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살수다-76화 (76/150)

# 76

76화. 파견(4).

굴복과 종속은 다르다.

과거 한국이 중국을 사대하는 것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정도의 차이가 있다.

단순히 한국 정부가 고개 숙이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한국 전체가 중국의 식민지와 같이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확실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

솔직히 정부는 어떻게 되던, 나와 상관 없는 일이지만 국가 자체가 종속된다면, 얘기가 달랐다.

공략을 마치고 나가는 대로, 김원철을 통해 중국 헌터가 개입한 타국의 공략 결과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신의 길드와 마찬가지로 양측의 피해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면, 가설의 신뢰도를 올려주는 증거가 될 터였다.

“크악.”

그 순간에도 신의 길드에서는 계속해서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차예린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모습임에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투혼을 보여줬지만 악마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고,

신의 길드원들 또한 차예린을 지키기 위해, 혹은 다른 동료들을 위해 용감하게 맞섰으나, 그뿐이었다.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 앞에 신의 길드원들은 하나둘 잿빛 대지에 몸을 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던전에서 만큼은 철저한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해야 했다.

중국 헌터 전원을 살인멸구 할 게 아닌 이상,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

전황이 변한 것은 신의 길드의 수가 중국 헌터보다 줄어든 순간이었다.

어느새 열넷의 신의 길드원들이 악마와 마물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아직 스물여덟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 중 열 가량은 전투를 계속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될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것은 고작 열 두셋.

반 이하로 줄어든 전력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악마가 시선을 돌렸다.

캬악.

악마는 수차례 반복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일어나는 차예린을 한 번 바라보고는 중국 헌터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중국 헌터들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마물의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악마는 전력이 현저히 감소한 신의 길드보다 중국 헌터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라 판단한 듯싶었다.

“허억... 살았다.”

악마가 떠나가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신의 길드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수십이 마물들이 에워싸고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한 결 숨통이 트였다.

압도적으로 진형을 헤집던 악마에 비하면, 마물은 편하게 느껴질 정도의 상대였다.

으득.

차예린은 서있기도 힘든 상태에서도, 중국 헌터들에게로 향한 악마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마지막에 자신을 바라보던 악마의 시선은 너 따위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차예린은 그 눈빛에 모멸감을 느꼈다.

실제로도 자신을 위해 대신 몸을 내던진 길드원들이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목숨을 잃었을 지고 몰랐다.

S급 헌터의 자존심은 처참히 깨져나갔고, 한낱 몬스터를 상대로 살아남은 게 전부였다는 사실이 너무 분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감정보다 남아 있는 길드원들을 추스를 때였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피해를 입었다.

남아 있는 길드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서 나가는 게 자신이 할 일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차예린은 길드장 차주한과 함께 길드원들을 독려해 마물들에 맞섰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신의 길드가 악마를 상대하는 동안, 마물의 수는 반 가까이 줄었다는 점이다.

악마의 위협을 받지 않은 중국 헌터들이 차근차근 놈들을 죽여나간 덕분이다.

아니 덕분이 아니라, 신의 길드가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그들이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이었다.

이마저의 성과도 없었다면, 생사와 상관없이 중국 헌터들에게 칼끝을 겨눴을 지도 몰랐다.

악마가 중국 헌터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는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이제 남아 있는 마물의 수는 십 수 마리에 불과했고, 적수가 없을 것만 같던 악마의 몸도 어느새 만신창이로 변해 있었다.

“고작 몬스터 따위가.”

중국 헌터들은 상상이상으로 강했다.

차예린이 손도 쓰지 못했던 강적을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오히려 역으로 몰아 붙였다.

S급 헌터들의 연계 덕분이었다.

마법사의 배리어는 어떠한 공격도 막아 낼 거라 느껴질 만큼 견고했고, 검사의 검격은 악마의 몸에 둘러져 있는 마기마저 베어버렸다.

차예린이 과연 저들이 자신과 같은 S급 헌터나 맞나, 잠시나마 의심할 정도였다.

진을 형성한 헌터들도 한 몫 했다.

큰 효과는 없더라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격은 악마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충분했고, 서넛의 힘이 더해진 방어는 악마라 해도 쉬이 뚫어내지 못했다.

캬악...

결국 모든 마물이 쓰러졌고, 악마도 이어진 집중 공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중국의 S급 헌터 마랑의 검격에 악마의 목이 떨어지는 것으로, 전투는 종지부를 찍었다.

“마나석 수거하고, 던전 핵 찾아서 파괴해라.”

역시나,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중국 헌터측은 신의 길드는 아랑곳 않았다.

신의 길드 측은 멀쩡히 서있는 헌터가 손에 꼽을 정도로 만신창이었지만 그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왕인귀는 오히려 일부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아쉬운 듯, 신의 길드원들을 힐끗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도 피해 상황 파악하고, 시신 수습한다.”

차주한은 그런 왕인귀의 행태에 입술을 깨물며 길드원들을 수습했다.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략을 완료하고 나면, 중국 헌터를 다시 마주할 일은 없으니, 이번 한 번만 더 참으며 될 일이었다.

***

이번 공략에서 결과적으로, 총 마흔아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국 헌터 측 사망 둘 명. 신의 길드 사망 서른둘, 부상 열다섯.

투입된 전력에 비해, 예상외로 큰 피해였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중국 측에서도 두 명이 죽긴 했지만 극단적로 신의 길드에만 피해가 집중됐다.

당연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준비가 되지 않았더군.”

하지만 왕인귀는 재앙급 던전을 공략함에 있어 신의 길드의 준비가 부족했다는 대답으로 일축했고,

“마물이 나오는 던전이었습니다. 생각보다 그 수가 많았고, 강했습니다.”

차주한 또한 이를 어느 정도 인정했다.

중국 헌터와 제대로 된 협력을 하지 못한 영향이 있긴 했지만 자신들이 부족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마물은 둘만 모여도 A급 헌터를 상회할 정도로 강했고, 신의 길드가 그에 대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길드장님!”

“지금은 참아야 한다.”

차예린이 분노를 토하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이미 공략이 끝난 마당에 잘잘못을 따진다고 죽은 이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던전 내부에서 보였던 중국 헌터의 행태로 보아 잘못을 인정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하물며 중국은 지원을 나온 입장. 지금 소란을 일으켜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차주한은 속으로 칼을 갈지언정, 이를 겉으로 드러내는 인물은 아니었다.

까드득.

분노를 억지로 억누른 차예린이 이를 갈았다.

반면, 차주한은 이를 되갚아 주기를 골백번이고 곱씹으며 깨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연신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

나는 생각했던 대로 김원철에게 중국 헌터들이 개입한 국가의 공략 결과를 요청했다.

타국의 일이었지만 공략이 진행된 국가 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일들이었기 때문에 자료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역시...”

결과는 예상한 것과 같았다.

중국의 피해는 전무하거나 미미한 반면, 도움을 받은 국가 대부분의 헌터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아예 피해를 입지 않은 국가도 몇 있긴 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들은 S급 헌터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을 만큼, 헌터 전력이 형편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정말이군요.”

얘기만 들었을 때, 반신반의 하던 김원철도 직접 자료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객관적인 자료가 말해주고 있다.

확실히 중국이 타국의 헌터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피해를 야기 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청룡 길드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길드가 피해를 입은 뒤였지만 아직 전주의 던전을 공략하기로 한 청룡 길드가 남았다.

원 길드를 창설하면서 청룡 길드와는 경쟁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김원철이었지만 한국의 헌터 전력을 깎아 먹으려는 중국의 농간에 놀아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전주의 던전은 삼척의 것보다 마력 수치가 높게 나타났던 만큼, 좌시할 경우, 청룡 길드는 신의 길드보다 더 큰 피해가 발생할 지도 몰랐다.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는 없을 테고.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대비를 해두는 편이 낫긴 하겠죠.”

직접 지켜본 바, 진을 토대로 교묘하게 몬스터를 몰아 피해를 야기하는 방식이다.

몬스터의 전력이 약하다면 모를까, 재앙급 던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안다고 해서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럼 청룡 길드에는 제가 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다음 날,

왕인귀는 전주의 공략을 준비하며 생각지 못한 요구를 해왔다.

바로 한국의 새로운 S급 헌터인 나를 포함시켜 달라는 것이다.

이번에 신의 길드의 피해가 컸던 만큼, 전력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유로, S급 헌터인 나를 원했다.

“김태빈 헌터. 부탁드립니다.”

은연중에 정부 측에도 압박을 가했는지, 정부 측 인사가 나를 직접 찾아와 부탁을 해오기도 했다.

나를 노리고 있었음인가.

그렇다면, SS급 헌터가 포함되어 있는 중국 측의 전력이 설명이 된다.

화경에 준하는 고수와 다섯 명의 초절정 고수라면, 확실히 나를 노려볼 만 했다.

그래도 의문은 남았다.

상대의 SS급 헌터는 마법사다.

마법사를 상대해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싸우는 모습은 지켜봤다.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라 해도, 상성으로 봤을 때, 확실히 내게 우위에 있는 직업은 아니었다.

여문휘는 국가주석이기 때문에 실제로 움직이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마법사보다는 권왕을 보내는 게 더 효율적이다.

권왕은 내가 암살에 실패하는 순간, 정말 죽음을 느껴야 할 정도의 고수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문휘는 마법사를 파견했다.

초절정 고수가 다수 포함된 전력이긴 했지만 저의가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살막은 아직까지 내가 무영살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혈귀를 죽였다고는 하나 아직 내가 화경의 경지에 올라섰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본 마법사 정도만 되더라도 혈귀와 승부를 점쳐 볼만 했다.

제갈민을 비롯해 여문휘는 이미 내가 무영살이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이를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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