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80화. 왕인귀(4).
남은 중국 헌터들이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던전 내부.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들 내면에 피어난 공포가 제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소리쳤다.
툭.
그러나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어느새 원 길드와 주작 길드의 헌터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원 길드의 김원철, 주작 길드의 백현민과는 사전에 얘기가 되어 있었다.
내가 갑자기 일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확실하게 움직였다.
“뭐야...?”
청룡 길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 위해 양측의 눈치를 보기만 할 뿐,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길드원 전체가 눈알을 바삐 굴리고 있었다.
“너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살려주십시오.”
퇴로마저 막히자, 몇몇 중국 헌터들이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슴없이 나를 공격해 죽이려고 했던 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보여주는 비굴함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소국의 헌터들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중국은 이번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네 놈뿐 아니라, 한국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반면, 대국이 소국의 헌터들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듯, 비굴한 모습을 보인 동료들을 다그치거나, 굳어진 얼굴로 결의를 다지는 이들도 있었다.
어차피 다 죽일 생각이었지만 차라리 이편이 비굴한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하압!”
결의를 다진 일부가 결사항전을 택했다.
서로 간의 시선을 교환한 십 수 명의 중국 헌터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아쉽게도 나에게 향한 헌터는 없었다.
중국 헌터들은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주작 길드의 포위망을 뚫어내고자 했다.
애초에 김원철의 지시 하에 만전을 기하고 있던 원 길드와 달리, 주작 길드의 길드원들은 얘기를 듣지 못했는지, 갑작스럽게 벌어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포위가 허술한 편이었다.
“살아서 꼭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의도는 명백했다.
도주 후 어딘가에 숨어 공략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릴 심산인 것이다.
평생 던전에서 살 게 아닌 이상, 결국 공략은 완료 할 수밖에 없다.
밖으로 나가기만 한다면, 자신들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거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뚫어!”
물론 살아서 포위망을 뚫어냈을 때의 얘기였다.
허술하다고는 하나, 비교적으로 그럴 뿐이다.
두 배에 달하는 헌터들의 포위를 생각처럼 쉽게 뚫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크악!”
서로의 마음가짐이 달랐다.
죽기를 각오한 중국 헌터들과 달리, 주작 길드원들은 김태빈이라는 헌터 개인의 감정으로 촉발된 싸움에 중국 헌터들을 향한 손속에 사정을 뒀다.
중국 헌터들이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통에 맞서기는 했지만 필사적으로 막아서지 않은 것이다.
동료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시체가 두엇 발생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전력을 다 했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헉... 헉... 산개해서 도망쳐!”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국 헌터들은 동료의 죽음을 발판삼아 결국 포위망을 뚫어냈다.
목숨을 구걸하던 자들 중, 일부가 가담하기도 했다.
그렇게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은 수는 고작 셋.
아직 생이 확실시 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세 헌터들은 조금이라도 생존률을 높이기 위해 세 방향으로 갈라져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푹. 푹. 푹.
“커억!”
“으악!”
중국 헌터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세 자루의 비수가 허공을 격하고 날아가 끝까지 살아남은 세 명의 등에 틀어 박혔다.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도망치던 셋은 비수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도주를 감행한 자들과 목숨을 구걸한 자들.
중국 헌터들 간에 뜻은 갈렸지만 그들이 맞이한 결과는 같았다.
***
“시체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원철이 물었다.
왕인귀와 다섯 명의 S급 헌터를 더해, 도합 스물여덟의 시체가 어지러이 굴러다녔다.
참수형이라도 당한 것처럼 목이 붙어 있는 시체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사실 공략과정에서 발생한 시신을 가능한 밖으로 챙겨 나가는 것은 헌터들 사이에 무언의 약속이다.
자신이 죽더라도 시신이나마 가족 혹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모든 헌터들이 같기 때문이다.
“가지고 나가봐야 의심만 살 겁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 헌터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같은 헌터들에 의한 죽음이다.
몬스터에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일반인이 봐도 알 수 있는 수준.
어차피 중국 측의 의심을 피할 수 없긴 하지만 굳이 증거까지 가져다줄 필요는 없었다.
“유품으로 칠 장비만 몇 개 챙기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장비들은...?”
스물여덟 모두 중국에서 손꼽히는 최상위 헌터들이다.
당연히 그들이 착용한 장비들 또한 두말할 것 없는 최상품이다.
죽은 자들이 쓰던 무구들이기에 꺼림칙한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그냥 버리고 가기에는 아까운 것들이다.
“저는 필요 없으니, 알아서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김원철은 곧장 백현민과 얘기를 나눈 뒤,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신구나 쉽게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무구들은 모조리 챙기기 시작했다.
***
그렇게 중국 헌터들 사후에 대한 논의와 처리가 끝났다.
그러나 공략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백이 훌쩍 넘는 몬스터들을 죽여 중반 이상 진행되긴 했지만 여전히 공략은 진행 중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지휘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잠깐의 휴식 뒤에 공략이 재개됐다.
왕인귀가 맡았던 공략대장 자리는 김원철이 맡았다.
나를 제외하고도, 대한민국의 S급 헌터가 모두 모인데다, 주작길드의 길드장 백현민도 있었지만 지휘를 맡을 만한 사람은 김원철뿐이었다.
박동석은 애초에 김원철이 창설한 원 길드 산하의 길드원이었고, 차예린은 오로지 복수를 위해 함께 했다.
그리고 주작 길드의 백현민은 A급 헌터인 탓에 S급들을 포함해 지휘한다는 자체를 부담스러워 했고, 청룡 길드의 신유연은 아직까지도 쉽게 나서지 못하고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김원철 헌터의 지휘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신유연은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하나의 단체를 이끌고 있는 만큼,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정확히는 아니지만 중국과 한국 헌터들 간에 공존할 수 없을 정도의 마찰이 존재함은 알 수 있었다.
신유연은 한국의 헌터이면서 살막의 회유에 넘어간 헌터다.
양 측에 한 발씩 걸치고 연관이 있는 만큼, 괜한 불똥이 튀지 않도록 살아남은 한국 측 헌터들에게 적극 협조하면서 조용히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전열을 갖추고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속과 상관없이 역할군에 따라 배치하도록 할 테니,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왕인귀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탓에 각 소속 별로 나뉘어 이동하고,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김원철이 지휘를 맡고는 달라졌다.
탱커들이 전위를 맡고 근접 헌터 절반이 그 뒤를 받쳤다. 가운데에 원거리 헌터들과 힐러가 서고, 남은 절반의 근접 헌터와 소수의 탱커가 후미를 맡았다.
공략은 순조로웠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로 서른 명에 달하는 인원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백이 넘는 헌터들이 남았다.
중국이 전력을 숨기고 있던 탓에 그들의 부재에 따른 전력의 감소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전열을 갖춘 것도 한 몫 했다.
원거리 딜러들의 화력을 몬스터들에게 확실히 집중시킬 수 있었고, 전위의 탱커들의 방어도 더 굳건해졌다.
그 덕에 여전히 근접 헌터들의 역할은 미미했지만 한 차례 살육 탓인지 이전처럼 해이해지는 모습은 없었다.
“마지막이군요...”
두 차례의 전투 뒤에 보스 몬스터를 마주했다.
백여 마리의 몬스터들 한 가운데에 있던 커다란 바위가 몸을 일으켰다.
인근의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며 파묻혀 있던 바위의 팔과 다리가 지상으로 솟구쳐 올라왔다.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보스 몬스터는 높이만 족히 삼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체의 골렘이었다.
“아아...”
“이럴수가...”
골렘을 마주한 헌터들이 작은 탄식을 쏟아냈다.
골렘은 강했다.
느껴지는 기운만 해도 최소 S급 헌터 대여섯은 모여야 감당할 수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재앙급 던전 치고 수월하게 진행됐던 공략이었다.
헌터들은 마지막에 와서야 진정한 재앙을 마주했다.
“골렘은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검을 움켜쥔 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괜찮겠습니까?”
“보스 몬스터를 혼자서 맡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김원철과 차예린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S급 헌터인 왕인귀가 전력을 다한 헬파이어를 정면에서 막아냈다.
왕인귀와 마랑 등, S급 헌터들을 일격에 베어내기도 했다.
내 힘이 S급 헌터를 상회한다는 것을 직접 본 김원철과 차예린이다.
그럼에도 골렘의 기운 또한 느끼고 있기에 걱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예. 놈 하나가 전부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헌터들과 함께 다른 몬스터를 상대해주십시오.”
박동석, 차예린, 신유연, S급 헌터들이 나를 돕는다면, 골렘을 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은 골렘 하나가 아니다.
처음으로 헌터들과 비슷한 수의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그것도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 같이 2급 이상의 몬스터들이다.
S급 헌터들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자칫 헌터들 사이에 대규모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차예린은 끝까지 걱정을 지우지 못했지만 김원철은 나를 믿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은 태빈이다.
불가능한 일을 몇 차례고 해낸 태빈이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었다.
사실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
내 말대로 적은 골렘 하나가 아니었다.
나 하나를 돕기 보다는 헌터들의 피해를 생각하는 것이 지휘관으로서 옳은 판단이었다.
***
결과적으로 나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골렘은 최근 마주했던 드래곤보다 몇 배나 강했다.
하지만 그래봐야 혈귀보다 조금 위에 불과했고, 나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내가 골렘을 맡고 있는 동안, 헌터들도 잘 싸워주었다.
S급 헌터들의 활약으로 피해도 미미했다.
중상자가 둘 발생하긴 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몬스터의 규모를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적은 피해였다.
“헉...헉...”
결과와 달리, 전투자체가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김원철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오랜만에 전투를 치른 탓에 더 지친 것도 있지만 다른 헌터들도 호흡이 썩 고르진 않았다.
“후...끝났나.”
박동석이 길게 호흡을 뱉으며 방패를 내려놓았다.
“아마도요.”
“피해가 적어 다행이네요.”
차예린과 백현민도 무기를 거두었다.
눈을 씻고 둘러봐도 사체뿐, 더 이상 살아있는 몬스터는 없었다.
“그나저나... 대단하네요.”
“SS급...”
백현민의 시선이 태빈에게 향했고, 차예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태빈은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된 골렘의 사체 위에 홀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