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73화. 파견.
살막이 중국을 집어삼키고 일주일.
김원철의 사퇴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한국 정부가 중국의 새로운 국가주석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김원철은 기자회견을 통해 헌터 협회 협회장 자리에서 내려왔다.
갑작스런 사퇴에 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국민들과 헌터들은 의아함을 표했으나, 정부는 내심 자신들과 뜻이 맞지 않는 김원철의 사퇴를 반겼다.
김원철의 사퇴에서만큼은 정부와 협회의 뜻이 일치했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원 길드. 좋은 이름입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제 이름의 가운데 자와 함께 모두가 하나라는 의미를 담아봤습니다.”
김원철은 곧장 ‘ONE’이라는 이름의 길드를 창설했다.
협회의 인원들 중, 김원철과 뜻을 함께하는 백여 명의 협회원들이 모인 길드였다.
그 안에는 이십 여명의 A급 헌터들뿐만 아니라, S급 헌터인 박동석도 있어, 단숨에 1세대 길드들을 위협하는 길드가 되었다.
S급 헌터와 A급 헌터들이 대거 협회를 떠나면서 협회의 힘이 크게 약화 됐지만 이를 막을 존재는 없었다.
길드들은 당연히 협회의 약화를 반겼고, 정부에는 이를 간섭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협회가 정부의 결정에 조언자 역할 밖에 할 수 없듯, 정부도 협회의 일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순 없었다.
“혹시라도 공략 허가를 받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김태빈 헌터는 저를 그 정도로 어리숙하게 일처리를 하는 사람으로 보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유인원 헌터를 2대 협회장으로 추대했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협회장님이라 불러야 될 겁니다. 하하.”
그렇다고 김원철이 협회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협회장의 자리에 김원철의 비서였던 유인원이 추대됐기 때문이다.
협회가 세워진 초기부터 협회장을 보좌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 또한 A급 헌터다.
새로운 협회장으로서 협회를 이끌어 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유인원은 정부의 행보에 찬동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김원철과 커넥션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외에도 김원철이 변혁 초기부터 5년 간, 협회장직을 맡아왔기 때문에 협회 요직에는 아직 그를 따르는 이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
사실상, 김원철은 협회장이라는 자리가 갖는 책임감만을 내려놓고, 영향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부쪽에서 알면 난리가 나겠군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제 보신만 챙기기 급급한 자들이니. 자신들에게 피해가 없다면, 알고도 모른 체 할 겁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유인원 헌터가 저와 함께해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으니 말입니다.”
김원철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정부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다는 태도였다.
하긴 이미 뜻이 맞지 않아 협회장직까지 내려놓았다.
새로이 길드를 창설하긴 했지만 길드의 목표는 오로지 던전과 몬스터에 있다.
더 이상 정부와는 연결될 일도 없으니,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
한국 정부는 중국과 협상을 거쳐 헌터의 파견 규모를 결정지었다.
사실은 중국의 일방적인 통보였지만 정부가 자신들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협상을 거쳤다 발표한 것이다.
어찌됐건, 그렇게 결정된 파견은 두 명의 S급 헌터를 포함한 서른 명 규모였다.
목적은 강원도 삼척과 전라도 전주에 있는 두 개의 재앙급 던전으로, S급 헌터를 보유한 1세대 길드 신의 길드와 청룡 길드가 각기 중국의 헌터들과 협력해 공략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재앙 급 던전이라고는 하나, A급 던전의 평균 마력 수치인 20,000을 조금 웃도는 25,000수준의 던전이다.
한국정부의 힘으로도 충분히 공략이 가능하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고려해 보류했던 것을 중국의 지원으로 공략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중국 측 두 명과 한국 측 한 명의 S급 헌터를 더해 무려 세 명의 S급 헌터와 백여 명의 A급 헌터들이 투입되는 만큼, 누구도 공략이 성공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공항에서 대기 중이던 정부와 협회 관계자들이 중국헌터들을 맞이했고,
“와아아~~!!”
“환영합니다!”
한국 국민들도 중국 헌터의 방문을 격렬히 반겼다.
양국의 관계를 떠나 위험을 무릅쓰고 타국의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온 헌터들을 홀대할 이유는 없었다.
“예.”
공략을 앞두고 있기 때문인지, 굳어있는 중국 헌터들의 인상이 날카롭게 보이기까지 했지만 비행이 편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초절정이 다섯에 화경의 무인이 하나라.’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은밀히 중국 헌터들의 전력을 가늠했다.
실제로 한국을 찾은 헌터들의 수준은 중국 측에서 밝힌 전력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S급에 해당하는 초절정 무인이 둘이 아닌, 다섯에 달했고, 화경의 무인까지 포함된 전력이다.
재앙급 던전은커녕, 재앙 할아버지가 와도 공략이 가능할 정도다.
단순히 재앙급 던전의 공략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음이 분명했다.
***
중국의 헌터들은 일단 목적에 충실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정부 측에서 준비한 환영식도 마다하고 곧장 강원도 삼척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던전 진입을 준비했다.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알 수 없는 만큼, 최소한의 준비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중국 헌터분들은 비행과 이동으로 피로도 쌓여있을 테니, 내일 회의를 거쳐 공략을 진행하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삼척 던전의 공략을 함께 진행할 신의 길드의 길드장 차주환이 능숙한 중국어를 뽐내며 그런 중국 헌터들을 한 차례 만류했다.
명색이 재앙급 던전이다.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무리해서 공략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아직 지휘계통도 통일되지 않았고, 양측 헌터들 간의 능력도 모르는 상황이다.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조율이 필요했다.
“비단 삼척의 던전뿐만 아니라, 전주의 던전도 생성시기가 꽤 지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한시 빨리 공략을 진행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 던전의 공략을 빨리 완료해야, 전주의 던전도 공략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중국 헌터의 대표인 왕인귀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겉보기에는 확실히 자신들의 휴식을 제쳐두면서까지 한국의 안전을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야 하지만...”
“그럼 저희가 먼저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길드장님께서는 후위를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왕인귀는 차주환의 대답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명백한 무시였지만 왕인귀가 앞서 보여줬던 호의에 차주환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약간의 위화감이 들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공략을 완수하고자 하는 의지로 보아 넘겼다.
“후... 우리도 곧바로 진입한다.”
한숨을 한 번 내쉰 차주한이 길드원들과 함께 중국 헌터들의 뒤로 따라 붙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중국 헌터들만 진입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만약 그들끼리 공략을 진행하다 실패라도 한다면, 신의 길드만의 문제가 아니라, 외교적 문제로 번질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장비 점검하고, 곧바로 진입한다. 내가 선두에 설 테니 차례대로 뒤따르도록.”
왕인귀는 금세 진입 준비를 끝마쳤다.
물자 등은 신의 길드 측에서 전부 준비한 덕분이다.
신체와도 같은 장비를 점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예!”
중국 헌터들은 재앙급 던전을 눈앞에 두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익숙하다는 듯, 잘 벼려진 한 자루 검처럼 날카로운 눈빛만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곧이어,
왕인귀를 필두로 한 헌터들의 눈앞에 던전 내부가 펼쳐졌다.
환경은 익숙했으나, 공기는 전혀 익숙지 않았다.
충만한 기운 사이로 죽음의 기운이 짙게 내려 앉아 있었다.
“마기라. 마물들이 나오는 던전이었나.”
왕인귀는 이마저도 익숙한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회색빛 대지.
다행히 시야가 닿는 곳에 존재하는 몬스터는 없었다.
“윽...”
“마기,,,?”
덤덤한 중국의 헌터들과 달리, 뒤이어 들어온 신의 길드원들 사이에 약간의 소요가 일었다.
던전의 공기는 대부분 맑은 숲 내음과 같이 상쾌하다.
지금처럼 죽음과 가까운 마기는 신의 길드원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상위 헌터들인 만큼, 마기를 아예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호흡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요는 금방 진정됐다.
“마물들은 상대해 봤나?”
왕인귀가 물었다.
마물은 마족과 악마 등을 모두 아우르는 명칭이다.
흔치 않은 몬스터이니 만큼, 처음 마주할 경우 혼란이 발생할 수 있기에 확인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왕인귀가 신의 길드원들을 바라보는 표정이 문제였다.
아래로 깔아보는 눈빛이며,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까지.
더 이상 신경 쓸 시선이 없기 때문인지, 왕인귀는 네까짓 놈들이 뭘 알겠냐는 식으로 신의 길드원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
차주한의 표정이 굳어졌다.
던전에 진입하기 전, 느꼈던 위화감은 착각이 아니었다.
중국의 헌터들은 자신들을 협력 관계가 아니라, 짐 덩어리, 혹은 아랫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찰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재앙급 던전 공략을 앞두고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도 없거니와, 전력상으로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수는 삼십 대 칠십으로 신의 길드원들이 더 많지만 중국 헌터들 사이에는 두 명의 S급 헌터가 포함되어 있다.
산술적으로 한 명의 S급 헌터가 열 명의 A급 헌터를 상대할 수 있다고는 하나, S급 헌터 둘이 모여 만들어지는 상승효과를 생각하면, 사십 명의 수적 우위가 무색해진다.
잘해야 양패구상이고, 못하면, 전멸을 면키 힘들다는 의미다.
까드득.
“언행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가만히 꼬리를 말고 물러서지는 않았다.
차주한은 이를 갈며 불쾌한 감정을 표출했다.
“훗.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마기가 서린 던전이 생긴 적이 있었나 보군. 뭐, 그렇다면 적어도 발목을 잡지는 않겠지. 그럼 공략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모두 나를 따르도록.”
왕인귀가 코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예린아. 참아라. 우리도... 뒤따른다.”
차주한은 왕인귀의 태도에 어째서 그가 진입을 망설이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애초에 왕인귀에게는 의견을 조율할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신의 길드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차주한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차예린을 만류하는 동시에, 던전 안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애써 되새기며 자신 또한 화를 억눌렀다.
신의 길드원들도 마찬가지.
잔뜩 굳은 얼굴로 차주한의 뒤를 따랐다.
***
삼십 분 가량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백여 명의 헌터들이 떠나간 자리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