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69화. 깨달음(2).
나는 드래곤이 포효를 내지를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드레이크보다 단단해 보이는 외피와 와이번의 것보다 큰 날개.
드래곤은 겉모습만으로도 상당히 까다롭게 느껴지는 몬스터였다.
하긴 본래 드래곤 공략은 A급 헌터 오십 명을 필요로 한다.
S급 헌터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수가 서른쯤으로 줄어들긴 하지만, 드래곤이 한순간에 수 명의 A급 헌터들을 저승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강력한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압도적인 힘은 둘째치고라도, 일대를 한순간에 무로 돌려버릴 수 있는 브레스는 핵에 비견될 정도로 파괴적이다.
실제로 과거 S급 헌터가 포함된 오십의 공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적도 있었다.
뭐, 나와는 관련이 없는 얘기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1급 몬스터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도마뱀쯤으로 보일뿐이었다.
드래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또한 혈귀와 비슷한 수준.
까다롭게 느껴질 뿐, 죽이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하늘로 도망이라도 친다면, 조금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딱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저 드래곤을 죽이려했다면, 이렇게 놈을 살펴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 A급 던전에서 이루고자 하는 건, 단순한 살육이 아닌 살수의 기예를 갈고 닦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대상이 바로 화경에 준하는 드래곤이다.
오우거, 와이번, 드레이크 등과 마찬가지로 놈이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하도록 일격에 숨통을 끊어 놓아야 지금의 경지에 어울리는 기예라고 할 수 있었다.
쿠오오오!
포효와 함께 드래곤이 커다란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놈은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적을 찾기 위해 경계심을 높인 채,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놈의 눈에 내 모습은 비치지 않았다.
지평선 끝의 벌레 한 마리까지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눈이지만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는 나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수십 킬로미터 밖의 먹잇감도 찾아내는 뛰어난 후각도, 땅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웜의 움직임까지 잡아내는 감각도 이번만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답답한지, 드래곤의 콧구멍과 입에서 뿌연 연기가 새어나왔다.
드래곤은 고민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브레스를 내뱉어 주변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싶었다.
제 아무리 대단한 몬스터라도 여태 자신의 브레스를 버텨낸 적은 없으니까.
놈이 어디에 숨어있건 브레스라면, 한순간에 한줌 재로 불태워 버릴 수 있다 믿었다.
그러나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브레스를 무한정 뱉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장인 드래곤 하트에 자연적으로 모여드는 마나를 일순간에 토해내는 게 드래곤 브레스다.
한 번 내뱉으면, 다시 마나가 쌓일 때까지 한 동안 사용할 수 없다.
만약 브레스를 뿜어낸 곳에 적이 없다면, 애꿎은 브레스만 낭비하는 꼴이다.
그 때문에 고민을 하는 것이다.
섣부르게 사용했다가는 정작 중요한 순간에 연기만 흘려야 될지도 모르니까.
***
꼬박 하루 동안 이어지던 탐색전이었다.
드래곤은 어디있는지 모르는 내 존재로 인해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고, 나 또한 오로지 일격에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일념으로 한순간의 기회만을 노렸다.
쿠와와!
먼저 인내심을 잃은 건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은 천생이 본능이 앞서는 몬스터다.
평생을 패자로 군림해온 최강의 존재에게 인내는 어려웠고, 결국 답답함에서 비롯된 분노를 참아내지 못했다.
드래곤의 입에서 지옥불과 같은 브레스가 쏟아져 나왔다.
화르륵.
일전에 봤던 드레이크의 브레스는 드래곤 브레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조금 과장하면, 드레이크의 것은 작은 불씨정도로 여겨질 정도였다.
드래곤 브레스가 불길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울창하던 수풀은 한순간에 재로 변해 흩날렸고, 그 안에 살아가던 생명체들은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했다.
거멓게 그을린 땅만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땅조차 녹아내려 흐물흐물 댔다.
확실히 1급 몬스터들 중에서도 상위로 손꼽히는 몬스터다운 파괴력이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했다.
일단 브레스는 그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상대에게는 큰 효과가 없었다.
우연인지, 놈의 본능적인 감각 덕분인지, 브레스는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쏟아졌다.
나를 중심으로 일대를 휩쓸고 갔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멀쩡했다.
뜨거운 불길에 화경에 오르면서 한서불침의 경지를 이룬 내가 땀을 흘리긴 했지만 딱 그 뿐이었다.
주변 환경을 한순간에 한줌 재로 바꿔버린 힘이었지만 내 호신강기를 뚫어내진 못했다.
뿐만 아니라, 브레스의 붉은 불길은 드래곤 자신의 시야까지도 방해했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붉은 빛 속에 유일하게 남아 걸음을 내딛은 나는 드래곤의 머리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검과 함께.
서걱.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을 두른, 수백 년을 살아온 거목보다 두꺼운 드래곤의 목이 과도로 사과를 자르듯 잘려나갔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브레스가 만들어낸 광경을 바라보던 드래곤의 얼굴에 불신이 어린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검게 변한 땅이 아닌, 자신의 몸이 새겨졌다.
그리고 드래곤의 시야에 비춘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그게 드래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쿠웅!
드래곤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내렸다.
그 크기와 무게로 인해 운석이 떨어진 듯, 땅이 패여 나갔다.
몇 배는 더 거대한 육체도 통제를 잃고 비틀거렸다.
탁.
내가 땅에 내려서는 순간, 드래곤의 육체가 만들어낸 굉음이 던전을 울렸다.
***
나는 드래곤의 몸을 파내 드래곤 하트라 불리는 놈의 심장과 마나석을 꺼냈다.
몸이 워낙 거대한 탓에 드래곤을 죽이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몇 번의 칼질로 피부를 가르고, 살을 파내고.
수 미터를 뚫고 내려간 끝에 단전 부위에 있던 마나석에 닿을 수 있었다.
그 작업을 가슴부분에서 한 번 더 반복한 뒤에 드래곤 하트를 손에 쥐었다.
S급 마나석과 드래곤 하트.
각기 백억은 우습게 넘는 보물들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것들이다.
특히, 드래곤 하트는 모든 던전을 통틀어 얻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뛰어난 천고의 영약.
내가 드래곤의 심장을 노리지 않고, 머리를 잘라낸 이유였다.
아쉽지만 내가 섭취할 수는 없었다.
이미 수 개의 영약을 섭취하며 이갑자가 넘는 내공을 보유한 나는 더 이상 영약의 효과를 볼 수 없다.
어쩌면 수년 정도의 내공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드래곤 하트에 담긴 기운은 일갑자 이상이다.
고작 몇 년의 내공을 얻기 위해 섭취하기에는 낭비될 기운이 아까웠다.
드래곤 하트와 마나석을 챙긴 나는 사체도 통째로 챙겼다.
드래곤의 사체 또한 버릴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귀한 재료들이었다.
단단한 비늘은 방어구로 만드는 최고의 재료였고, 피 또한 포션의 재료로서 가치가 높았다.
힘줄은 웬만한 검으로도 잘라낼 수 없을 정도로 질겨 궁수의 활줄로 인기가 많았고, 고기 또한 미식가들 사이에서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다.
수십 미터 크기에 수십 톤이나 나가는 사체지만 던전 핵을 부순 후, 손에만 쥐고 있으면, 함께 옮겨지기 때문에 운반이 어렵진 않았다.
C급 이하의 던전에서는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의 몬스터가 튀어나오기 때문에 짐꾼들이 따라다니며 몬스터들을 잡는 족족 해체하는 식이다.
하지만 상위 등급의 던전을 공략할 때는 위험성으로 인해 짐꾼들을 데리고 다니기 어렵기도 하고, 몬스터들의 개체 수는 적고, 크기는 큰 탓에 이렇게 사체를 통째로 옮기곤 했다.
물론 다른 공략팀의 경우에는 수십 명이 각기 한 마리씩 최대한 많은 사체를 챙기지만 나는 혼자뿐이기에 와이번이나 드레이크 등의 사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하나가 수억을 호가하는 사체들이었지만 크게 아깝지는 않았다.
이미 내가 챙긴 것만 해도 수백 억에 달했다.
***
드래곤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온 나를 팀원들과 형, 그리고 박동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갈 때부터 걱정을 놓지 못하더니, 그들 뒤에는 몇 개의 텐트가 쳐져 있고, 모닥불까지 피워져 있었다.
“무사하셨...허억!”
“...드래곤...”
나를 맞이하던 이들은 제대로 인사를 하기도 전에 나와 함께 딸려 나온 엄청난 크기의 드래곤 시체에 경악했다.
쉽게 볼 수 있는 몬스터도 아니고, A급 헌터 수십 명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겨우 공략이 가능한 드래곤이다.
그런 몬스터를 혼자 잡고 돌아왔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해체반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예...예. 알겠습니다.”
내 부탁에 박동석은 아직 놀람이 가시지 않았는지, 말을 더듬었다.
어찌됐건, 전문적인 몬스터 해체반의 경우, 대부분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협회 측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공략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이내 협회창 김원철의 비서 유인원과 함께 협회 측에서 보내온 열 대의 트럭과 함께 수십의 인부들이 도착했다.
과연 전문 인력의 손길은 달랐다.
꼬리부터 시작해 순식간에 부위별로 십 등분 된 드래곤의 사체가 열 대의 트럭에 나뉘어 차곡차곡 실렸다.
십 등분 됐어도 애초에 수십 톤이나 나가는 드래곤이다보니, 무게가 상당할 텐데도 인부들은 익숙한 듯, 각종 장비의 도움을 받아 손쉽게 처리했다.
“대금은 매각되는 대로 김태빈 헌터님의 계좌로 입금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드래곤 사체가 희귀하고 값어치 있다고는 해도 기껏해야 수십 억 정도다.
이미 나에게 특별한 조건 없이 쏟아 부운 돈만 수백억인 협회가 그 정도 대금을 가지고 장난질을 칠 염려는 없었다.
물론 협회의 지원이 실제로 아무런 대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협회는 나로 인해 상당한 이득을 얻었다.
일단 이상 현상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 덕분에 한국 헌터 협회가 세계에 가지게 된 영향력은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이를 통해 협회가 각국에 얻어낸 것들만 해도 족히 1조에 가깝다는 기사를 얼핏 본적이 있다.
또한 혈귀를 처치한 것도 결코 가벼이 넘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SS급 헌터에 준하는 고수를 죽이는 일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한국은 혈귀 한 명의 손에 수백 수천 명이 죽어나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가락만 빨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S급 헌터가 한 명 늘었다.
그래봐야 넷으로, 중국은커녕, 일본에도 못 미치는 수지만 김원철은 나에게 S급 이상을 보고 있으니, 수백 억 정도는 용돈 수준의 투자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탑재가 마무리되고, 유인원이 물어왔다.
S급 헌터의 행보는 협회와 길드 모두 주목하는 사안이다.
하물며 태빈은 협회와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긴 하지만 소속은 명확하지 않다.
계속해서 일인 군단으로 A급 헌터를 공략해나갈지, 아니면 새로운 행보를 보일지,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