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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79화 (79/150)

# 79

79화. 왕인귀(3).

발톱 하나가 내 몸보다 큰 몬스터의 발이 통째로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순간 내 시야에 어둠이 내려앉을 정도였지만 나는 고작 한 걸음 옮기는 것만으로 피해냈다.

쿠웅!

굉음이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

거대한 몸체가 가진 무게가 만들어내는 파괴력이었다.

타타탁.

몬스터의 발가락 사이로 튀어 오른 나는 발을 타고, 발목과 무릎을 지나 놈의 머리 위로 뛰어 올랐다.

몬스터가 만들어낸 굉음이 가시기도 전에 나는 몬스터의 목 위에 서있었고, 몬스터의 생은 자신이 만들어냈던 소리가 잦아드는 것과 함께 끝이 났다.

서걱!

강기에 둘러싸여 3m가 넘는 거검으로 화한 내 검이 몬스터의 목을 스쳐지나갔다.

고작 2급 몬스터를 처치함에 있어서 일격이면 충분했다.

케이크 잘리듯 부드럽게 잘려나갔다.

쿵!

몸과의 연결이 끊어진 머리가 떨어져 내리며 다시 한 번 굉음과 땅의 울림을 만들어 냈다.

머리를 잃은 몸에서 솟구친 피가 비가 되어 허공에 흩뿌려졌고, 바닥의 머리에서 새어나온 피는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솨아아.

나는 쏟아지는 피의 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뇌를 부수거나 심장을 꿰뚫어 더 깔끔하게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왕인귀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손속을 과하게 했다.

본능을 우선시하는 몬스터들이 두려움에 멈칫할 정도였다.

“죽어!”

근접 딜러들은 그 피에 몸을 적셔가며 미친 듯 싸웠다.

해이함에 젖어 있던 눈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다시금 긴장이 자리한 건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 빈자리를 광기가 채워나갔다.

“크하하! 죽어라!”

평소라면 공략팀 전부가 완벽한 전열을 갖춘 채, 상대해야 할 몬스터다.

안전을 위해 헌터들은 기계 속의 톱니바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싸울 수 있었다.

동료 헌터들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전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로지 스스로만을 책임지며 온 힘을 다 해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과 대등한 힘을 가진 몬스터와의 생사투.

그 자유로운 싸움이 헌터들이 미치게 만들었다.

광기에 잠식된 헌터들은 외향만 다를 뿐, 마치 본능에 충실한 몬스터와 같았다.

눈앞의 상대를 죽이기 위해 전력을 쏟아 부을 뿐이었다.

***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A급 헌터 한 명과 한 마리의 몬스터는 거의 대등한 힘을 가졌다.

전위로 나선 헌터는 오십뿐이었지만 수적 우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이에는 나와 마랑이라는 S급 이상의 강자가 둘이나 존재했다.

거기에 광기가 더해지니, 몬스터는 버텨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절반에 달하는 몬스터가 쓰러졌고, 남은 몬스터의 생명도 머지않아 보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상황은 생각한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큭! 피해라!”

갑자기 중국의 S급 헌터 마랑을 필두로 한 중국 측 헌터들이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막아낸 마랑이 신음을 토하며 밀려났다.

중국 측 헌터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공격을 피하고 막아내며 사방으로 산개했다.

그로 인해 순간적으로 틈이 생겨났고, 몇 마리 몬스터가 그 틈을 파고들 낌새를 보였다.

중국 헌터들이 비어버린 뒤에는 원 길드의 헌터들이 다른 몬스터와 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위험해!”

누군가 소리쳤다.

그의 외침처럼 일견 위험해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주변에 즉각 지원할 수 있는 헌터만 해도 열이 넘었고, 틈을 파고든 몬스터는 서넛에 불과했다.

헌터들이 광기에 젖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전황을 뒤집히거나, 피해가 발생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나부터가 곧장 몬스터들을 향해 몸을 날렸고, 후미를 받치던 헌터들도 즉각 반응을 보였다.

“헬파이어.”

그러나 왕인귀의 판단은 달랐다.

그는 미리 준비해뒀던 마법을 곧장 몬스터에게 쏘아 냈다.

헬파이어라는 마법은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마나를 내포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마법이 정확히 나와 일부 헌터들을 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실수를 가장한 고의였고, 왕인귀가 나에게 전위를 부탁한 이유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크...

이름에 걸맞게 헬파이어는 몬스터들을 불태웠다.

범위에 닿은 신체 일부가 녹아 사라진 몬스터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몬스터를 일거에 소멸시킨 헬파이어는 나에게로 향했다.

“김태빈 헌터!”

“악!”

“이런! 피해!”

시야를 완전히 가린 헬파이어로 인해 보이진 않았지만 당황 섞인 외침들이 여럿 들려왔다.

그 중에는 실수를 가장한 왕인귀의 것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헬파이어에 피하지 않고 맞섰다.

피하고자 하면, 피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내 뒤에는 원 길드의 헌터들이 있었다.

그들로서는 막아낼 수 없는 마법이다.

내가 막아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불타 사라질 것이다.

콰아앙!

헬파이어가 나에게 닿았다.

왕인귀가 전력을 다한 마법이다.

직접 느끼고, 보았듯 강대한 힘이 담긴 마법이었다.

그러나 세상 자체를 지워버리는 듯했던 드래곤의 브레스보다는 못했다.

애초에 내가 살신성인의 자세로 헬파이어를 막아낸 것은 결코 아니다.

담긴 기운으로 보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느꼈기에 힘으로 부딪쳤을 뿐이다.

또한 피하지 않아야 왕인귀를 옭아매기가 편했다.

아군이 있는 상황에서도 이를 생각하지 않고 공격한 점에 대해서는 분명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화르륵...

내 검과 부딪친 헬파이어는 급격히 힘을 잃었다.

겁화와 같은 불길도 내 강기를 뚫어내지는 못했다.

헬파이어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내재된 마나가 불길과 함께 흩어지고 있었다.

콰콰쾅!

헬파이어에 이어 수 개의 마법과 화살이 더 쏘아졌다.

확인사살이라도 하려는 생각이었는지, 중국 측 헌터들의 소행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무의미한 공격이었다.

굳이 막을 필요도 없었다.

다급했는지,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공격들은 내 호신강기에 막혀 나에게 닿지도 못하고 힘을 잃고 사라지거나, 튕겨져 나갔다.

딱 하나 위협이 될 만한 공격이 있긴 했지만 그뿐,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어떠한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김태빈 헌터!”

“아...다행..”

“어떻게...”

결국 힘을 다한 헬파이어와 몇 개의 공격들이 사라졌다.

지켜보던 헌터들의 목소리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김원철은 다행이라는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고, 차예린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왕인귀를 비롯한 중국 측 헌터들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탄식을 흘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탄식이었지만 그로 인해 그들의 의도가 한 번 더 명백해졌다.

“왕인귀!”

나는 마법을 쏘아낸 왕인귀의 이름을 부르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직 몬스터들이 일부 남아 있었지만 안중에도 없었다.

겁 없이 다가서는 놈들은 제 죽음도 인지하지 못한 채, 내가 쏘아낸 강기에 머리가 터져 나갔다.

몬스터의 신체 일부를 소멸시켜버리는 것쯤은 나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공의 소모가 비효율적이기에 굳이 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김태빈 헌터! 실수입니다.., 몬스터를 보고 다급한 마음에... 그래도 김태빈 헌터라면, 분명 피하실 수 있었을 텐데...어쨌든 다행입니다.”

왕인귀는 분노한 얼굴로 다가오는 나를 보며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연기가 제법이었다.

누가 봐도 진짜 실수였던 것으로 보일 정도로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거침없이 그의 앞까지 다가가 섰다.

“실수? 지금 실수라고 했나?”

“예. 정말 실수였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고, 정말 미안합니다.”

뻣뻣하던 왕인귀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실패는 전혀 염두 해두지 않았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저나 전부터 생각했는데, 왕인귀는 경계심이 너무 옅었다.

언제든 내 공격을 막아낼 자신이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먼저 공격하지 못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건지.

처음 말을 걸어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너무 쉽게 나에게 간격을 허용했다.

서걱.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빌미를 제공한 건 왕인귀 쪽이다.

고작 사과 따위를 받겠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내 목표는 오로지 왕인귀의 목이었고, 찾아온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지켜보는 이들이 당황하고, 과한 처사라 여기긴 하겠지만 목숨을 위협한 적에게 목숨으로 갚아주는 것은 무림이나 이곳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나도 실수였다. 나는 네 놈의 실수를 막아냈지만 네 놈은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을 뿐이다. 뭐, 그래도 실수이니 만큼, 사과는 하도록 하지. 미안하군.”

나는 바닥을 구르는 왕인귀의 머리와 눈을 맞춘 채, 말했다.

사람을 죽였지만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숱하게 해왔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허억! 김태빈 헌터!”

“네 이놈! 이 무슨 짓이냐?!”

갑작스러운 살인에 나와 얘기가 되어 있던 이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반응이 사뭇 달랐다.

김원철 등은 얘기도 없이 벌어진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이내 예견된 결과였음을 깨달았다.

반면, 순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중국 측 헌터들은 곧장 내게 무기를 겨눴다.

“아. 네 놈들도 있었구나.”

왕인귀 뿐만 아니라, 중국 헌터들 또한 분명 내게 공격을 쏟아냈다.

한 번 피 맛을 본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무기를 꼬나든 중국 헌터들에게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이익!”

중국 헌터들은 무기를 겨누고 위협만 해올 뿐, 섣불리 나를 공격하지 못했다.

헬파이어와 수차례의 원거리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막아낸 데다, 자신들의 대장을 일검에 베어버린 상대다.

죽음의 위협 앞에 앞서 나설 용기 있는 자는 없어 보였다.

“대체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마랑이 그나마 이성적이었다.

그는 내게 따지는 척, 헌터들에게 전음을 보냈고 있었다.

SS급인 왕인귀가 당했다고는 하나, 불의에 이뤄진 기습이다.

애초에 마법사는 근접전에 약하다.

자신들이 숨기고 있는 S급 헌터가 넷.

기습을 감행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판단했다.

“죽어!”

마랑을 포함한 헌터 넷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 명은 뒤에서 마법을 전개했다.

“훗.”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랑 정도라면, 왕인귀가 죽을 때, 내 힘을 일부나마 엿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물론 내가 마음먹은 이상, 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서걱. 서걱. 촤아악.

일검에 S급 헌터를 방패와 함께 갈라버렸다.

이검이 마랑의 목을 베었다.

초절정 고수였지만 화경의 경지에 오른 내 검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삼검은 마법을 반으로 쪼개냈다.

한 번의 공방을 마치고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세 헌터의 눈에 불신이 어렸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 불신을 해결하지 못했다.

차례로 목이 떨어지고 심장이 꿰뚫렸다.

그렇게 S급 헌터 다섯이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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