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화. 깨달음.
“구할 이상의 확률로 무영살이 맞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영살...정말 놈이란 말이냐...”
다시 묻고 있었지만 사실 여문휘는 제갈민의 추론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제갈민이 구 할의 확률이라 함은 확신하고 있다는 말과 진배없다.
예로부터 머리를 쓰는 자들은 만약 일이 잘못됐을 때,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생각과 말을 달리하는 족속들이었으니까.
“그렇습니다.
사마휘와 왕추, 두 명의 초절정 고수가 연계한 암습은 SS급 헌터라 해도 막아내기가 쉽지 않고, 혈귀 또한 미친놈이긴 하지만 그 경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문주님을 제외하면, 이 세계에서 그들을 죽일 수 있는 무인의 수는 많이 쳐줘야 셋이 채 되지 않을 겁니다.
권왕과 가나의 나젤린, 그리고 암습이 아닌 상황에서라면, 아마 독괴 정도까지가 전부겠죠.
그럼에도 그들은 김태빈이라는 자에게 역으로 당했습니다.
저희 살막이 별호는커녕 무공조차 알아내지 못한 존재에게 말입니다.
해서 암영대에게 그들의 시신에 조사를 맡겼습니다.
그 결과, 시체를 회수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협회의 허술함 덕분에 살펴볼 기회는 있었습니다.”
제갈민이 사진 몇 장을 꺼내들었다.
사마휘와 왕추, 그리고 혈귀의 시신이 찍혀있는 사진들이었다.
제갈민이 이미 조사를 끝마친 상태였지만 절정의 고수와 화경의 고수의 시선은 다르다.
무언가 더 알아낼 수도 있었다.
“...살수군.”
한참이나 사진이 뚫어져라 바라보던 여문휘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상처를 보면, 어떠한 무공에 당했는지 알 수 있다.
일부러 헤집어 놓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세 구의 시신은 심장이 꿰뚫리고, 목이 잘린 정도였기에 알아보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무영살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만큼, 드러난 것이 적어 무공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시신에 남아있는 상흔으로 보아 자신과 살수의 기예를 익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예. 사마휘와 왕추에 이어 혈귀까지.
그들을 죽일 자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살수의 기예를 익힌 자는 단연코 없습니다.”
“그래서 무영살의 짓이라고 확신하는 건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혈귀와 권왕, 그리고 문주님까지... 이 세계에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깨어난 화경의 고수 셋 모두 무영살의 손에 죽임을 당한 분들입니다.
초절정의 혈검과 마랑, 독괴 등 또한 마찬가지고요.
최소한 저희가 파악하고 있는 한에서 다른 시대의 무인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일 수 있는 동시대의 살수라면, 딱 한 명뿐이죠.”
구 할이라 말하던 제갈민이 어느새 확신에 찬 어조로 열변을 토해냈다.
“놈이 지금 한국에 있다고 했나.”
더 이상 물을 건 없었다.
여문휘는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향할 듯했다.
“문주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군사는 지금 내가 참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 세계에서 깨어난 지, 5년.
자신을 죽인 무영살에 대한 분노는 지난 5년 동안 티끌만큼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당장에 세상을 찢어 발겨야 풀어질 것만 같은 분노가 솟구쳤다.
길지 않은 설명을 듣기 위해 이렇게 앉아있던 것만 해도 여문휘로서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당장 무영살을 쳐 죽이고 싶은 여문휘의 마음을 어찌 모를까.
그러나 제갈민의 머리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5년간 이뤄놓았던 대계가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
고작 무영살 하나에 신경을 쏟을 때가 아니었다.
“5년을 기다리셨습니다. 물론 놈이 지구에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이제는 알고 있으니,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상대입니다. 그보다는 지난 5년 간 쌓아온 대계를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으음...한 달. 한 달이다. 그 뒤에는 내 직접 놈의 목을 치러 갈 것이다. 이만 물러가라.”
여문휘는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분노에 제갈민을 향해 내쫓듯 손을 휘저었다.
솟구친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탓에 있는 그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알겠습니다.”
‘대계가 더 중하거늘...’
제갈민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한 달은 한 참이나 부족한 시간이지만 여문휘의 분노 생각하면, 당장 한국으로 뛰쳐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사실 제갈민은 여문휘와 달리, 죽음에 대한 분노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에게 죽음으로서 이 세계에서 새로운 육체를 얻었고, 그 결과, 무림의 살막으로서는 꿈꾸기 어려웠던 세계일통을 노려볼 수 있게 됐으니까.
5년 전,
지금의 살막이 이 세계에 이토록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대부분이 같은 장소에서 새로운 삶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여문휘를 비롯한 칠십 가량의 무인들은 중국의 도심 한 가운데에서 깨어났다. 본래 육체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자의식을 밀어낸 채로.
한 번의 죽음 뒤에 깨어난 여문휘는 무영살을 부르짖으며 지금과 같이 분노에 떨었다.
그 여파로 주위에 있던 수십이 칠공에 피를 쏟으며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여문휘의 분노 덕분에 살막의 무인들은 다시 한데 모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같은 장소에서 깨어났다 해도 무림과는 다른 도심 한복판이었다.
여문휘의 외침이 없었다면, 새로운 세계가 주는 극도의 혼란 속에서 모른 체 스쳐지나갔을 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렇게 모인 살막은 여문휘를 중심으로 제갈민의 머리를 더해 빠르게 성장했고, 이제는 세계일통을 목전에 둘만큼,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제갈민으로서는 과거 살막의 군사도 나쁘지 않았지만 장차 전 세계를 호령할 지금 살막의 군자 자리가 더 기꺼웠다.
***
나는 타의에 의해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이 주어졌음을 알지 못한 채,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번 혈귀와의 싸움에서 느꼈다.
살수의 삶을 버렸으면서 무인의 길을 포기하지 못한 지금의 나는 과거에 미치지 못했다.
혈귀가 화경의 경지라는 사실에 정면 대결을 포기한 것부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내가 스스로를 진정 화경의 무인이라 생각했다면, 혈귀와의 정면 대결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외면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스스로를 무인이라 여기지 못하고, 여전히 살수라는 전생의 굴레에 갇혀있었다.
“하아...”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혈귀와의 싸움 뒤에 이러한 고민에 빠져있던 나를 보며 박동석이 물어왔다.
무공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태빈에게서 지독한 번뇌가 묻어 나왔다.
“박동석 헌터는 살수와 무인의 차이 점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나는 박동석을 바라봤다.
타이탄이라는 세계의 황실 기사단장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오히려 무림을 동경하는 남자.
이어진 그의 대답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뭐. 무림인이 의뢰 받고 사람 죽이면, 살수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
“살수건, 무인이건, 어차피 다 무림인이 아닙니까?”
“아...”
별 생각 없이 한 대답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큰 깨달음이었다.
왜 살수와 무인을 나누어 생각했을까.
살수는 의뢰를 받아 대신 살인을 행해주는 자들이다.
그저 더 손쉬운 살행을 위해 살공을 익혔을 뿐이다.
그러나 살공을 익힌 모든 무인이 살수는 아니다.
무공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살수의 삶을 원치 않는다 해서 살공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그저 무인인 내가 익힌 무공이 살공일 뿐이다.
나는 녹슬었던 살수의 기예를 다시 갈고닦고자 했다.
***
나는 곧장 던전으로 향했다.
버리고자 했기에 녹슬었던 살공을 갈고 닦을 필요가 있었다.
홀로 A급 던전을 공략하겠다는 말에 김원철 등이 대경실색하며 만류했지만 내 의지는 확고했다.
‘오우거가 셋.’
A급 던전에서 오우거는 최상위 포식자가 아닌, 피식자의 위치였다.
B급 던전에서는 평화롭게 나무를 부수며 놀던 오우거들이 지금은 겁이라도 먹은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그렇게 잔뜩 경계하고 있음에도 놈들은 코앞에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푹. 서걱.
한 번의 찌르기와 한 번의 휘두름.
세 마리의 오우거를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선두의 오우거의 심장을 꿰뚫어내며 내 손을 떠난 검이 중간 놈의 심장을 관통한 뒤, 회전하며 마지막 놈의 머리까지 베어냈다.
세 마리의 오우거를 한 호흡도 채 되지 않을 순간에 죽음을 맞이했다.
완벽한 암습부터 이기어검술의 묘까지 이어진 결과였다.
‘아직.’
부족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계였지만 마지막 놈이 자신의 죽음을 눈치 채고 눈을 부릅떴다.
고작 절정 급의 힘을 가지고도 힘에만 기댄 무식한 몬스터를 상대로 화경의 고수가 행한 암습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놈들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마나석만을 챙긴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우거의 가죽과 힘줄 등은 제법 고가에 거래되지만 지금 나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그렇게 몇날며칠을 던전 안에 머무르며 녹슬었던 기예를 갈고 닦았다.
그 사이, 오우거를 시작으로 하늘의 제왕이라는 와이번과 박동석과 함께 잡았던 드레이크 등, 내 손에 죽어간 몬스터의 수는 백을 훌쩍 넘어섰다.
처음에는 자잘한 실수들이 발생하곤 했지만 이제는 오우거를 비롯한 3급 몬스터는 자신의 죽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2급 몬스터들은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간신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워졌다.
죽음을 인지하는 것도 생명력이 질겨 심장이 터지고, 머리가 잘려도 수 초 정도 생명을 더 이어갈 수 있는 몬스터들에 한해서였다.
그렇게 백 마리가 넘는 몬스터들을 죽인 나는 던전의 보스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드래곤.’
던전 보스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선 순간부터 드래곤의 기세가 던전 전역에 미치고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드래곤의 아류인 하늘의 와이번과 지상의 드레이크가 유독 많았던 던전이다.
던전 보스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날개 달린 도마뱀 같군.’
던전의 드래곤은 판타지 세계에서 표현하는 드래곤과는 조금 달랐다.
마법을 쓰고 지능을 갖춘 준신 급의 존재가 아니다.
와이번과 드레이크의 합쳐 놓은 모습에, 몇 배나 강한 힘으로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최상위 몬스터일 뿐이었다.
이성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몬스터.
쿠오오오!!
내가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순간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놈의 포효가 들려왔다.
일대의 패자로 손색이 없는 2급 몬스터들이 겁에 질려 바닥에 머리를 처박을 정도로 강한 힘이 실려 있는 포효였다.
그러나 그 포효 안에 담긴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놈은 존재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영역에서 먹잇감들을 학살하고 있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