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65화. 혈귀(3).
“저라도 돕겠습니다.”
상대가 화경의 고수라고는 하나, 동료들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두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뭐라도 하지 않으면,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무력감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놈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게 우선입니다. 일단 제가 살펴볼 테니, 여기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박동석을 만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언가 역할을 부여하지도 않았다.
초절정의 경지가 낮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하려는 것은 살행이다.
지금 박동석은 방해밖에 되지 않았다.
그를 떼어놓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분노와 무력감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지금, 그를 떼어 놓아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박동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은 여전했지만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간혹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모한 행동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다행이었다.
“기척을 감춰주는 진입니다.”
“진? 진법 말입니까?”
“예. 이 안에 있으면, 혈귀도 쉽게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내가 감시조의 실종을 확인하고, 돌멩이를 만지작거린 건 바로 진법을 설치하기 위해서였다.
일정 범위 내의 기척을 감쳐주는 효과가 있는 진이다.
물론 혈귀쯤 되는 고수의 눈을 속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약간의 눈속임을 해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박동석 헌터는 이곳에서 주택을 감시해주시기 바랍니다.”
혈귀가 머무는 주택까지의 거리는 1km 남짓.
가까운 거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S급 헌터가 살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
박동석을 진 안에 두고 나는 따로 움직였다.
일단은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밝은 태양 아래서도 나를 감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살수는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이나는 법이다. 같은 경지의 고수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세상을 밝히던 해가 점차 붉은 빛을 흩뿌리며 사라지고, 달만이 세상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혈귀가 있는 주택의 담을 넘었다.
CCTV라는 이세계의 경비가 있었지만 완전히 어둠 속에 녹아든 나에게는 방해물조차 되지 않았다.
담을 넘는 순간, 공기를 타고 느껴지는 혈향이 몇 배는 짙어졌고, 희미하게 신음과 비명 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처음 주택을 찾았을 때와는 다르게 안에서 몇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내 기감에 걸린 기척의 수는 여섯.
혈귀 외에도 다섯이 더 있었다. 다섯의 감시조원들인 듯했다.
그들이 사라진지 반나절 이상이 지났는데, 아직도 한 명도 죽지 않았다는 게 놀라웠다.
오늘 이미 한 명을 죽인 상태였기에 죽이지 않고 놔뒀는지도 몰랐다.
주택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창문 또한 닫혀있지 않았다. 덕분에 잠입은 생각 이상으로 수월했다.
집안에 들어서니, 그렇지 않아도 짙던 혈향이 확 풍겨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날것의 비릿함에 기분이 묘해졌다.
곳곳에 닦아내지 않은 검붉은 피가 말라 붙어 있는 게 보였다.
하긴 혈귀가 벽지에, 바닥에 피가 묻었다 하여 치울 리는 없었다.
“끄으... 끄으...”
어디선가 가냘픈 신음이 새어나왔다.
“크크크.”
그 뒤로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혈귀의 것이리라.
나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움직였다.
찾는 건 어렵지는 않았다.
깊은 저녁,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방은 하나뿐이었으니.
***
내가 찾은 방 안에는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한 사내가 갖가지 고문 도구로 다른 사내의 몸을 긁어대고 있었다.
그 중, 고문을 하는 사내는 내가 기억하는 혈귀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곧 죽겠군.’
고문을 당하는 사내의 눈에는 생기를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삶에 대해 의지를 잃은 눈이다.
흘린 피의 양으로 봐도 살 가망은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방안에 있는 것은 둘 뿐이었다.
붙잡혀 있을 감시조원이나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군.’
혈귀의 손에 들린 도구가 사내의 몸을 파고 들 때마다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이미 상당한 양의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는 상태였다.
다른 누군가가 흘린 것으로 보이는 말라붙은 피와 이미 흘러내린 피 위로 또 다시 새로운 피가 흘렀다.
혈귀는 그렇게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괴상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 또한 적지 않게 사람을 죽였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었다.
“크크크...”
혈귀는 내 존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주의를 기울여도 알아차리기 힘든 은잠술이다.
반쯤 눈이 풀린 채로 피를 탐닉하고 있는 혈귀가 알아차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상한 낌새라도 느꼈다면, 저리 무방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혈귀의 목덜미에 검을 꽃아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았음에도 당장 검을 꺼내들고 싶을 만큼, 혈귀는 무방비했다.
그러나 나는 욕심을 버리고 인내했다.
사실 과거의 내가 혈귀를 죽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부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당시의 나는 이제 막 화경의 경지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상태였고, 혈귀는 화경의 고수였다.
한 단계 위의 고수를 대상으로 하는 살행은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고, 완벽한 한 번의 기회를 위해 수개월 동안 그를 쫓아다닌 끝에 무림맹의 기습에 부상을 입은 그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의 진정한 힘을 알지 못했다.
방심하고 있다고는 하나,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살행에 있어서 한순간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풀썩.
혈귀에게 고통 받던 사내의 숨이 막 끊어지며 쓰러졌다.
그 순간, 혈귀의 표정이 한순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놀라울 정도의 변화였다.
깊이 내려앉은 눈 또한 그의 경지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은 둘이나 죽여 버렸네.”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혈귀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이제는 시체로 변한 사내를 끌고 방을 벗어났다.
나는 반쯤 꺼내든 검을 다시 품속에 넣고, 혈귀를 주시했다.
툭,
혈귀는 고문을 행하던 옆방에 시체를 대충 던져 놓았다.
방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시체는 한둘이 아니었다. 잠깐 사이에 눈에 들어온 것만 해도 다섯이 넘었다.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시체 대부분을 이 방안에 모아 놓은 듯했다.
“슬슬 한 번 정리해야겠군.”
혈귀가 시체들에서 풍겨오는 악취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거처에 시체가 쌓여 있는데도 발견된 시체들이 있는 것이 의아했는데, 아무래도 부패가 진행됨에 따라 처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막 죽은 시체를 옮긴 혈귀가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자신이 잡아온 사람들을 모아 놓은 방이었다.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다.’
총 네 명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유재신의 얼굴도 보였다.
방금 죽은 한 명을 포함해 모두 감시조원들인 듯했다.
살아있는 넷 모두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연신 굴려대고 있었지만 상태는 의외로 멀쩡했다. 점혈을 당했는지,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뿐,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흐음..”
넷을 이리저리 살피던 혈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까 말했듯, 이미 오늘 두 명이나 죽였기 때문인지, 더 피를 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마냥 미친놈 같다가도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으니, 혈귀는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여기까지 살핀 나는 조심스럽게 주택을 빠져나왔다.
***
박동석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눈에 깃든 분노로 박동석이 얌전히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잘 참아냈다.
그래도 조급함은 숨길 수 없었는지, 박동석은 내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진 밖으로 뛰쳐나왔다.
“일단은 놈의 존재만 확인했을 뿐입니다.”
나는 말을 아꼈다.
감시조원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박동석이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기다리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렇군요.”
다행히 박동석은 감시조원들의 생사를 묻지 않았다.
감시조원들이 살아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박동석은 혈귀가 사람을 살아있는 상태로 오랜 시간 고문하며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보통 하루에 한 명만 죽인다는 것도 모르니,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렇다면 언제 놈을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가 늘어날 겁니다. 이번 감시조원들까지 더하면, 스무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사실 당장에라도 혈귀를 죽이고자 한다면,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혈귀를 죽이고자 마음먹은 것만 해도 큰 결심이었다.
새로운 삶을 얻고, 잊으려 했던 살수의 삶이다.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꺼내 다시 살행에 나서면서까지 혈귀를 죽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혈귀가 십 수 명을 죽인 살인귀라고는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나선 이유는 혈귀가 과거의 나와 연관이 있기도 하고, 협회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받아들인 건 딱 여기까지다.
몇몇의 피해를 줄이고자 내가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박동석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더 이상 독촉하지는 않았다.
방금 전에도 그저 조금이라 빨리 놈을 죽여, 피해가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소리였다. 태빈이 위험에 처하는 것은 그 또한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
나는 낮에는 혈귀의 거처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고, 밤이면, 주택으로 스며들어가 놈을 주시했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덕분에 며칠 정도는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언제까지 지켜보기만 하실 겁니까?”
벌써 삼일 째, 망부석처럼 혈귀의 거처만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며 박동석이 답답함을 드러냈다.
아무리 태빈이 무리하거나 위험에 빠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답답한 일이었다.
태빈은 놈의 거처를 오가기라도 하지, 박동석은 열흘 내내 진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지금까지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일인지, 혈귀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사흘간 혈귀는 방안에 처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미리 잡아 둔 네 명의 감시조원들 때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박동석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늘 저녁. 놈을 죽일 겁니다.”
내가 말했다.
“그 전에 잠시 눈 좀 붙여야겠습니다.”
아무리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도,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좋았다.
삼일 간, 관찰한 결과 지금은 혈귀가 한창 피를 탐닉하고 있을 시간.
잠시 잠을 자기에는 더 없이 좋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