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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75화 (75/150)

# 75

75화. 파견(3).

헌터들은 그 뒤로도 비슷한 숫자의 마물들을 한 차례 더 만났다.

앞서의 경험 때문인지, 양측 모두 방어에 집중했고, 덕분에 적은 피해로 전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로 인해 전투가 길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첫 번째 전투는 제외하고, 한 시간 가량 걸렸던 두 번째 전투보다 세 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

안타깝게도 이번 피해도 눈 먼 공격에 당한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신의 길드의 몫이었다.

방어를 견고히 한 덕에 처음보다는 나아지긴 했지만 일곱이 죽고 셋이 사지 중, 하나를 잃는 회생 불능의 부상을 입었다.

칠십 명으로 시작한 신의 길드는 스물넷의 사망자와 열넷의 부상자가 발생해, 전투 가용인원이 사십이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끄는 수레에는 그만큼의 시신이 새로이 쌓여 있었다.

“흐음...”

전투를 막 끝낸 왕인귀가 헌터들을 둘러봤다.

쉬지 않고 계속된 행군과 연이은 전투로 모든 헌터들이 상당히 지쳐있었다.

중국 헌터라고 예외는 없었다.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은 아직 괜찮아 보였지만 그 아래의 헌터들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중국 헌터들이 펼치는 진은 안전을 배가시켜주는 만큼, 상당한 심력의 소모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늘도 처음보다 좀 더 어두워졌다.

지친 상태에서 찾아온 어둠으로 시야마저 제한됐다.

더 이상 공략을 속행하는 것은 무리로 보였다.

“세 시진 간 휴식을 취한 뒤, 공략을 재개한다.”

왕인귀 또한 그쯤은 알고 있었다.

가능한 빨리 공략을 끝내고자 했지만 그는 무모한 지휘관이 아니었다.

“예!”

왕인귀의 말에 중국 헌터들은 곧장 두 무리로 나뉘어 경계와 휴식을 취했다.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우리도 삼개조로 나눠 1개조씩 경계 투입한다.”

경계 병력은 중국 헌터 열다섯으로도 충분하지만 신의 길드는 더 이상 그들을 믿지 않았다.

동료들이 죽어갈 때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던 자들이다.

적이 출몰할 경우, 자신들에게 알릴 거란 보장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헌터들은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따로 경계를 서는 냉랭한 기류 속에서 휴식을 취했다.

잿빛만 가득한 대지에 어둠까지 찾아온 탓에 시야가 제한되긴 했지만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다.

중국이 열다섯에 신의 길드가 열 넷.

아무리 경계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남아있는 헌터의 삼분의 일에 가까운 인원이 투입되는 것은 누가 봐도 과했다.

그러나 실제 경계가 몬스터에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과하지 않을 지도 몰랐다.

양측의 경계 속에는 분명 서로를 향한 시선도 존재하고 있었다.

***

그렇게 서로 눈치를 보는 불편한 휴식 후, 헌터들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흐음...”

선두에 섰던 왕인귀가 침음을 흘렸다.

그의 눈앞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다.

길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몬스터의 흔적을 따르다 보면 대부분은 자연 던전 보스를 만나게 되지만 간혹 이러한 경우도 있었다.

헌터라면 한번쯤은 건널 수 없는 강이나, 절벽 등을 마주한 경험이 있을 만큼,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짜증나는군.”

물론 흔한 일이라는 것과 감정은 별개였다.

한차례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수차례 전투를 치른 뒤에 당도한 곳이 던전의 끝이라 불리는 절벽이라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돌아간다.”

물론 그렇다고 별다른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공략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벽을 마주했다 하여 제 자리에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헌터들은 조금은 맥이 빠진 채로 다시 걸음을 돌렸다.

크릉. 크릉.

전투가 치러졌던 장소에 버려둔 시체들에 몰려든 몬스터들을 한 차례 마주했다.

마물들과 달리, 시체나 노리는 놈들답게 보잘 것 없는 놈들이었다.

7급 몬스터 정도나 될까.

최소가 A급인 헌터들에게는 식후 운동거리도 되지 않는 수준이다.

잿빛만 가득하던 세계에서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홀연히 나타나 시체를 뜯어먹던 몬스터들은 헌터들의 손에 차게 식어 자신들이 뜯어 먹던 시체와 함께 다른 몬스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번엔 진짜 마지막인 것 같군.”

그렇게 소소한 두 차례의 전투를 거치고 헌터들은 다시 한 번 마물 무리와 조우했다.

수는 백 마리 가량으로 지금껏 마주했던 것에 비해 적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다른 몬스터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존재감을 내뿜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악마인가. 과연 재앙급 던전의 주인이라 할 만 하구나.”

왕인귀가 마법을 준비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관자놀이에서 솟아 오른 두 개의 뿔과 등에 달리 한 쌍의 날개가 악마를 연상케 만드는 존재다.

느껴지는 기세가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S급의 마력을 상회하는 마기가 악마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꿀꺽.

SS급 헌터인 왕인귀가 약간의 호승심을 느끼는 게 전부인 반면, 신의 길드의 유일한 S급 헌터인 차예린은 악마의 등장에 마른 침을 삼켰다.

악마는 단순히 느껴지는 기세만 봐도 결코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 중국의 S급 헌터들은 자신과 비슷한 경지다.

그런 양측의 S급 헌터 셋이 합공한다 해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물들을 모두 처리한 뒤에 악마를 공략하겠다.”

“하지만...?”

차예린은 왕인귀의 결정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마물의 수가 앞선 전투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악마의 견제까지 생각하면, 적어도 삼십분 이상은 걸릴 전투다.

처음부터 S급 헌터들이 힙을 합쳐 악마를 막지 않는다면, 마물을 처리하는 그 삼십분 동안, 상당한 피해가 발생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결정이 불만이라면, 신의 길드가 악마를 상대하면 된다. 그럼 나머지 몬스터들은 우리가 책임지도록 하지.”

“...”

차예린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악마는 S급 헌터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 느낀 존재다.

신의 길드 전부가 달려든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전멸에 이를 수도 있다.

당장 후퇴할 게 아닌 이상, 다소 피해가 예상된다 하더라도 왕인귀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전투가 시작되고,

양측은 앞서와 같은 전열을 갖춘 채, 몬스터들을 맞이했다.

중국 헌터들은 진을 형성했고, 탱커를 앞세운 신의 길드의 전열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층 더 견고해졌다.

크와악.

반면, 몬스터들에게 전열이란 없었다.

그저 광기에 물들어 헌터들을 향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이는 던전 보스인 악마도 다르지 않았다.

홀로 몬스터 수십 이상의 기세를 흘리고 있다는 것만 다를 뿐, 성난 황소마냥 앞만 보고 돌진해 오는 건 여타 몬스터들과 똑같았다.

콰콰쾅!

헌터와 몬스터의 선두가 충돌하며 굉음이 일었다.

충돌의 여파로 수 마리의 몬스터들이 피륙이 되어 터져나갔다.

중국 헌터들의 진이 주는 반발력을 이겨내지 못한 몬스터들이었다.

신의 길드의 방어는 그 만한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한 걸음도 물러섬 없이 돌진을 막아냈다.

그 뒤로 딜러들이 쏟아낸 화력에 다수의 마물들이 휩쓸려 사라졌다.

그렇게 양측의 첫 공방부터 십 수 마리의 마물들이 사라졌고, 전투는 순조로운 시작을 알렸다.

“크악.”

문제는 악마였다.

악마가 먼저 공격한 곳은 신의 길드의 방어진이었다.

앞에 있던 마물까지 압사시키며 그대로 돌진해온 악마는 전위를 맡고 있던 탱커 둘을 그대로 날려버리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막아! 절대 뚫리면 안 돼!”

악마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차예린이 곧장 그 자리를 메웠다.

하지만 애초에 그녀 혼자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크윽.”

단 한 번의 충돌로 뒤로 밀려난 차예린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부의 장기가 전부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실제로 그 정도의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지만 악마가 주는 존재감이 더해져 다시 부딪치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차예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를 제외하곤, 악마를 막을 수 있는 헌터가 신의 길드에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자신이 물러선다면, 대신 길드원들이 악마에 손에 유린당할 것이기에 입술을 깨물고 다시 몸을 날렸다.

“커억.”

결의를 다진다고 해서 없던 힘이 생겨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소설, 영화, 만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차예린은 두 번째 충돌에서도 튕겨져 나갔다.

자세를 낮춘 채, 검을 들어 막아냈음에도 악마의 힘을 완전히 해소해내지 못했다.

앞서의 충격까지 더해진 탓인지, 입에서는 선혈이 흘러 내렸다.

“차예린 헌터!”

“당장 부길드장님을 보호해라!”

차예린 외에도 길드장 차주한을 비롯한 십여 명의 헌터들이 악마를 에워싼 채, 그녀를 보조하며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기가 악마의 몸을 호신강기처럼 보호하고 있는 탓에 헌터들의 공격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고, 차예린이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강력한 공격에 방어 또한 여의치 않았다.

“제기랄.”

압도적인 악마의 무위에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공격과 방어 모두 여의치 않은 상황은 헌터들에게 절망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적은 악마 하나가 아니다.

중국 헌터들에게 향한 마물을 제하고도,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시시각각 신의 길드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방심하지 말고, 차분히 놈들을 섬멸한다.”

위기에 처한 신의 길드와는 달리, 중국 헌터들은 한결 여유가 있었다.

그들이 펼치는 진은 수차례의 전투에도 고작 한 명의 헌터만 잃었을 정도로 견고했다.

하물며 앞서 상대했던 마물의 반밖에 안 되는 수다.

악마가 아닌 이상, 마물들은 중국 헌터들의 위협이 되질 않았다.

유일하게 위협이 될 만한 악마는 신의 길드를 노리고 있었고, 자연히 중국 헌터들은 급할 게 없었다.

처음부터 신의 길드의 피해는 나 몰라라 했던 중국 헌터들이다.

중국 헌터들은 신의 길드의 위험에 아랑곳 않고, 오히려 방어를 굳건히 한 채, 천천히 마물을 줄여나가고 있었다.

***

다른 목적을 위해 전력을 숨기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 헌터들은 그 이상으로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마물들을 신의 길드 쪽으로 모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착각이라 여겼다.

그만큼, 중국 헌터들의 움직임은 은밀했다.

그러나 전투가 몇 차례 반복되면서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중국 헌터들은 일부러 신의 길드의 피해를 유도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안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 헌터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인가.’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었으나, 어느 정도는 예상이 가능했다.

헌터 전력을 약화시켜 더욱더 중국에 의존적이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지금도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몇 개의 재앙급 던전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는 상황에서 헌터 전력이 약화 된다면, 한국은 중국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력으로 자국의 던전을 막아낼 수 없게 된다면, 한국은 중국에 굴복이 아닌, 종속 될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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