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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67화 (67/150)

# 67

67화. 혈귀(5).

퓨슈숙,

목이 떨어져 내린 자리에서 솟구친 핏물이 방안 가득 빗발쳤다.

화경의 고수로, 과거 무림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현세에까지 그 악행을 이어온 혈귀치고는 편안하고도 허무한 죽음이었지만 자신이 그토록 탐하던 피를 쏟아내는 몸뚱이를 보니, 혈귀, 그 이름에 걸맞은 죽음이라 생각됐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결과적으로 살행에 성공하긴 했지만 첫 기습에 놈을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확실히 살수로서 무뎌졌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고, 혈귀가 의식하지 않아도 항시 운용되는 호신강기라고는 하지만 파악하지 못한 것은 내 실수였다.

화경의 경지는 되어야 뚫어낼 수 있는 수준의 호신강기다.

만약 내가 화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면, 아니 기습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역으로 당했을 수도 있었다.

나로서는 운이 좋았고, 혈귀로서는 운이 나빴다.

나는 때마침 화경의 경지에 올랐고, 혈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신의 호신강기를 뚫고, 목숨을 빼앗을 정도의 고수를 만난 셈이니 말이다.

“끄으윽...”

모든 것을 지켜본 유재신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살아있음에 기뻐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만 살아난 것에 죄스러워 하는 건지...

그 구슬플 울음소리가 피로 물든 방안을 투명하게 적셨다.

‘후,,,’

나는 울다 정신을 잃은 유재신을 들쳐 멨다.

급히 치유를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나중에 조사를 하다보면, 사망 시각을 추정할 텐데, 이대로 놓고 갔다가 그가 살아있음을 알고도 외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그를 놓고 감에 따라 발생할 귀찮음을 생각하면, 이 정도 수고로움은 감수할 만 했다.

사실 연락을 취해 급히 사람을 부르는 편이 좋긴 하겠지만 혹시나 작은 소리라도 발생할까, 일체의 통신기기도 들고 오지 않은 탓이다.

내가 챙긴 것은 혈귀을 목을 딸, 검과 만일을 대비한 단도, 그리고 몇 자루의 비수 등의 무기뿐이었다.

***

내가 유재신을 들쳐 메고 돌아왔을 때,

박동석은 초조한 얼굴로 주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득. 까득.

진 경계 바로 앞까지 나와 손톱을 물어뜯는 모습은 그가 상당히 고민스러워 하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김태빈 헌터!”

이내 나를 발견한 박동석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내가 돌아왔음은 혈귀의 암살을 성공적으로 끝마쳤음을 의미했고, 이는 박동석이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다.

“누... 누구?”

“유재신 헌터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진을 뛰쳐나온 박동석의 시선이 내 어깨로 향했다.

박동석은 내가 메고 있는 유재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유재신의 얼굴은 심적 고생과 고문으로 상당히 피폐해진 상태였다.

다행히 이목구비가 잘려나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 눈에 알아볼 만큼, 멀쩡하지도 않았다.

못 알아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살아있었군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기쁨에 소리치던 박동석의 목소리가 빠르게 잦아들었다.

내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기 때문이다.

박동석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렇군요...”

박동석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유재신 한 명이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다.

다른 이들까지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일단 협회에 소식을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유재신 헌터의 치료도 시급한 상황이니.”

“아. 알겠습니다.”

내 말에 박동석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지금은 마냥 슬픔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

박동석의 연락에 김원철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얼마나 급히 왔는지 A급 헌터인 김원철이 숨을 헐떡일 정도였다.

“혈귀를 처리했다고 들었습니다.”

김원철은 호흡도 채 고르지 않고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자 했다.

“예. 놈의 시체는 주택 안에 있습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는 주택에 그대로 버려두었다.

목이 잘리긴 했지만 얼굴이 망가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니, 알아보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유인원 헌터. 확인 부탁하네.”

김원철은 곧바로 유인원을 보내 확인하도록 했다.

자신이 직접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협회장으로서 혈귀의 시신보다 유재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출혈이 심해 위험하긴 했지만 다행히 위급한 순간은 넘겼습니다.”

유재신은 유일한 생존자임과 동시에 A급 헌터다.

김원철은 귀중한 재원인 A급 헌터가 위급하다는 말에 의사들뿐만 아니라, 두 명의 치유사까지 대동해왔다.

그러한 노력 덕분인지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던 유재신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오른팔도 며칠만 재활을 거치고 나면, 원래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치유사들은 근육이 완전히 파열돼, 앞으로 숟가락조차 들지 못했을 오른 팔까지 완전히 치료해냈다.

치유사들이 왜 S급 헌터들만큼이나 귀한 대우를 받는지 보여주는 능력이었다.

“다행이군. 다들 고생했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상당히 지쳐 보이는 의사들과 치유사들이었다.

김원철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유재신의 생존을 기뻐하면서도 씁쓸함이 묻어나오는 미소였다.

이번 일로 협회는 넷이나 되는 A급 헌터를 잃었다.

다섯이 될 수도 있었는데, 한 명이라도 목숨을 건졌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 달갑기만 할 리는 없었다.

이후,

먼저 주택으로 향했던 유인원에게서 다수의 시신이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김원철의 요청에 따라, 사건의 당사자로서 현장 설명을 위해 다시 주택에 가게 됐다.

“혈귀가 맞군요.”

김원철은 다른 시신들을 확인하기에 앞서 혈귀의 시체를 먼저 살폈다.

혈귀가 자신을 숨기지 않은 덕분에 CCTV등에서 이미 그의 얼굴이 드러난 터라, 확인이 어렵지는 않았다.

“조심히 옮기도록.”

확인을 마친 혈귀의 시체는 곧바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일전에 문환 등의 시체를 처리한 것과 같이 실험실로 향하는 듯했다.

S급 이상 가는 헌터의 시체인 만큼, 범죄자임에도 극도로 조심스럽게 다뤄졌다. 시체 하나에 세 명이나 달라붙었다.

당연한 일이다.

다시는 구하지 못할 지도 모르는 귀중한 실험 재료를 함부로 다룰 리는 없었다.

“크음...”

이어 다른 시신들을 확인한 김원철의 입에서 깊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시신의 상태는 하나같이 온전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

감시조원들 것까지, 열 구가 넘는 시신이 방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는데, 겉으로 봐서는 신원은커녕 성별의 구분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감식반 불러서 희생자들 신원 확인하도록 하게.”

목불인견의 참상에 잠시 말을 잃었던 김원철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

대한민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혈귀가 죽은지도 삼일.

주택에서 발견된 희생자들 전원 신원이 확인됐고,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계됐다.

안타깝게도 멀쩡한 모습으로 가족 품에 돌아간 시신은 없었다.

가능하면 멀쩡한 상태로 돌려보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하나같이 상태가 안 좋았다.

가족들조차 감식 결과를 말해주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총 스물네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혈귀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그리고,

살막에도 혈귀의 죽음이 전해졌다.

“뭐?! 혈귀가 당했다는 말이 사실이냐?!”

여문휘의 미간이 좁혀졌다.

혈귀는 화경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에 준하는 고수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혈강기는 같은 경지 이상의 고수가 아니면, 결코 뚫어낼 수 없다.

그러한 혈귀가 죽었다는 것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예. 저 또한 믿기지 않지만 재차 확인해 본 바, 사실이었습니다.”

“허. 한국의 헌터들이 천라지망을 펼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이 되질 않다. 고작 이 세계의 무인들 따위가.”

제갈민의 대답에 여문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천라지망에 당했다 해도 이 세계 무인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몸을 빼내지 못했다는 것조차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이어진 제갈민의 얘기는 여문휘를 경악케 만들었다.

“오해하고 계신 듯한데, 혈귀를 죽인 것은 단 한 명이었습니다.”

“한 명?! 대체 누가 혈귀를 단신으로 죽일 수 있단 말이냐?! 군사가 지금 내게 농담을 하는 건가?!”

여문휘가 노성을 터트렸다.

분명 이 세계의 헌터라는 자들 중에도 화경에 준하는 고수들이 존재하긴 한다. 그러나 그 수는 수십 억 중에 단 세 명으로 한국에는 그러한 헌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갈민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국에 살막의 암영대가 파악하지 못한 고수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이는 혈귀의 죽음보다 심각한 문제다.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수 년 간 준비해온 살막의 정보가 부정확하다는 의미였으니.

“문주님도 아시는 자입니다.”

여문휘가 분노하는 것과 달리, 제갈민은 덤덤했다.

무릇 군사란 사소한 일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혈귀 정도의 고수를 잃은 일이 사소할까 싶긴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이에 마음 쓰기보다는 대비에 힘씀이 옳았다.

“석 달 전쯤에 포섭하려 했던 자를 기억하십니까?”

“석달 전이라... 아. 사마휘와 왕추가 실패한. 그 자는 군사가 초절정이 한계라 하지 않았나.”

여문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으니, 암영대의 보고를 보고 추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 조사치 못한 암영대원은 합당한 벌을 내렸으니, 노여움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날카로운 시선에 주눅들만도 하건만, 제갈민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제할 말을 다했다.

“계속하라.”

여문위가 눈빛을 풀었다.

그 또한 혈귀의 죽음이라는 중요한 사건을 앞에 두고 이러한 일로 군사를 질책할 생각은 없었다.

“혈귀를 해한 자는 김태빈이란 자로, 화경의 고수임이 확인됐습니다.”

“화경의 고수라. 과거의 이름은 알아냈나?”

이 세계에 새로이 깨어난 무인들은 하나같이 동시대의 인물들이다.

화경의 고수라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김태빈이라는 이름 외에는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있는 탓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몇 가지 사실을 토대로 추론해본 바... 김태빈은... 무영살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내 덤덤함을 유지하던 제갈민도 이번만큼은 여문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무영살은 전생에 여문휘를 죽였던 살수다.

사실 당시에는 무영살이라는 별호보다는 살왕이라는 별호로 더 유명했다.

하지만 모든 살수들의 정점임을 자신하는 여문휘 앞에서 살왕이라는 별호로 그를 거론할 수는 없었다.

콰직!

“그 말이 사실인가?!!”

여문휘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가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몇몇 파편이 제갈민에게까지 튀었지만 그는 어떠한 불만도 내비치지 않았다.

제갈민 또한 무영살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무영살과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었고, 그 또한 여문휘만큼의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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