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화. 왕인귀.
고민스러웠다.
마법사는 전 세계에 단 세 명뿐인 SS급 헌터다.
초절정 고수가 다섯이 더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험하긴 하지만 살막의 전력을 줄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냥 흘려보내면 후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기회.
“죄송하지만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선택은 거절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기회가 아닌, 적이 내어준 기회.
너무 시기적절하게 차려진 밥상은 오히려 나를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중국 헌터들뿐만 아니라, 청룡 길드도 살막에 포섭된 상태일지도 모른다.
죽음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인 만큼, 일말의 가능성도 간과할 수는 없었다.
아쉽지만 다른 기회를 노리는 게 나았다.
“흠... 재앙급 던전이니 만큼, 꺼려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내 거절에 정부의 뜻을 전하기 위해 온 김진규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나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원 길드와 주작 길드 등에도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고, 그들이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청룡 길드에서 더 많은 전력을 투입할 예정입니다. 정부차원에서도 물자부터 시작해, 공략 보조금 이상의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기도 하고요.”
김진규는 내 거절의 원인을 위험에서 찾았다.
삼척의 재앙급 던전에서 신의 길드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물며 전주의 던전은 마력 수치가 더 높다.
더 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 만큼, 내가 일신의 안위를 위해 요청을 거절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때문에 이전보다 더 많은 헌터들이 투입될 거라는 사실을 들며 안전을 강조했다.
게다가 일반적인 공략에서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던 정부의 지원까지.
“그렇습니까? 그 정도 전력이 투입되고, 정부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굳이 저까지 필요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의 말대로라면, 굳이 나 하나를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 애쓸 이유가 없다.
다른 1세대 길드들과 원 길드의 지원만 더해진다 하더라도, S급 헌터 하나쯤은 없어도 모를 정도의 전력이 모일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무슨 연유에서 인지 나를 이번 공략 팀에 꼭 포함시키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그거야... 그래도 S급 헌터분이...”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김진규가 우물쭈물 거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이마가 금세 땀으로 물들었다.
“혹시 중국의 요청이 있었습니까?”
“음...그게...사실 중국의 요청도 있긴 했지만 그 보다는 위에서 김태빈 헌터를 꼭 원했습니다.”
“위 말입니까?”
“정부 말입니다. 김태빈 헌터가 전 협회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직 명확한 소속은 없지 않습니까?
소속이 없는 S급 헌터. 윗분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욕심낼만한 인재죠.
헌데, 윗분들은 김태빈 헌터의 능력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만약 김태빈 헌터의 능력이 그분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만 한다면, 누구도 받지 못한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김진규가 진실을 토해냈다.
다행히 살막과는 연관이 없었다.
아니, 살막의 요청도 있긴 했지만 정부가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해서 움직인 것이다.
분명 처음에는 중국 헌터들의 요청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렇습니까?”
“예!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나저나 웃겼다.
하마터면 표정관리를 못했을 정도로.
내 의사도 상관없이 누가 누구를 확인한다는 말인가.
하물며 말을 하는 김진규도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얼굴이다.
마치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그럼 한 번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부의 대우 때문에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 아니다.
혼자라서 포기했지만 1세대 길드와 원 길드의 전력이 더 해진다면, 충분히 중국 전력을 도모해 볼만 했다.
여전히 위험은 남아 있었지만 아까와 달리, 감수해봄직한 정도였다.
물론, 내 생각대로 인원이 맞춰진다는 가정하의 계획일 뿐이다.
“정말입니까?! 내일 오후 한 시에 진입할 예정입니다. 필요하시다면, 그 전에 모시로 오겠습니다.”
고민해보겠다 했을 뿐, 아직 수락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김진규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중국을 떠나, 정부 측의 압박이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내 뜻일 뿐이라도, 김진규의 윗사람들은 그에게 책임을 물어올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니, 나에 대한 대우를 약속했으니, 설득에 성공한다면 그에게도 상당한 보상이 따를 수도 있었다.
“괜찮습니다.”
데리러 오겠다는 김진규의 친절은 거절했다.
아직 확실히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니고, 움직이게 된다면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편이 나았다.
***
김진규가 떠나고, 나는 가장 먼저 김원철을 찾았다.
“위험할 순 있지만 좋은 기회입니다.”
“한국에서 그들이 당한다면, 살막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김원철이 우려를 드러냈다.
한국에 파견된 중국 헌터들을 해치우더라도 중국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헌터들이 남아있다.
자칫 벌집을 잘못 건드리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당장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자국도 신경 써야 하고, 각국에 상당수의 헌터들이 투입되어 있는 상황이니까요.”
“흠... 알겠습니다.”
설명을 듣고 고민하던 김원철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한국이 살막에 좌지우지되기를 원치는 않았다.
그렇다고 공존할 수는 없으니, 그들의 전력을 깎을 수 있을 때, 깎아 놓는 편이 나았다.
“혹시 함께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김원철은 살막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피아를 구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살막이 전 세계적으로 넓게 영향력을 넓혀 온 만큼, 한국 헌터들 중에서도 분명 살막에 포섭된 이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할 사람이라 함은 그 구분의 결과를 물은 것이다.
“일단 1세대 길드 가운데, 확인이 완료된 것은 세 개 길드입니다.
태백 길드 길드장이 살막과 주기적으로 접촉해온 전황이 파악됐습니다. 이번에 중국 헌터들이 입국했을 때도 한 차례 회동을 가졌습니다. 특별히 외부에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던 것으로 보아, 완전히 넘어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신의 길드와 주작 길드는 살막과 적대 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신의 길드는 차예린 헌터가 이미 살막과 한 차례 마찰을 빚었었고, 주작 길드는 몇 차례에 걸쳐 자행된 살막의 접촉을 협회에 알려왔었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신의 길드는 이번에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살막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주작 길드의 장이 신의 길드의 장과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사이인 만큼, 살막과 협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외에 청룡과 태양 길드는 아직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다만, 청룡 길드장이 야망이 큰 인물이라 태양 길드보다는 쉽게 회유에 넘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이미 넘어 갔을 수도 있고요.”
한 개 길드가 회유에 넘어갔고, 두 개 길드가 거절했다.
나머지 두 개는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원철이 이리 말할 정도면, 청룡 길드는 회유됐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청룡 길드장이 야망이 크다는 것쯤은 살막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섣부르게 결정하지 않길 잘했다.
혼자 나섰다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
“일단 주작 길드장을 만나봐야겠습니다.”
“신의 길드의 차예린 헌터도 만나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S급 헌터가 아쉬운 전력이긴 하나, 차예린 헌터는 동료를 잃은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전력을 생각하면, 한 명의 S급 헌터가 아쉽다.
아무리 태빈이 몇 사람의 역할을 해준다 해도,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으니.
하지만 불과 하루 전에 수십의 동료를 잃은 사람의 손까지 빌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
주작 길드장은 기꺼이 돕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본인 포함 마흔한 명의 정예가 움직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홀로 조용히 합류해 온 차예린도 함께였다.
그리고 삼척에서 두 명의 헌터를 잃은 중국 측이 스물여덟.
청룡 길드 오십.
원 길드에서 사십의 헌터를 투입했다.
마지막으로 나를 더해 백육십 명의 헌터가 던전에 진입했다.
“오랜만이라 긴장이 되는 군요.”
재앙급 던전인 만큼, 모든 헌터들이 긴장하고 있었지만 특히나 김원철은 그 정도가 심했다.
5년 전에야 A급 헌터로서 수없이 사선을 넘은 김원철이었지만 협회가 생긴 이후로는 직접 공략에 나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협회장 직위를 내려놓은 뒤에도 길드를 창설하면서 굳어진 몸을 풀기 위해 B급 던전을 한 번 공략해봤을 뿐이다.
‘재앙’이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감에 쉽게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김원철의 얼굴이 살짝 굳어져 있었다.
“괜찮을 겁니다.”
나는 가벼이 답했다.
무려 백육십에 달하는 전력이다.
그 백육십 명 중에는 SS급으로 분류되는 화경의 고수가 둘에, S급 헌터는 여덟에 달한다.
솔직히 서로 전력을 숨기지만 않는다면, 이 열만으로도 공략이 가능할 정도다.
전투가 발생한다 해도, 김원철은 검을 휘두를 기회조차 없을 지도 몰랐다.
“일단은 차예린 헌터가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진입 전부터 중국 헌터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차예린이다.
일견 무표정해 보이는 그녀의 눈 속에선 무서우리만치 거센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중국 헌터들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녀의 숨김없는 살기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왕인귀가 선두에 섰다.
신의 길드와 함께 했을 때와는 달리, 왕인귀는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거나 하는 등의 수작을 부려오지는 않았다.
헌터들의 숫자에서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존재 때문인지.
‘나 때문이었군.’
왕인귀의 시선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 짧은 순간, 왕인귀의 눈이 번뜩이듯 불타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또한 백육십 명의 헌터들 가운데 나 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
공략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됐다.
출몰하는 몬스터는 2급이 주를 이뤘고, 그 수 또한 수십 단위로, 아군의 전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실제로 몬스터들은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기 무섭게, 원거리 헌터들의 집중 포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살 당했다.
때문에 세 차례의 소규모 전투를 치르는 동안, 근거리 헌터들은 무기를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했다.
간간히 탱커들만 원거리 공격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몬스터들과 한 차례 충돌을 겪는 게 전부였다.
너무나 순조로운 진행에 몇몇 헌터들은 던전 안이라는 사실도 잊고 저들끼리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집중해라.”
“던전 안이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처음에는 왕인귀나 각 길드장들이 그런 헌터들을 다잡았지만 몇 차례나 전투답지 않은 전투가 반복되면서 그들마저 풀어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