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64화. 혈귀(2).
“혈귀는 지금 이곳에 없는 것 같군요.”
혈귀의 거처라고 했지만 지금은 자리를 비웠는지, 안에서는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근을 타고 도는 혈향만이 이곳에 혈귀가 머물렀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예. 한 시간 전쯤에 자리를 비우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종종 이렇게 자리를 비우곤 하는데, 곧 다시 돌아올 겁니다.”
유재신이 설명을 덧붙였다.
현재 A급 헌터 다섯으로 이루어진 감시조가 혈귀에게 붙어있는 상태였다.
지금은 유재신을 제외한 네 명이 혈귀를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고.
혈귀는 이전에도 살해 대상을 고르기 위해 거처를 나서곤 했다.
“지금 혈귀가 돌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막 핸드폰을 확인한 유재신이 분노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당장이라도 혈귀에게 십 수 명을 살해한 것에 대한 죄 값을 물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밖으로 나간 혈귀가 돌아온다는 것은 새로운 대상과 함께라는 의미였기에, 그 대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결전을 준비해야 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 대답은 유재신의 기대에 반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혈귀가 맞다면, 상대는 화경의 고수.
정면대결에는 위험이 따르는 만큼,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놈의 거처와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 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째서 물러난다는 말입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박동석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껏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또한 느끼고 있는 분노가 적지 않았다.
“상대는 그저 미친 살인귀일 뿐입니다.”
어쩌면 전 세계에 세 명 뿐인 SS급 헌터 이상일지 모르는 화경의 고수, 태빈과 S급 헌터인 자신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당장 혈귀를 감시하고 있는 A급 헌터들이 다섯에 달하고, 그 이상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이상의 전력도 지원이 가능하다.
그에 반해, 그가 알고 있는 혈귀는 S급에 불과하다.
고작 살인귀 하나에 태빈이 물러나자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놈이 제가 아는 혈귀가 맞다면, 저로서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입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혈귀라는 별호가 흔한 것도 아니고, 살인 방식 또한 내가 아는 혈귀와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닮았다 표현한 것은 조금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혈귀는 좀 더 과감하고, 오만했다.
거처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만 해도 그랬다.
“그... 그게 무슨...!”
내 말에 당장이라도 무기를 꺼내들 것 같던 박동석의 몸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태빈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라니.
미친 살인귀 따위가 화경의 고수라도 된다는 말인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에 순간적으로 사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도심에서 싸움이 발생하면, 피해가 상당할 겁니다. 그렇다고 미리 대피를 시킨다면, 놈이 눈치 챌 가능성이 높으니.”
“그... 알겠습니다.”
이어진 내 말에 박동석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은 그로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직 혈귀가 태빈과 같은 경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 S급 헌터 정도만 되어도 아무런 소란 없이 사로잡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 와중에 건물이라도 하나 무너졌다가는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이는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이었다.
“그럼 저는 이곳에 남아 계속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재신의 임무는 혈귀의 감시다.
태빈과 박동석이 물러난다 하더라도 그의 임무에는 변함이 없었다.
“혈귀의 거처를 확인 했으니, 유재신 헌터를 비롯한 감시조는 철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간단한 준비를 후에 저희가 직접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절정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재신이 혈귀를 감시한다는 사실이 말이 안 된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혈귀가 알고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을 뿐이다.
놈이 마음을 바꾸기라도 한다면, 유재신 등은 한순간에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혈귀를 죽이기 위해선 직접 지켜보며 기회를 노려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감시는 필요치 않았다.
“저희도 위험하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500m 내로는 접근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는 것뿐이니, 괜찮습니다.”
“박동석 헌터.”
유재신도 상대가 S급 살인귀이니, 충분히 위험성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에게는 그들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박동석을 바라봤다.
“김태빈 헌터 말대로 하게.”
“음... 그러면, 두 분이 돌아오실 때까지만 저희가 감시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무슨 일이 발생할지는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유재신의 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라도 잠깐 사이에 놈이 거처를 옮기기라도 한다면, 추적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소모해야 할 테니 말이다.
***
“유재신 헌터?”
무기와 식량 등의 준비를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유재신은 자리에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A급 헌터도 피해자로 발견된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를 맡은 책임감 있는 헌터다.
아무런 보고도 없이 갑자기 자리를 비웠을 가능성은 낮았다.
게다가 곳곳에 남아있는 싸움의 흔적들.
유재신이 자의로 자리를 이탈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무래도...”
혈귀를 감시하고 있던 A급 헌터가 아무런 표식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만한 일은 하나뿐이었다.
“다른 감시조원들도 연락이 끊겼습니다.”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박동석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급히 연락을 취해보았지만 혈귀를 감시하던 다섯 명의 헌터,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유재신 뿐만 아니라 감시조 전원이 당한 것이다.
“그렇군요.”
나는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마 다섯 모두 혈귀에게 화를 입었을 것이다.
피를 보기 위한 고문을 즐기는 혈귀의 취향 상, 아직 죽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살 가능성은 없었다.
“구하러 가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박동석이 보기에 나는 표정만 안타까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사라진 그들에게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돌멩이를 이리저리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예.”
“시신을 확인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 경고했습니다. 위험하다고. 감시를 고집한 건 그들입니다.”
나는 분명히 철수하는 게 좋을 거라 경고했다. 그럼에도 고집한 건 유재신이다.
그로 인해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다.
“그건...! 그럼, 저 혼자서라도 가겠습니다.”
나와 달리, 박동석에게 그들은 수년 간, 협회 소속으로 함께한 동료들이다.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죽을 겁니다.”
“그... 무슨... 아까도 그렇고, 혈귀가 김태빈 헌터가 아는 자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내 단호한 대답에 잠시 멈칫한 박동석이 물었다.
혈귀의 거처를 확인 했을 때도 그랬다.
태빈이 아는 혈귀라면, 그로서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강자라고.
지금도 마찬가지.
S급 헌터인 자신이 혈귀의 손에 죽을 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박동석 헌터는 A급 헌터 다섯을 아무런 소란 없이 납치 할 수 있습니까? 아니, 죽일 수는 있습니까?”
“...”
박동석의 말문이 막혔다.
잠시 냉철함을 잃었지만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태빈과 자리를 비운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사이, 다섯 명에 달하는 A급 헌터가 사라졌다.
심지어 남아 있는 흔적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A급 헌터들이 상대에게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나라면...’
과연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같은 협회 소속이니 만큼, 궁수 계열로, 눈이 뛰어난 유재신을 비롯한 다섯 헌터의 능력은 대강이나마 알고 있다.
A급 헌터 다섯.
박동석은 머릿속에 가장의 전투를 그렸다.
아무리 최상의 시나리오를 그려봐도 아무런 소란 없이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아니 태빈의 말처럼 소란 없이는 죽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자신이 방어에 특화된 헌터이기 때문이 아니다.
차예린이나, 다른 S급 헌터가 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혈귀는 해냈다.
남아있는 흔적에는 방어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공격의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A급 헌터 다섯이 제대로 된 공격을 펼쳐보기도 전에 모조리 제압당했음을 의미했다.
“그럼... 이대로 그들의 죽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까...?”
박동석이 고개를 숙였다.
S급 헌터가 된 이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무력감이 박동석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제가 아는 놈이 맞다는 게 확실시 되고 있는 이상, 놈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저뿐입니다.”
A급 헌터를 다섯을 제대로 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제압한 고수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려진 특징들까지.
더 이상은 가능성을 핑계로 부정할 수 없었다.
사건을 일으킨 혈귀는 내가 알고 있는 혈귀였다.
“아무리 화경의 경지라도...”
“완전히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를 감수한다 해도 실패할 가능성 또한 적지 않습니다.”
사실 한국의 S급 헌터 셋을 전부 모으고, A급 헌터 수백을 투입하면 혈귀를 죽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능성일 뿐, 확신할 수는 없다.
이 세계의 지형 자체가 천라지망을 펼치기에 적합하지도 않고, 그들을 유기적으로 지휘할 지휘관도 없었다.
게다가 성공한다 하더라도, 고작 세 명의 초절정과 수백의 절정 고수로는 피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뒤에야 혈귀를 죽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는 혈귀를 죽인다 한들, 무의미했다.
수백의 헌터 전력을 잃은 한국은 현재 생성된 던전과 앞으로 생성될 던전을 막지 못할 테니 말이다.
“김태빈 헌터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강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박동석이 우려를 표했다.
그 만큼 강한 상대라면,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혼자 상대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합공하는 게 나았다.
만에 하나 태빈이 패하기라도 한다면, 그 때는 문제가 더 커질 테니 말이다.
“그거야 정면대결일 때의 얘기입니다. 여럿이 괜히 놈이 경계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혼자가 낫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있었다.
이미 한 번 죽였던 상대다.
하물며 과거에 혈귀를 죽였을 때, 나는 화경의 경지에 오르지도 못한 상태였다.
초절정과 화경의 경계에 있었다.
같은 경지에 오른 지금, 놈이 과거의 경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내가 놈을 죽이지 못할 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