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화. 왕인귀(2).
벌써 세 차례.
백이 넘는 몬스터가 쓰러졌다.
A급 헌터에 준하는 2급 몬스터들임에도 헌터들에게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재앙급 던전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긴장은 옅어졌고, 그 자리는 해이로 채워졌다.
크와와.
탱커들의 방어는 전쟁 뒤, 보수되지 않은 성벽과 같았고, 근접 딜러들은 더 이상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이제는 전투가 오직 원거리 딜러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듯, 몬스터의 포효가 들려와도 멀뚱히 바라보기만 할 정도였다.
콰콰쾅!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 해이함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원거리 딜러들은 몬스터들을 제 때 요격해 냈고, 헌터들에게까지 당도하는 몬스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중국의 SS급 마법사 왕인귀와 청룡 길드 길드장이자, S급 헌터인 신유연이 있었다.
능력을 감추고 있긴 하지만 왕인귀는 S급이라는 대외적 등급에 맞게 강력한 마법으로 몬스터를 파괴했다.
궁수인 신유연 또한 한 발의 화살에 몬스터 두셋은 우습게 꿰뚫어 버릴 정도의 관통력을 자랑했다.
덕분에 헌터들의 앞까지 당도한 소수의 몬스터들은 견고하지 않은 방어로도, 무뎌진 공격으로도 쓰러질 수준이었다.
“진입 전에 긴장했던 제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원철이 허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길드장으로 길드원들에 에워싸인 그는 검 한번 휘둘러보지 못했다.
긴장 속에 검을 쥔 손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흘렸던 땀은 식어 버린 지 오래였다.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검을 휘두를 일은 없을 것만 같았다.
“S급의 마법사는 정말 대단하네요.”
그 옆에서는 주작 길드의 길드장이자, A급 마법사인 백현민이 연신 감탄을 터트리고 있었다.
한국에 세 명의 S급이 있긴 하지만 S급 마법사는 없다.
때문에 백현민이 S급 마법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A급 마법사도 결코 약하지 않지만 직접 본 S급 마법사는 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올 정도였다.
2급 몬스터조차 일거에 소거시켜버리는 것은 다른 S급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일격에 숨통을 끊어 놓을 실력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신체에 절반을 얼리거나, 불태워 부수고, 녹여 버릴 능력은 없었다.
결코 대단하다는 말이 과하지 않았다.
“그 때도 이랬다면...”
차예린만이 씁쓸한 얼굴로 죽어가는 몬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순조로움은 몬스터의 수준이 마물들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몬스터의 규모가 수백씩 튀어나왔던 마물들과는 달리, 수십에 그치고 있는 덕분이었다.
물론 헌터들의 전력을 생각하면, 수백의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만전을 기하고도 피해를 입어야 했던 지난 신의길드의 공략과는 비교되는 현 상황에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법이라.”
그 속에서 나는 전투가 아닌, 왕인귀와 중국 헌터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첫 전투 이후, 내 관심은 몬스터에게서 끊어졌다.
지금의 전력에 몬스터 따위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근접 딜러들이 나서야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중국 헌터들의 동향이 더 중요했다.
나에게는 공략 외에도 살막의 전력 약화라는 목적이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 헌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삼척에서도 그들을 지켜보긴 했지만 전투가 난전에 가까웠기 때문에 왕인귀 보다는 마랑이라는 초절정 고수가 더 눈에 띄었다.
실제로 왕인귀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다.
물론 지금도 왕인귀가 전력을 숨기고 있는 탓에 전부를 알 수는 없지만 아예 무지한 상태에서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왕인귀의 마법은 속성이 부여 됐다는 점을 제외하면, 무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속성자체가 큰 차이기는 하지만 얼음마법은 북해빙궁의 음공과, 화염마법은 양의 무공을 극한으로 익힌 무인의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마법의 단점은 전개될 때, 주변의 기운이 크게 요동치는 덕분에 공격하는 순간을 파악하기가 쉽다는 점이다.
같은 경지가 아니더라도, 초절정 수준의 고수라면, 마법을 피해내기가 어렵지는 않을 듯싶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 전부라면 말이다.
***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왕인귀가 적당한 순간에 휴식을 제안했다.
전투다운 전투가 없던 탓에 지친 이들은 없었지만 원거리 헌터들의 경우에는 마나가 제법 소모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해이해진 헌터들의 마음을 다잡을 필요도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장들 또한 해이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일부는 지금의 마음가짐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기회가 오겠습니까?”
김원철이 중국 헌터들을 힐끗 보며 내게 다가왔다.
“모르겠습니다.”
공략이 생각 이상으로 순조로웠기 때문에 중국 헌터들이 수작을 부릴 만한 기회조차 없었다.
헌터들의 피해가 없다는 것은 반길만한 일이지만 나로서는 썩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이대로 공략이 끝나버리기라도 한다면, 중국 헌터들을 허무하게 돌려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차라리 저희가 선수를 치는 건 어떻겠습니까?”
“길드장님이나 백현민 헌터는 그렇다 쳐도, 살인을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길드원들 내부에서 혼란이라도 발생한다면, 오히려 역으로 당할 수도 있습니다.”
“흠... 그렇긴 하지만...”
김원철이 조급함을 드러냈지만 이내 한 발 물러섰다.
적어도 스물여덟의 중국 헌터들은 모두 죽여야 하는 일이다.
청룡 길드도 살막과 연관이 있다면, 그들 또한 마찬가지.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일은 어설픈 마음가짐으로는 불가능하다.
몬스터를 수없이 죽여 본 헌터들이라고는 하나, 아무리 명령이라 해도 쉽게 살인을 행할 리는 없다.
최소한 그들의 죄책감을 지워줄 명분을 세워 움직여야 했다.
“일단은 공략이 끝나기 전까지는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들도 이대로 공략이 끝나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 분명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취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백현민 헌터와 차예린 헌터에게도 그리 말해놓도록 하겠습니다.”
김원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왕인귀 헌터. 무슨 일이십니까?”
중국의 왕인귀가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원철과 얘기하는 순간에도 나는 기감으로 중국 헌터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덕분에 왕인귀의 접근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그저 한국의 새로운 S급 헌터와 한 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여러 길드가 연합한 형태의 공략 팀이다.
휴식을 취할 때는 물론, 전투 중에도 서로 거리를 둔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 왕인귀 헌터의 마법은 잘 봤습니다. 과연 S급 마법사의 마법은 명불허전이더군요.”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왕인귀가 갑자기 내게 접근해온 저의는 알 수 없었다.
왕인귀는 나에 대해 알고 있을 텐데도, 아무런 경계 없이 내 간격으로 들어왔다.
지금이라면, 한순간에 목을 쳐 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적의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고, 나는 그를 미소로 맞이했다.
“허허. 중국에까지 위명이 자자한 김태빈 헌터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화려한 마법을 뽐내 볼 것을 그랬습니다.”
왕인귀 또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러나 올라간 입가와 달리,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위명이라니요. 저보다 대단한 헌터들이 많은데, 가당치도 않습니다.”
“아닙니다. 일신의 능력을 믿고 무고한 이들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직한 짓을 저지른 혈귀라는 악인을 단칼에 베어버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그 얘기를 듣고, 김태빈 헌터의 무위를 직접 견식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 정부를 통해 김태빈 헌터를 청하게 된 겁니다.”
왕인귀는 자신이 정부를 통해 나를 청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대신 그 이유를 내 무위의 견식으로 들었다.
내 힘은 다른 S급 헌터들에 비해 드러나지 않은 편이다.
공략횟수도 적을뿐더러, 다른 헌터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또한 헌터 전력이 곧 국가의 힘이 되는 세상에서 인접 국가의 S급 헌터를 궁금해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셨습니까? 아쉽지만 공략이 순조로운 덕분에 제가 나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피해 없이 진행되서 다행입니다.”
“당연히 피해 없이 공략을 완수하는 게 우선이지요. 하지만 다음 전투에서는 전위에 서주실 수 없겠습니까?”
“전위를요?”
“예. 근거리 헌터들과 전위에 서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김태빈 헌터의 무위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근접 전투의 치열함으로 해이해진 헌터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함입니다.”
왕인귀는 근거리 헌터들의 해이함을 이유로 들어 나에게 전위에 서줄 것을 청했다.
확실히 헌터 대부분이 긴장감을 잃고 해이해졌다.
한 번쯤은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원치 않으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저희 측, 혹은 다른 헌터가 전위에 서도 될 일이니까요.”
동시에 꼭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의심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말대로, 전위를 맡을 만한 S급 헌터는 나를 제외하고도, 중국의 마랑과 한국의 차예린, 박동석 등, 셋이나 있었다.
“아니.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숨기고 있는 목적이 있음이 분명하지만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수준으로 봤을 때, 몬스터들은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뒤에서 기습이 이뤄진다하더라도 이를 대비할 여력은 있었다.
***
나와 마랑을 비롯한 오십 여명의 헌터들이 전위에 섰다.
원거리 헌터들을 아예 방치해 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근접 헌터들 전부는 아니었다.
S급 헌터 중에서도 박동석과 차예린에게는 원 길드와 주작 길드의 엄호를 맡겼다.
중국 헌터들이 무슨 수작을 부려올지 알 수 없었기에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쿠오오!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른 가량으로, 전위를 맡은 헌터들이 상대하기에 부담스러운 수는 아니었다.
“이번 전투는 전위에 선 헌터들이 맡는다.”
왕인귀가 마법을 캐스팅하고, 활시위를 당기는 궁수 등, 원거리 헌터들을 멈춰 세웠다.
이미 사전에 말은 해두었지만 몬스터가 나타나자 본능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한 번 더 제지한 것이다.
콰콰쾅!
곧바로 달려든 몬스터들과 전위의 헌터들이 충돌했다.
십여 명의 탱커들이 몬스터의 돌진을 막아냈고, 근접 딜러들이 즉은 공격을 전개했다.
해이해진 마음과는 별개로, 몇 차례의 전투를 구경만 한 탓에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 오른 상태였다.
애초에 2급 몬스터를 상대로 두려워할 수준도 아니었기 때문에 헌터들은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드러내며 전장을 헤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