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72화. 준동(3).
한국 정부도 당장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결국 고개를 숙일 것이다.
거절한다면, 죽음뿐이라는 게 명확한 상황에서 용기를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가진 게 많을수록 더 힘들다.
대통령 등의 인사들이 협회에 보호 요청을 해왔지만 이는 중요치 않았다.
러시아의 경호 체계도 막지 못한 암살이다.
만약을 대비한 요청일 뿐, S급 헌터의 수부터 현저히 떨어지는 협회의 보호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른 나라들과 협력 체계라도 구축된다면, 모르겠지만... 일본과 러시아 둘 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김원철이 고개를 저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헌터 전력을 가지고 있는 중국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개국의 원활한 협력이 필요한데, 이미 하루 사이에 고개 숙이지 않은 국가는 몇 개국 남지 않았다.
개중, 협력에 유의미한 힘을 가진 국가는 고작해야 일본과 러시아 정도뿐이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협력할 만큼, 관계가 좋지 않다.
여전히 과거가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레 협력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러시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암살로 인해 국가 자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정부와 협회의 머리를 동시에 잃어버렸으니,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는다.
중국, 아니 살막이 준 기한은 한 달.
그 뒤에는 어떤 식이 됐든, 살막이 먼저 행동에 나설 확률이 높았다.
결국 협력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굳이 아시아에 국한 할 필요가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꼭 아시아가 아니더라도 미국이 있는 아메리카도 있고, 유럽도 있다.
미국의 헌터 전력은 아시아 전역을 더한 것보다 강력하고, 유럽 또한 몇 개국은 중국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
당연히 자국의 안위를 우선시 하겠지만 그 중, 한두 개국의 협력만 이끌어 낸다 하더라도 굳이 일본과 러시아 등을 염두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애초에 협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입니다. 결국에 외교적인 결정 권한은 정부에 있으니까요. 헌데, 정부에 그럴 의지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음...”
협회는 정부와는 별개의 기관이다.
조언자의 역할은 할 수 있을지언정, 실질적인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한 기관이기에 그 조언이 결코 가볍지는 않지만 지금과 같이 더 강대한 위협 앞에서 협회의 의견을 전과 같은 무게감을 가질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후... 일단 다각도로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니, 차후에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길게 한숨을 한 번 내어 쉰 김원철이 말했다.
오늘따라 무척이나 피곤한 얼굴이었다.
하긴 여기저기에서 걸려오는 연락에, 시시각각 전해져 오는 보고 등으로 하루를 꼬박 새웠으니, 지칠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협회장은 던전과 헌터들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바쁜 자리다.
최근 연이어 터진 사건들에 이번 일까지 더해졌으니, 아무리 A급 헌터라 해도 몸이 축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도 A급 헌터인 만큼, 체력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신적인 피로였다.
붉게 충혈 된 눈에 두통이라도 있는지 연신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는 김원철이었다.
“알겠습니다. 변동사항이 있다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 자리에 남아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금처럼 김원철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는 정도가 전부다.
이는 굳이 내가 머무르지 않아도, 연락만으로 가능한 수준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암살이라는 만약을 대비해 박동석을 김원철의 곁에 남겨둔 채, 협회장실을 빠져나왔다.
물론 내가 협회장실에서 나온 것일 뿐, 협회자체를 떠난 것이 아니니, 암살에 대한 위협은 크지 않았다.
내 감각을 피해 김원철의 앞까지 당도할 수 있는 실력의 살수라면, 누가와도 막지 못할 테고, 그게 가능한 살수는 내가 아는 한 여문휘뿐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여문휘가 고작 김원철을 암살하기 위해 나선다면, 나로서는 반길만한 일이다.
나에게는 여문휘를 죽일 둘도 없는 기회가 될 테니 말이다.
***
나는 협회에 머물며 정보를 전해 받기도 하고, 직접 찾아보기도 했다.
인터넷에는 중국 국가주석이 바뀐 것과 러시아 대통령과 헌터 협회장이 암살당한 두 가지 내용의 기사가 가득했고, 뉴스에서도 이에 대한 기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의아한 것은 암살에 대한 기사와 뉴스에서 살막의 경고장에 대한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암살에 관해서도 중국 측에서 벌인 일이 러시아 내부의 정치권력의 내분에 의한 쿠데타라는 얘기가 주를 이뤘다.
간혹, 제대로 된 내용이 담긴 기사도 있었지만 루머라는 댓글과 함께 금세 사라져 버리기까지 했다.
‘정부쪽에서 손을 쓴 건가. 아니면 살막이?’
어느 쪽의 농간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어느 쪽이든 자세한 내막을 밝힐 생각은 없다는 점이다.
살막은 타국의 정부를 집어 삼키는 일이기에, 정부는 타국에 대한 굴복은 굴욕적인 일이었기에 널리 알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평범한 이들을 이를 알게 되는 일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살막의 일이 국민들에게 공론화되건, 말건 중요치 않다.
그보다는 나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위협이 되는 놈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이토록 이 일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여기에 있었다.
살막과 나는 불구대천의 관계다.
솔직히 나는 살막이 내게 관심을 끊는다면, 그냥 살아갈 수 있지만 살막은 아니다.
과거를 떠나서 두 명의 초절정 무인, 그리고 한 명의 화경에 준하는 무인이 내 손에 죽었다.
중국을 집어 삼키며 더욱더 거대해진 살막이지만 그 셋의 죽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게다가 혹시나 과거의 나에 대해서 알아내기라도 한다면, 불구대천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의 적대적인 관계가 될 것이다.
어쨌든, 막주 여문휘의 암살을 통해 살막을 와해시키겠다는 계획은 실현하기 어려워졌다.
그가 국가주석이 되면서 경호가 배 이상 늘었다.
살막의 살수들에 국가주석이 머무는 중난하이를 지키는 인력부터 첨단 기기들까지 더해져 여문휘를 지키고 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앞서보다 수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한 달.
고작 한 달로는 그 막중한 경호를 뚫고 여문휘에게 닿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하물며 여문휘는 나와 같은 화경의 고수.
사소한 실수 하나가 실패로 귀결될 수 있는 상대다.
다른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
중국은 고개 숙인 국가들에 보인 행보는 의외였다.
A급 이상의 상급 헌터를 각 국에 파견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S급 헌터도 아끼지 않았다.
살막이 중국을 집어 삼켰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외적으로 드러난 S급 헌터의 수는 십 수 명에 불과했지만 살막에 속해 있던 이들 대부분이 최소 A급 이상의 살수들이다.
특히, 화경의 경지인 막주 여문휘나 권왕의 경우에는 SS급 이상이었고, 혈검과 독괴 등 SS급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무인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양지로 모습을 드러낸 이상, 자국의 던전뿐만 아니라 타국을 지원할 정도의 여력은 충분했다.
파견된 헌터들은 각 국가의 힘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던 재앙급 던전들을 대신해 공략하기 시작했다.
공략으로 발생하는 수익은 중국 측에 귀속되긴 했지만 동기화가 발생할 경우, 국가의 존폐 여부까지 걱정해야 했던 던전들을 중국이 처리해주니, 각 국은 환호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중국의 행보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소수 국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정부 측에서 며칠 내로 지지성명을 발표하겠다고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그렇군요.”
재앙급 던전 공략은 이미 마음이 기울어있던 한국 정부가 좀 더 발 빠른 결정을 내리게 된 계기다.
누구나 제 목숨이 귀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거부하면, 죽음뿐이라는 극단적인 채찍과 반대로, 온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달콤한 당근이 제시됐다.
한국에도 아직 두 개의 재앙급 던전이 있었고, 동기화가 발생할 때마다 수백 수천의 헌터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 정부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는 것만으로 헌터들을 지원해주니, 명분도 충분했다.
게다가 굴복이 꼭 불합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실질적으로는 굴복이지만 겉으로는 지지의 형식을 띄고 있을 뿐이다.
국민들에게 속국이 되었음을 대외적으로 알려야 할 필요도 없고, 단지 정부만 고개 숙이면 될 일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정부의 결정과 관계없이 저는 김태빈 헌터의 뜻을 지지할 겁니다.”
“협회장님이야 말로 괜찮겠습니까?”
김원철은 내가 살막과 양립할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안다.
사마휘와 왕추가 죽고 삼 개월이 지나서 혈귀를 보낸 살막이다.
지금은 잠잠하다고 하지만 언제 또 마수를 뻗쳐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 편에 서겠다 말하는 것은 협회라는 한 단체를 이끄는 김원철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결정이 그를 따르는 수백 수천 헌터의 죽음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그의 목숨이 위험했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가 지지성명을 발표하는 대로 협회장 자리에서 사퇴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까지...”
“꼭 김태빈 헌터 때문만이 아닙니다.”
김원철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번에 정부가 결정을 내리면서 협회에도 협조를 요구했다.
협회도 정부의 뜻에 따라 살막에 굴복하라고.
만약 중국의 헌터들이 투입될 경우, 그들을 전적으로 보조하라고.
말이 협조지, 결국 정부와 더불어 협회 또한 중국의 꼭두각시가 되라는 의미였다.
“개인적으로도 누군가의 밑에 있을 성격이 아닌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간단하게 한국의 모든 헌터들의 정점에 있다, 자신의 머리 위에 누가 올라오는 게 싫다는 뜻이다.
실제로 김원철은 S급 헌터들에게도 예를 갖추긴 했지만 동격에 섰다.
그렇기에 협회가 S급 헌터를 보유한 길드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도 마찬가지.
남들이 보기에는 김원철이 과하게 자신을 낮추는 게 아닌가 싶었을 수도 있지만 겉보기에만 그러할 뿐, 내가 우위에 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김원철은 무소속이지만 내 존재 자체로 협회에 힘이 실렸기 때문에 굽히며 나를 지원한 것이고, 나는 협회의 지원으로 움직임이 편하니 가만히 놔뒀을 뿐이다.
서로 필요 하에 이어가는 거래 관계에 가까웠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이 참에 길드나 하나 만들어 볼까 합니다. 저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김태빈 헌터님도 함께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 또한 누구의 밑에 있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하. 그러시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내 대답에 김원철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