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66화. 혈귀(4).
감았던 눈을 떴다.
단순히 잠을 잔 것이 아니라 운기를 겸했다.
대주천을 마친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박동석 헌터.”
박동석은 시킨 대로 혈귀의 주택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노려보듯 부릅뜨고 지켜보는 게,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예.”
나를 보는 박동석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이면, 놈의 시체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때문이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는 내색하지 않았다.
가슴 한 편에 억지로 밀어 넣은 채, 동료와 무고한 희생자들의 복수를 바랐다.
“그럼.”
나는 긴말 하지 않았다.
필요한 건 행동이었고, 나는 혈귀를 죽일 준비가 되었다.
“무운을 빕니다.”
박동석 또한 말이 아닌, 눈빛에 바람을 담아 짧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이미 수차례 잠입에 성공했던 주택이다.
이제는 굳이 보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듯 훤했다.
혈귀의 동향 또한.
‘지금쯤이면.’
막 고문이 절정에 달할 때였다.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한 시간.
대상이 버티는 시간에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아무리 정신이 견고하다 해도 출혈에 따른 죽음은 막을 수 없다.
하물며 혈귀의 손길은 무척 세밀했다.
매번 고문 도구와 방법이 바뀌는데도 출혈량은 거의 일정했고, 대상이 죽는 시간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기껏해야 5분 남짓.
혈귀의 고문은 단순히 피를 보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대상의 생사를 관장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경지에 오른 기술이었다.
“크크크.”
예상대로 혈귀는 피를 탐닉하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취향만큼이나 익숙해 질 수 없는 괴기한 웃음소리였다.
몇 번을 들었음에도 기분이 나빠 감정이 흔들릴 정도였다.
혈귀가 피에 미쳐있는 지금이 그가 가장 무방비한 순간이다.
눈이 완전히 뒤집어진 채로 가학을 즐기고 있는 모습만 봐도 확실히 제정신이라 하기는 어려웠다.
저 정도로 미친놈이 어떻게 화경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었는지, 절로 의문이 생길 정도다.
어쩌면 경지를 이루는 과정에서 주화입마에 빠져 진짜로 미쳐버렸나 싶기도 했다.
“끄윽...”
그런 혈귀의 앞에는 끝나지 않는 고통에 반쯤 정신을 놓아버린 유재신이 보였다.
도구가 닿을 때마다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신음과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이 그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혈귀는 지난 사흘 동안 세 명을 죽였고, 유재신은 다섯이었던 감시조원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나는 유재신을 제외한 감시조원들의 죽음을 모두 지켜봤다.
안타까운 마음은 없었다.
그저 혈귀를 살피는데, 그들이 있었을 뿐이다.
새로운 삶을 살면서 굳이 감정을 억누르려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감정은 살수인 내게 불필요한 것에 불과했다.
어쨌든,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다니. 운이 좋은 편이다.
흘린 피가 적지 않긴 하지만 내가 제때 혈귀를 죽이기만 한다면, 살 가능성이 있었다.
스윽.
나는 유재신에게서 눈을 떼고 혈귀의 등 뒤로 몸을 옮겼다.
내 손은 품속에 숨겨진 잘 벼려진 검에 닿았고, 곧장 혈귀의 심장을 찔러 들어갔다.
망설일 것은 없었다.
지난 삼일 간 지켜본 바, 혈귀는 과거에 부상을 입고 쫓기던 때와는 달랐다.
자만과 오만.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부주의했다.
이 세계에는 그를 위협할만한 고수가 몇 존재하지 않고, 경계해야할 만한 헌터의 수도 적기 때문이다.
상대가 화경의 고수라는 이유로 몇 번이고 찾아온 기회를 흘려보낸 게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유재신의 몸에 막 새로운 도구를 들이밀던 혈귀는 갑자기 이뤄진 암습에 어떠한 대비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콰직.
‘호신(護身)갑을 입고 있었나.’
놈의 몸에 닿는 순간,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의아했지만 전력을 다한 내 검은 놈의 호신갑을 가벼이 깨트리며 살갗을 파고들었다.
혈귀가 뒤늦게 자신의 손에 들린 도구를 휘둘러 댔지만 내가 한 발 더 빨랐다.
“커억...”
혈귀가 피를 토해냈다.
심장어림에 생겨난 구멍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재빨리 지혈을 하긴 했지만 피를 완전히 멈추지는 못했다.
딱 봐도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할 만큼, 위중한 상처였다.
“크크. 혈(血)강기를 뚫어내다니. 재미있는 놈이 왔구나.”
피에 미친 귀신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혈귀는 자신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도 웃음을 터트렸다.
치명상을 입긴 했지만 자신이 당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혈강기라... 그 때문이었나?”
무언가 걸리는 느낌으로 인해 놈의 가슴을 완전히 꿰뚫지 못했다.
몬스터의 부산물로 만든 호신갑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호신강기의 일종이었다.
과연,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펼쳐지는 호신강기라면, 혈귀가 그토록 무방비했던 것도 이해가 됐다.
자신의 호신강기를 뚫어낼 정도의 고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몇 있다는 것은 알아도, 한국에는 없다 여겼을 것이다.
초절정 고수나 S급 헌터가 뚫어낼 수 있는 호신 강기였다면, 혈귀가 저리 말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네 놈이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재차 검을 휘둘렀다.
부상을 입을 상대로 굳이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혈귀의 말에 나는 잠시 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문휘가 말한 놈이 네 놈이었구나. 한국에 과거가 불분명한 살수하나가 숨어있다더니. 네 놈이었구나! 무영살(無影殺)!”
혈귀의 입에서 살막주 여문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나에 대한 이야기까지. 확실히 혈귀를 죽일 당시의 내 별호는 아직 살왕이 아닌, 무영살일 때였다.
마지막에는 단순히 떠보는 듯했지만 그냥 무시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단지 혈귀만의 추측인지, 아니면, 살막에서도 내 정체를 알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무슨 얘기지?”
“여문휘가 그러더군... 나머지는 염라대왕에게 물어 보거라!”
잠시 말을 끌던 혈귀가 갑작스레 몸을 날려 달려들었다.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혈귀는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혈강기가 깨진 순간, 내기로 심장을 보호하긴 했지만 기습이 워낙 창졸간에 이뤄진 탓에 방비가 완벽하지 못했다.
간신히 심장이 꿰뚫리는 것은 면했지만 그로 인한 부상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출혈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내상이 심각했다.
당장 정양을 하더라도 완전히 회복하는데, 한 달은 걸릴 만큼, 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래도 혈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여문휘가 말한 살수는 초절정.
드러난 살수가 본신의 능력에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부상을 입었다 해도 단숨에 죽이지 못할 리는 없었고, 놈을 처리한 뒤에 부상을 치료해도 늦지 않았다.
챙! 서걱.
혈귀의 기대와 달리, 그의 공격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혔다.
“추잡한 수작을 부리는 구나.”
나는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경계하고 있었다.
기습 같지도 않은 기습에 당할 리 없었다.
오히려 공격을 쳐내는 동시에 검을 꺾어 올려 반격까지 가했고, 실패를 전혀 염두 해두지 않았던 혈귀의 오른팔에는 깊은 검상이 생겨났다.
“크악! 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혈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단 한 번의 공방이었지만 눈앞의 살수는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로 인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 자신을 죽였던 무영살도, 여문휘가 말한 살수도 화경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이... 이 놈!”
내 비웃음에 혈귀가 분노에 몸을 떨며 노성을 터트렸고, 왼팔에선 피처럼 붉은 강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오른팔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데다, 첫 공방에서 상당한 손해를 본 탓인지, 섣불리 달려들지는 못했다.
나 또한 검을 들어 올려 방어를 굳건히 했을 뿐, 먼저 공격에 나서지는 않았다.
생각했던 대로 단숨에 숨통을 끊어 놓지는 못했지만 급한 건 내가 아닌 혈귀다.
지열이 되지 않은 가슴에선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내상으로 인해 안색도 점차 파리하게 질려갔다.
가만히 있어도 제풀에 지쳐 쓰러질 상대다. 굳이 혈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네 놈, 진정한 화경이 아니었군.”
혈귀와 대치하는 내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한 번의 공방으로 혈귀가 내 경지를 파악했듯, 나 또한 그의 경지를 읽어냈다.
직접 마주한 혈귀는 경계에 발을 걸치고 있을 뿐, 온전한 화경의 경지라 할 수 없었다.
과거의 경지를 찾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의 경지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이미 가벼워 보이지 않는 부상의 정도가 더 심해 본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었다.
이유가 어찌됐건, 중요한 사실은 놈이 화경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혈귀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표정과 달리, 불안하게 흔들리는 왼팔의 강기는 내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네 놈이 피를 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겠지.”
“네 놈이 어떻게...?!”
사실 지레짐작 한 것일 뿐인데, 혈귀가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며 확실해졌다.
피를 이용하는 무공이라.
무림에는 별의별 무공이 다 있는 만큼, 피를 이용해 경지를 드높이는 무공이 있다 해도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뭐 중요한 건 아니겠지. 그보다 혈귀, 네 놈도 살막으로 들어갔나?”
그보다는 조금 전, 혈귀의 말에 떠오른 의문을 확인하고 싶었다.
과거 혈귀는 살막주 여문휘와 접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놈은 여문휘에게 나에 대해 들었다 했다.
나를 영입하려 했던 살막이니 만큼, 혈귀가 살막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살막에 들어간 게 나뿐일 것 같나?”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다. 나뿐만 아니라, 권왕도, 혈검도 모두 살막과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오히려 내가 궁금하구나. 네 놈은 어째서 살막과 척을 지려 하는 거냐? 네 놈도 무림인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아니, 도대체 네 놈은 누구냐?”
내 물음에 혈귀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해보였다.
그러나 나는 혈귀를 이해시킬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 물음으로 더는 그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어졌다.
방금 전에는 그저 떠봤을 뿐, 놈은 내가 무영살임을 알지 못했다.
살막 역시 알지 못할 것이다.
“척이라... 먼저 시작한 것은 네 놈들이다.”
내가 검을 휘둘렀다.
혈귀 또한 모래를 뿌리듯 피를 뿌리며 달려들었다.
삼류 낭인도 쓰지 않을 비겁한 수였지만 생사를 다투는 싸움에서 상대의 비겁함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투투툭.
검이 회전하며 생겨난 검막에 핏방울들이 튕겨져 나갔다.
혈귀 또한 반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이미 깊은 내상과 오른팔에 검상까지 입은 혈귀는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서걱.
이어진 검격에 혈귀의 목이 너무나 쉽게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