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74화. 파견(2).
처음 공항에서 중국 헌터들을 본 순간부터 그들을 미행했다.
한 나라를 집어 삼키려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전력이다.
실제로 그 정도 전력이 마음먹고 청와대로 돌진한다면, 현재 한국의 헌터들만으로는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고작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왔다고 보기에는 과한 전력을 파견해 온 중국의 저의가 궁금했다.
‘내가 모르는 화경의 고수라니. 대체 누구지.’
또한 지금 서른 명의 헌터를 이끄는 화경의 고수는 여문휘나 권왕이 아니다.
내가 모르는 인물이었다.
사황문의 구적과 강경채의 왕길, 도황문의 사마휘와 특급 살수 왕추, 그리고 혈귀.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냈던 살막의 무인들은 대부분 내 기억 속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유일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문환이 있긴 했지만 여문휘를 암살하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내 손에 죽어갔던 살막의 살수들 가운데, 하나 일거라는 짐작은 가능했다.
물론 지금까지 다섯을 기억해냈다 하더라도, 내가 내 손에 죽은 이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문휘와 권왕, 화경의 고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둘이 아닌, 새로운 고수의 출연.
중국 측이 보유한 SS급 헌터일 가능성이 높지만 지켜볼 이유로는 충분했다.
삼척의 던전까지의 미행은 어렵지 않았다.
화경의 고수가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나, 내 기척을 잡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주의를 기울였다면 조금 긴장이 필요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장은 경계심이 옅었다.
문제는 헌터들이 던전에 진입한 뒤부터였다.
진입 후, 시작점은 모두가 같다.
내가 진입했을 때, 그들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단번에 정체가 탄로 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삼십분이란 시간을 기다렸다.
삼십분은 공략팀의 전력을 감안했을 때, 던전 진입 즉시 전투가 발생한다하더라도 전투를 마무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예상대로 내가 진입했을 때, 인근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마인들에게서나 느껴봤던 마기가 나를 반겼다.
던전에서 마기를 느낀 적은 처음이었기에 흥미가 일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나는 헌터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 명도 아니고 백 명의 헌터들이 움직였기 때문에 그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람?’
공략 팀을 뒤따르던 내가 가장먼저 발견한 것은 사람 형상의 시체였다.
한 차례 전투가 있었는지, 수십 구가 넘는 시체들이 잿빛 대지에 널려있었다.
시체는 언뜻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헌터들의 것은 아니었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가까이서 본 시체는 머리에 기괴한 뿔이 솟아나 있거나, 두 쌍의 팔다리를 가지고 있는 등, 사람과는 조금 다른 존재였다,
‘몬스터의 일종인가.’
별의별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곳이 던전이다.
오크나 고블린 등도 형상만 보자면,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눈앞의 몬스터 또한 사람과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었다.
나는 시체들을 지나쳐 추적을 계속했다.
채채챙!
곧이어 헌터들의 흔적이 점차 짙어졌고, 멀지 않은 곳에서 병장기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의 전투 탓인지, 삼십분 거리가 좁혀진 것이다.
나는 기척을 완전히 감추고 한층 더 은밀하게 움직였다.
극에 이른 은잠술이라고는 하나, 상대측에는 화경의 고수가 존재한다.
전투로 인해 감각이 극에 달해 있을 테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
“물러서지 마라!”
“침착해! 전력은 아군이 한 수 위다!”
백 명의 헌터들과 방금 시체로 마주했던 몬스터 이백 가량이 어우러진 전투가 한창이었다.
살펴 본 바, 몬스터 하나의 힘은 A급 헌터에 미치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 수가 헌터들의 배나 되는 탓에 전투는 백중세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실력을 숨기고 있군.’
중국의 헌터들이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도 전투의 지속에 한 몫 했다.
사실상 SS급 하나와 S급 다섯이 포함된 전력이다.
그러나 중국 헌터들은 간혹 자국의 헌터가 위험에 처할 때를 제외하곤, 앞서 정부에 전했던 전력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선에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존재했던 알력 때문인지, 중국 헌터와 신의 길드는 서로 간의 전투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이렇다 할 피해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상태로 전투가 계속된다면, 실제 전력이 떨어지는 신의 길드에서는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였다.
“크악.”
그러한 생각이 무섭게 신의 길드 진형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한국의 손꼽히는 길드의 헌터들답게 다수의 적을 상대로 잘 싸우고 있었지만 백중세의 전투에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기태야! 힐러!”
“정신 차리고 빨리 후방으로 옮겨!”
그마나 다행인 점은 힐러의 존재였다.
중국과 신의 길드 양 측에는 각기 한 명씩 두 명의 힐러가 있었고, 웬만한 부상은 치료가 가능할 정도로 그 능력 또한 뛰어났다.
“늦었어.”
물론 숨이 붙어 있는 상태일 경우에 한해서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치열한 전투 속에서 부상자까지 챙기기란 쉽지 않았다.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부상의 여파로 이어지는 몬스터의 공격을 막지 못해 사지가 뜯겨나가거나, 이미 회생 불가능할 정도의 부상을 입은 탓에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크륵...”
아군과 적의 피해가 누적됨에 따라, 전투도 그 끝을 보였다.
이백에 달하던 사람 형상의 몬스터는 어느새 한 자리 수로 줄어 있었고, 바닥에 쓰러진 수백의 시체만이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되어 남았다.
“사망 십칠. 부상 열하나.”
이백의 몬스터를 죽인 대가로 열일곱 명의 헌터가 목숨을 잃었다.
전투가 불가한 부상자를 더하면, 스물여덟이 전력에서 제외됐다.
몬스터들의 전력과 수를 생각하면, 대승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지만 남은 누구도 승리를 자축하진 않았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승리였고, 누군가에겐 상처뿐인 승리였다.
“마나석만 수거하고 이동한다.”
전장을 한 번 훑어 본 왕인귀가 말했다.
무감정한 그의 표정 속에 열입곱의 희생이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당연했다.
그 희생 속에 중국 헌터는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헌터들은 진을 갖추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전투를 치러냈다.
숨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다섯의 초절정 고수와 한 명의 화경의 고수가 포함된 전력이 A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고전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잠깐.”
차주한이 왕인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신의 길드의 유일한 S급 헌터 차예린 또한 차주한의 옆에서 죽일듯한 눈으로 왕인귀와 중국 헌터들을 노려봤다.
당장 검을 뽑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촉즉발의 상황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두가 우려하는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동료의 시신을 수습할 시간은 주시오.”
슬픔인지, 분노인지, 두 눈이 붉게 충혈 된 차주한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실 따져 묻고 싶기도 했다.
왜 도움을 주지 않았냐고.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국 헌터들에게는 여력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무리 던전 밖에서 알력이 있었다 해도, 함께 맞섰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피해가 줄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차주한은 끝내 묻지 않았다.
왕인귀의 눈을 보는 순간,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자신의 물음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왕인귀의 무심한 눈은 설령 신의 길드원들이 모두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결코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뭐. 그러지. 어차피 우리도 마나석은 수거해야 하니까. 일각이면 되나?”
왕인귀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나석을 수거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금방 끝날 일이긴 했지만 거기에 몇 분이 더해진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끄덕.
“시신만 수습하고 바로 다시 이동한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차주한은 곧장 등을 돌려 신의 길드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신들의 길드장과 왕인귀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느끼며 만약에 상황에 대비해 무기를 놓지 못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소 B급 이상인 마나석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신을 수습하는데 열중했다.
몇몇은 준비한 물자를 토대로 시신을 운반 할 수 있는 수레를 만들어냈다.
길드원들은 그 위에 수습한 시신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쌓아 올렸다. 잘려나간 팔다리나 깨어진 머리도 한 편에 잘 모아 놓았다.
죽은 동료들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공략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한 구씩 일일이 옮길 수는 없었다.
“출발한다.”
왕인귀는 칼같이 시간을 지켰다.
정확히 일각이 지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의 실제 전력을 생각하면, 두려울 것이 없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가자..”
이어 차주한이 조금은 힘없이 길드원들을 데리고 뒤를 따랐다.
중국 헌터들과 달리, 신의 길드는 아까와 같은 수준의 몬스터를 마주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던전의 마력 수치를 생각하면, 그 이상의 몬스터를 마주할 가능성은 적지만 개별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
나는 헌터들의 전투를 그저 지켜봤다.
신의 길드가 위기에 처하고 헌터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정체를 드러낼 수도 없거니와, 차예린과 아주 작은 연이 있을 뿐,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그렇게까지 해서 도울 이유는 없었다.
또한 차주한이 분노를 드러낸 것과 달리, 중국 헌터의 행동이 불합리하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자국의 헌터를 지키기 위한 당연한 행동이다.
중국 헌터들은 진을 형성해 완벽한 전열을 갖추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의 길드원을 돕기 위해 무리해서 진을 깨트릴 경우, 오히려 더 많은 피해가 발생했을 지도 몰랐다.
물론, 애초에 협력해서 함께 전투를 치렀거나, 실력을 숨김없이 드러냈다면, 얘기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중국 헌터들은 그들의 전력에서 기대되는 몫은 확실히 해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차주한의 분노는 신의 길드의 약함에 향하는 것이 옳았다.
‘SS급 헌터라.’
그 문제는 차치하고, 내 관심은 오로지 새로운 화경의 고수와 중국 헌터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전력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전투였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건 많았다.
일단 새로운 화경의 고수를 내가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해졌다.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그의 손에서 마법이 발현됐다.
S급 수준에 맞춘 마법이었지만 마법은 그가 무림의 인물이 아닌, 이 세계의 SS급 헌터임을 의미했다.
‘독괴와 마랑.”
또한 다섯의 초절정 고수 중, 둘의 얼굴을 확인했다.
독괴와 마랑은 무림에서도 유명했던 초절정 고수들이다.
독괴는 그의 독에 한 줌 독수로 녹아내린 무림인의 수가 수백에 달할 정도로 독공에 능통한 인물이었고, 마랑은 청해 일대에 악명이 자자했던 마인이었다.
특히, 마랑은 마기가 섞인 대기 때문인지, 물 만난 물고기마냥 몬스터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외에 셋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물론 중국의 S급 헌터만 해도 열 명이 넘는 만큼, 내가 알지 못하는 고수가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