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71화. 준동(2).
“중국이라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김원철의 얼굴에 걱정이 서렸다.
솔직히 살막이 세계가 주목하는 위협적인 세력이라고는 하나, 무림첩을 받은 것 외에는 아직까지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다.
태빈의 습격 건과 혈귀 사건이 있긴 했지만 두 사건은 개인적인 사건에 가깝다.
김원철 입장에서는 아직 야욕을 드러내지 않은 타국의 살막보다 태빈 한명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저도 목숨을 걸 정도로 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곧장 몸을 뺄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닌, 사실이었다.
과거에는 매번 목숨을 걸고 살행에 나서곤 했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무리라 판단되면, 뒤도 안보고 도망칠 생각이다.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하루 빨리 자유를 얻고 싶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좀 더 강해진 뒤에 후일을 도모해도 될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조용히 다녀오고 싶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살막은 나 하나를 죽이고자 화경에 준하는 혈귀까지 보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중국을 찾기는 어려웠다.
배나 비행기를 대놓고 이용하는 것은 호랑이 입 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다.
살막 측에서 알 수 없는 수단이 필요했고, 이는 내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음... 배편을 이용한다면, 쉽긴 하겠지만 그래도 안전을 생각한다면, 비행기가 낫습니다. 일단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만 시일이 좀 걸리긴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준비가 되는대로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
변화가 시작된 이후, 수많은 지역이 미처 공략하지 못한 던전이나, 할 수 없었던 던전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의 소굴로 변했고, 그만큼 많은 나라들이 사라졌다.
바다와 하늘도 마찬가지.
과거의 항로와 항공로가 모두 유지되고 있는 건 아니다.
중국과는 거리가 가까워 교류를 계속하고 있긴 했지만 바다는 어디서 해양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고, 항공로도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이러한 상황 탓에 밀입국은 협회라 할지라도 쉽지 않았고, 마땅한 준비가 필요했다.
***
협회가 다양한 방안을 모색했지만 아쉽게도 내가 중국에 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살막의 행동이 한 발 더 빨랐다.
중국의 지도부가 하루아침에 물갈이된 것이다.
회의를 위해 모였던 국가주석이 갑자기 사퇴를 발표한데 이어, 세상에는 그에 알맞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들먹이며 중국 헌터 협회 회장을 임시 국가주석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추대된 인물이 바로 여문휘였다.
나는 그를 한 눈에 알아봤다.
그를 죽이기 위해 수개월 동안 정보를 수집하고, 한 달이 넘도록 관찰했다.
검은 무복만을 고집하던 의복이 검은색 양복으로 바뀐 것 외에는 모든 게 그대로였기에 몰라 볼 수가 없었다.
“중국의 국가주석이 바뀐 일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나는 곧장 협회를 찾았다.
최근 살막을 주시하고 있었던 만큼,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저도 의외이긴 하지만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전 국가주석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던전 문제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큰 만큼 많은 던전들이 생겨나고, 그로 인한 피해도 크니까요. 아무래도 일반인보다는 헌터가 국가를 이끌어 가는 게 낫다 생각한 듯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헌터 출신 국회의원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변화가 시작된 이후, 헌터 출신 의원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특히, 던전과 몬스터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들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가장 피해가 컸던 강원도의 경우, 도지사부터 시작해 거의 모든 시의원들이 헌터 출신일 정도였다.
그들은 한 때, 일선에서 뛰며 직접 던전을 경험한 만큼, 현 시대에 어울리는 리더가 되겠다는 뜻을 내세웠고, 이를 지지하는 일반인들도 많았다.
“뭐 어쨌든, 한 달간 임시 국가주석 직을 이행한 뒤에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찬성 여부에 따라 정식 선출을 결정한다고는 하지만 형식적인 절차일 뿐, 이미 정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보여 집니다.
이미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게 될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 인민 대부분이 헌터 협회장 출신인 여문휘 국가주석을 지지하고 있으니까요.”
김원철은 덤덤하게 설명을 이었다.
그는 새로 중국에 국가주석이 된 여문휘가 살막의 막주임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새롭게 국가주석이 된 여문휘가 바로 살막의 막주입니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김원철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쩐지... 며칠 전부터 지도부의 주요 인사 몇이 연이어 실종되거나 사고로 사망했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사퇴한 국가주석도 그 이후 행방이 묘연하고요.”
“그렇군요. 이미 죽은 이들도 그렇고, 실종된 이들도 살아있긴 힘들 겁니다. 이제는 전 국가주석이 되어버린 원래의 국가주석도 그렇고.
어찌 됐건, 살막은 더 이상 존재를 숨길 생각이 없는 것 같군요. 중국을 통째로 집어 삼키면서 전면에 나설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지만...”
임시라고는 하나, 반대 세력이 어떻게 됐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에 한 달 뒤라고 해서 결과가 뒤바뀔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중국 전체가 살막의 손아귀에 떨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때,
콰앙!
“협회장님.”
직원 한 명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무척 무례한 일이었지만 직원의 급박한 얼굴에 누구도 이를 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러시아 대통령과 헌터 협회장이 암습을 당해 시신으로 발견 됐습니다. 그리고 각 시신 위에는 살막이라는 이름의 경고장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대통령은 무림첩이 돌았을 때, 살막을 쥐새끼처럼 숨어 흉계를 꾸미는 놈들이라 대놓고 비판한 인물이었다.
점차 살막의 힘이 만만치 않음이 드러났을 때도 자신은 이런 협박 따위에 결코 굴하지 않을 거라며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러시아의 헌터 협회 협회장 또한 마찬가지.
대통령의 영향을 받아 굳센 인물이었다.
그 꺾이지 않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살막은 중국을 접수하는 동시에 러시아의 대통령과 헌터 협회장을 죽이며 자신들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렸다.
“일종의 경고군요.”
두 명의 S급 헌터와 A급 헌터 십 수 명에게 경호를 받는 러시아 대통령이다.
일국의 대통령이라고는 하나, 개인의 경호로 그토록 많은 인력을 배치할 수 있는 국가는 그리 많지 않다.
중국과 미국, 그리고 유럽의 몇 개국 정도만 가능한 일이다.
협회장은 또 어떠한가.
일국의 모든 헌터들을 총괄하는 자리다. 그 경호가 가벼울 리는 없었다.
그런 이들이 암살을 당했다.
살막이 자신들의 무력을 드러냄과 동시에 각국에 경고를 보낸 것이다.
“무림첩에는 한 달 뒤, 각국에게 답을 묻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역시나.
살막은 경고와 함께 각국에 한 달의 유예기간을 주었다.
한 달 뒤라면, 정확히 임시였던 중국 국가주석의 자리가 정식으로 결정 나는 날이다.
이제 각국은 선택을 해야 할 때였다.
굴복할 것인지, 러시아의 대통령과 협회장처럼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
협회장실의 전화기와 김원철의 핸드폰이 바빠졌다.
처음은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김원철에게 우선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요구했다.
한 달의 유예기간이 주어졌고, 이전까지도 한국은 이렇다 할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지만 암습이 있었던 만큼, 자신의 안위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러시아가 당할 정도라면, 협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대통령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뭐라도 해야 불안감이 조금이라도 가시는 게 사람 심리였고, 대통령은 협회의 경호를 바랐다.
그 뒤로도 요직에 앉아 있는 정부 인사들과 여러 단체나 기업의 장들에게서도 연락이 이어졌다.
살막은 기본적으로 암살 단체.
실제로 살막의 살수들의 소행이라 밝혀진 암살 사건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대통령의 암살은 이전의 사건들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무려 S급 헌터가 포함된 경호 인력을 뚫고 암살에 성공한 일이다.
살막의 진정한 전력은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직원들과 회의 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의 것은 성실히 응대했지만 나머지는 대충 둘러댄 김원철이다.
회의는커녕, 인력을 투입할 생각도 없다.
대통령은 몰라도, 지금은 그들의 안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 달 동안,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
“중국 정부를 시작으로 파키스탄과 미얀마 등 인접한 몇몇 나라는 곧장 지지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살막은 일단 아시아의 세력들을 규합한 뒤에 미국이나 타이탄이 있는 유럽을 노릴 생각인 듯합니다.”
불과 하루 사이에 인접 국가들 대부분이 새로운 살막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타국의 지도자가 바뀐 일에 성명이라니.
단순한 지지가 아닌, 살막의 무림첩 내용에 따라 굴복을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오래 전부터 굴복한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살막이 존재를 감추고 있기에 이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
“일부 국가에서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비친 인사들이 있었습니다만,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암살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한 정부 인사가 국가가 이러한 일로 흔들려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 결과, 필리핀 대통령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시아에서 아직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국가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통령을 잃고 혼란에 빠져있는 러시아 정도가 전부였다.
그 밖에 지역에서는 미국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중이고, 유럽은 타이탄의 세력권이기 때문인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뜻은 어떻습니까?”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결정을 유보하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긴 하지만 벌써부터 굴복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굴복이요?”
“예, 한국도 마찬가지로 중국의 결정을 지지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일단 그러한 뜻을 내비친 의원들은 모두 파악해 두었습니다만, 그 수가 과반을 넘습니다.
굳이 살막이 아니더라도, 중국의 헌터 전력은 한국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으니,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헌터를 막을 수 있는 건 같은 헌터뿐이다.
그런데, 중국은 S급 헌터만 열 이상을 보유하고 있고, B급 이상 헌터의 수는 다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헌터 전력이 막강하다.
한국 헌터의 수를 전부 합쳐도 중국의 B급 이상 헌터의 수에 미치지 못할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헌터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헌터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짐을 감안하면, 엄청난 차이였다.
이렇게 헌터 전력에서부터 현저하게 밀리는 상황이다 보니, 일단 굽히고 보자는 의견이 우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틀리면, 곧장 암살을 해대는 상대를 막을 방도가 없으니,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