이가 김원철보다 등급이 낮다고는 하나 B급 헌터다.

나쁜 마음을 먹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음에도 김원철은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수백의 몬스터들이 끝을 모르고 달려들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기습이었음에도 왕인귀 헌터를 비롯한 중국 헌터들은 용감히 맞섰습니다. 하지만 후미에 있던 저희 측 헌터와 단절된 채, 포위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화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원철이 멱살이 잡힌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왕인귀를 필두로 앞서 나아가던 중국 헌터들의이 몬스터들의 기습에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측 헌터만 전부 죽은 게 말이 돼?!”

“크윽...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원철의 눈에서 원통함이 담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앞서 입을 맞춰놓긴 했지만 보고 있는 헌터들도 빠져들 만큼, 완벽한 연기였다.

과연 자신 있게 맡겨 달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정부와 길드 사이에 끼어 5년 간 협회를 이끌어온 김원철에게 눈물 연기쯤을 일도 아니었다.

“그럴 리 없어! 대국의 헌터들이 고작 이 따위 던전에서 전멸을 당했다고?! 네 놈들이 수작을 부리지 않고서야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장웨이는 김원철의 혼이 실린 연기에도 중국 헌터들의 죽음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장웨이가 중국 헌터의 전력을 알고 있다면, 믿을 리 없는 핑계이긴 했다.

SS급와 S급 다섯이 포함된 전력이다.

기습을 당할 리도 없거니와, 설령 당했다 하더라도 전멸은 말이 되질 않았다.

A급 헌터들이 모조리 죽어 나갔다 해도 최소한 S급 이상은 살아남았어야 했다.

하물며 던전 안에는 그들만 있던 것이 아니다.

다른 헌터들은 고작 몇 명의 사상자만 발생하고, 중국 헌터들만 돌아오지 못했다.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

“입이 있으면 말을 해! 씨발! 신유연 길드장!”

대답 없는 김원철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분통을 터트리던 장웨이의 시선이 청룡 길드의 신유연에게로 향했다.

신유연은 살막과 함께 하기로 한 헌터.

장웨이는 그라면, 진실을 말할 거라 생각했다.

끄덕.

신유연이 침울한 표정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웨이는 알지 못했지만 이미 살막에 등을 돌린 신유연이다.

그에게 진실을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으아아!!!”

장웨이가 절규를 토해냈다.

조금만 냉철했다면 신유연의 변심을 의심해 볼 법도 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정상적인 사고를 할 정신은 없었다.

“...후...후...조금의 거짓이라도 드러나는 순간, 오늘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후, 어느 정도 감정이 가라앉은 장웨이가 날 선 경고를 보내왔다.

그러나 그는 결국, 중국 헌터들의 유품을 가지고 쓸쓸히 중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백여 명이 입을 모아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혼자 진실을 파헤칠 방법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