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70화. 준동.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얻고 가장 처음 목표로 했던 과거의 경지를 되찾았고, 잠시 나를 고민케 했던 살수와 무인 사이의 번뇌도 해결했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고, 무공의 끝을 보고 싶다는 향상심은 남아있었지만 이는 조급해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현경.
무림 역사상, 한 시대에 수십이 넘는 화경의 고수들이 있었던 적도 있지만 현경의 고수는 다섯을 넘긴 적이 없을 만큼, 지고한 경지다.
그것도 하늘이 직접 점지하기라도 하는지,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에 각기 한둘씩 존재해, 오래토록 세 세력의 균형을 맞춰왔다.
가끔 한 명이 세상을 뜨거나 하는 경우에는 큰 전투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어디선가 금세 또 다른 고수가 탄생하는 식이었다.
어찌됐건, 현경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조급함보다는 꾸준한 노력밖에 답이 없다.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불현 듯 찾아온 깨달음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하늘에 천명했던 지키는 삶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지만 내 울타리에 들어온 이들이 꿈을 좇아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내가 목표한 것을 이루는 것과는 다른 충족감을 느꼈고, 이게 누군가를 지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어찌됐건, 당장은 급히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혈귀의 말대로 권왕과 혈검 등의 고수들까지 포섭해낸 살막이 문제긴 했지만 이 부분은 당장 손 쓸 수 없는 문제다.
일단 협회가 살막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내가 습격을 당했던 최근에서야 투입되는 인력과 물자를 대폭 늘려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그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도 이전까지는 일국을 넘어서는 힘을 가진 단체임에도 형식적인 조사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 국내에서 타국의 헌터가 버젓이 활동한 것에 대해 분노한 김원철 덕분에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일단 지금은 좀 쉬고 싶군요.”
다 떠나서 A급 던전에서 열흘을 보냈다.
백 마리의 몬스터들을 죽이는데, 팔 일이 조금 넘게 걸렸고, 드래곤에게 하루를 소비했다.
사나흘도 아니고, 열흘 동안 살수로서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둔 채로 지냈다.
아무리 화경의 경지에 오른 나라고 해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군요. 당연히 그러실 텐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유인원이 괜스레 뒷머리를 쓸어 올렸다.
태빈이 아무리 뛰어난 헌터라고 해도 홀로 A급 던전을 공략하는, 모두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긴 일을 막 끝마친 상태다.
멀쩡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무척이나 지쳤을 테고, 어쩌면 내상을 입었을지도 몰랐다.
쉬는 게 당연한 수순인데, 어리석은 질문을 한 셈이었다.
벌써부터 S급 이상이라 평가되는 헌터이기에, 그의 행보에 대한 조급한 마음이 앞섰다.
“이참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는 것도 좋겠군요. 필요한 부분은 협회에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민망함에 유인원이 한 마디 덧붙였다.
살막의 습격부터 이상 현상과 혈귀에 이르기까지 정말 쉴 틈 없이 달려온 태빈이다.
가족들 또한 살막의 위협으로 인해 보호받는 처지라 마음 편히 만나지도 못했다.
최소 A급 이상의 헌터가 경호를 해야 하는 터라, 태빈의 부모님은 머무는 숙소에서 잠시 나가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웠고, 기껏해야 가끔 협회 내부의 숙소에서 조촐한 식사 자리를 갖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는 태빈이 큰 문제들을 여럿 해결해 준 덕분에 협회도 여유가 생겼다.
하루쯤은 경호에 인력을 투입하더라도 무리가 없을 정도는 되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다.
정신없이 지냈던 탓에 몰랐다.
형이야 가끔씩 무공을 봐주긴 했지만 부모님은 얼굴을 본 적도 손에 꼽을 정도다.
경호문제도 있지만 괜히 같이 있는 자리에서 습격이라도 당할까, 일부러 내가 멀리한 것도 있었다.
그렇다고 평생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아직 살막의 위협에서 마음 놓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유인원의 말대로 잠시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했다.
***
가족들과 함께 서울 근교의 유명한 식당을 찾았다.
“하하. 이렇게 온 가족이 모이니, 좋구나.”
아버지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음을 지으셨다.
집안에서 하는 조촐한 식사자리가 아닌, 오랜만의 외식에 들떠 보였다.
장성한 아들들을 대견하게 여기는 눈빛도 느껴졌다.
어머니도 마찬가지 눈으로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네. 조용하고 좋네요.”
부모님과 형은 알지 못하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가족의 식사자리였지만 사실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일단 가게를 협회 측에서 통째로 빌렸다.
그 때문에 저녁 식사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하다 느껴지는 것이다.
200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가게에 우리 가족과 손님으로 위장한 열 명의 손님이 전부였다.
그것도 경호를 위해 각기 한 쌍의 연인과 동창 모임의 형식을 빌린 친구들로 보이는 열 명의 A급 헌터들이다.
뿐만 아니라, 방금 고기를 날라주던 여인도, 주차장에 있는 안내 요원도 협회 소속의 헌터들이다.
심지어 S급 헌터인 박동석은 주방에서 고기를 썰고 있다.
아무리 협회라도 S급 헌터에게 어떻게 주방 일을 맡겼을까 싶었는데, 본인이 직접 자원했다고 했다.
그 외에도 스물에 달하는 헌터들이 몸을 숨긴 채, 물샐 틈 없이 경호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로지 우리 가족 넷을 위한 협회 측의 배려였다.
촤아악.
불판에 고기가 올라가고,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자,
“그나저나 이제 괜찮은 것이냐?”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신 아버지가 물어왔다.
어머니의 시선도 나에게로 향했다.
두 분은 가족을 인질로 잡아 헌터를 협박하는 범죄조직이 있다고 알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고 해도 묻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예. 괜찮아요.”
내가 작게 미소 지었다.
위협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부모님을 걱정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우리는 걱정할 것 없다. 협회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서 전보다 편하게 지내고 있다. 우리보다는 너희가 걱정이구나.”
안전을 위한 경호라고는 해도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부모님은 자신들보다 자식의 안위를 먼저 챙겼다.
푸근하게 지어지는 미소를 통해 그 안에 담긴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도 네가 S급 헌터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이더구나. 그리고 자랑스럽다.”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아 관심이 없다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텐데, 역시나 부모님은 당연하다는 듯, 내 소식을 알고 있었다.
S급 헌터는 국내에 넷뿐이고,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은 경지다.
한편으로는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시면서도 자랑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빨리 드세요. 타요.”
생소한 감정이 치밀어 어색해진 나는 몇 번이나 애꿎은 고기만 뒤적거려야 했다.
그래도 내심 기분은 좋았다.
하루 빨리, 이런 자리를 가지는 게 어려워지지 않기를 바라게 될 정도로.
그러자면, 살막이 없어져야 했다.
***
협회에 살막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다.
베일에 싸여있다고는 하나 단체가 불과 5년 사이에 빠르게 몸집을 불려 일개 국가 이상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것을 숨기는 게 가능할 리 없었고, 확실히 협회는 인력과 물자가 투입된 결과를 쌓아가고 있었다.
물론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것을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살막의 근거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몇 군데를 특정해내고, 그들에게 가담한 상위 헌터 일부를 파악한 게 전부였다.
“북경과 상해, 무한, 서안에 합비...”
게다가 몇 군데를 특정해냈다고는 하지만 그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중국 전역에서 삼분의 일쯤으로 줄어든 정도에 불과했다.
인력과 물자가 제대로 투입 된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범위를 줄여나갈 수 있겠지만 당장은 한계가 명확했다.
하긴 사실 이 정도로 좁혀낸 것도 살막이 무림첩을 돌린 이후부터는 굳이 스스로를 숨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막이 과거처럼 웅크리고 있었으면, 인력과 물자의 투입과 관계없이 여전히 중국 전역을 조사하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권왕과 혈검이라...”
또한 살막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난 헌터들도, 무림에서의 별호를 그대로 쓰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무림의 별호를 쓰는 자들 가운데, 타국에서 활동하다 어느 시점부터 중국으로 활동역역을 옮긴 헌터들이 조사 대상이었고, 그들 중 일부가 실제로 살막에 가담했음을 밝혀낸 것이다.
그들은 중국 각지에서 살막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A급 헌터 수준으로 내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은 많지 않았다.
다만 혈귀가 죽기 전 언급했던, 권왕과 혈검은 위험했다.
이미 화경의 고수로, 혈혈단신 무림을 주유했던 권왕은 말할 것도 없고, 검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던 혈검 또한 과거에 초절정의 극에 이른 고수였다.
수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이상의 경지에 올랐어도 이상할 게 없었고, 같은 경지의 고수와의 싸움은 사소한 변수만으로 승패가 뒤집히는 경우가 흔하니, 나로서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권왕과 혈검 등, 살막에 가담한 헌터들보다는 놈들의 근거지를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어느 단체나 비슷하겠지만 머리를 치면, 그 밑의 무리들은 쉽게 와해된다.
특히, 지금의 살막은 무림에서와 달리, 살수들만의 집단이 아니다.
과거 무림의 인물들과 이 세계의 헌터들이 여문휘를 중심으로 모인 연합에 가까웠다.
여문휘라는 구심점을 잃는다면, 최소한 자의로, 타의로 포섭된 무인과 헌터들은 저절로 흩어질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머지 살수들은 걱정할 게 없었다.
‘과거 살막은 근거지를 황도 근처에 두었지.’
무림에서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살막의 근거지는 황도와 무척이나 가까웠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그대로 실현해냈고, 수백 년 간 발견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아니, 암수가 판치는 황실과 무림 모두의 필요로 인해 애써 파헤치려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들에게 살막은 흔히 말하는 필요악이었으니까.
“북경에 가보려고 합니다.”
“북경을 말입니까?”
함께 자료를 보던 김원철이 의문을 표했다.
살막에 대한 자료를 요구할 때부터 의아하긴 했지만 태빈이 직접 중국에, 북경에 가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살막의 막주를 죽일 생각입니다. 우두머리를 잃는 다면, 나머지는 쉽게 와해될 겁니다.”
나는 김원철에게 내 생각을 설명했다.
어느 정도는 협회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그에게 감출 이유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