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63화. 혈귀.
“팀장님.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팀원들은 환골탈태로 인한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박동석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한 눈에 나에게 성취가 있었음을 알아본 듯했다.
“고맙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팀원들과 한명한명 눈을 맞췄다.
“새로운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
살막의 위협이 있고, 하루 빨리 화경의 경지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한 국가가 두려운 전력을 가지고, 여문휘라는 강자가 속한 단체다.
두 명의 초절정 무인의 암습만으로도 위기에 빠지지 않았던가.
고작 초절정의 무위로는 한시도 편히 쉴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화경의 경지에 올라섰다.
무인으로서는 다시 시작점에 올랐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제 주변을 잠시 돌아볼 여유 정도는 가질 수 있었다.
그 첫걸음이 팀원들을 살피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나 스스로나, 팀원들에게 확신하지 못했다. 무공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는 일말의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공략이라는 이용을 위해 맺었던 인연들이지만 이제는 몇 번의 위기가 있었음에도 내 곁은 떠나지 않은, 완전히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이들이었다.
평생을 홀로 살아온 나 스스로에 대한 불안도, 팀원들에 대한 신뢰도 걱정되지 않았다.
무공에 대한 것 또한 이미 살막이라는 단체가 나보다 앞서 뿌리내린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새로운 무공 말입니까?”
팀원들이 눈이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지금 그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은 육합검법과 삼류 부법 하나.
경지에 오르지 못할 무공은 아니나, 그 이상을 바라보기에는 한계가 있는 무공들이었다.
실제로 팀원들이 일류에 오른 지금, 무공의 부족함을 조금씩 느끼고 있기도 했다.
그러한 와중에 새로운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하니,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칠 것은 현운(現雲)검법과 풍랑(風狼)부법이다.”
현운(現雲)검법과 풍랑(風狼)부법.
무림 역사에 손에 꼽히는 검법과 부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한 고수들의 독문 무공이었다.
***
“김태빈 헌터.”
팀원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와중, 김원철이 다급히 박동석을 호출했고, 나 또한 자연히 협회를 찾았다.
살막의 위협으로 인해 박동석과는 근 세 달간 한 몸처럼 움직였다.
세 달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간 살막에선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고작 세 달이다.
살수의 살행이 짧게는 하루만에도 끝나기도 하지만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준비할 때도 있다.
세 달 가지고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무슨 일입니까?”
“최근 발생한 연쇄살인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이상 현상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한동안 웃음이 떠날 새 없던 그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 발생한 연쇄 살인.
아니 거의 하루 간격으로 살인이 이어지고 있으니, 연쇄 살인이라기보다는 연속 살인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대부분의 연쇄 살인 사건이 그러하듯, 처음에는 연쇄 살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하나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뿐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고, 사흘 내내 연이어 시신이 발견되면서 경찰 등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처음 연쇄 살인임을 인지한 사흘째에, 네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열흘 간, 총 열한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시신들에게서도 강도 높은 고문의 흔적과 수십 조각으로 찢기고 잘렸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어떠한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했고, 남녀를 가리지도 않았다,
“예.”
나 또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던전이 생기고, 연쇄실종 사건이라면 모를까,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일은 드물었다.
시체를 유기하기 가장 좋은 장소인 던전이 있기 때문이다.
던전에 시체를 유기하고 공략을 완료한다면, 그 시체는 영원히 실종 상태로 사라진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시체를 유기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공략이 가능한 헌터들만 가능한 방법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이번 사건과 같이 시신이 발견되는 연쇄살인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이례적인 사건인 만큼, 언론에서 며칠 내내 떠들어 대고 있었기 때문에 모르라야 모를 수가 없었다.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협회 측에서도 조사를 나섰습니다.”
김원철이 무거운 얼굴로 설명을 이었다.
언론에 알려진 피해자는 열한 명.
그러나 협회가 파악한 수는 그보다 많았다.
최근 발견된 시신가운데, 사건과 연관성을 보인 시신만 열다섯이었고, 실제로는 그 보다 많을 수도 있다는 게 협회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피해자 중에는 조사를 하던 저희 측 헌터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려진 것보다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발견된 열다섯 구의 시신 중,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시신은 열하나로, 그 중에 셋이 협회 측에서 조사를 위해 움직이던 헌터들이었다.
문제는 세 명의 헌터 피해자 중에는 A급 헌터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A급.
각 국가마다 적게는 한 자리 수에서 많아야 열 명을 조금 넘는 S급 헌터들 제외하면, 최강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같은 A급 헌터라도, 각기 가진 능력이 다른 만큼, 살해는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시신으로 발견된 A급 헌터는 이정우.
A급 헌터들 가운데서도 수위에 꼽히는 전투력을 가진 헌터였다.
그런 헌터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시신이 발견된 인근에서는 어떠한 전투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시신에는 사후에 생긴 것이 아닌, 생전에 새겨진 고문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국내에서 전투력으로 손꼽히는 A급 헌터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사로잡혀 고문을 당한 뒤, 살해당했다는 의미였다.
“이정우 헌터라면?”
나도 협회를 오가며 몇 번 봤던 인물이다.
풍기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었다.
적어도 같은 A급에게는 대적할 만할 자가 없어 보일 정도의 기도를 가지고 있던 헌터였다.
그런 헌터까지 당했다니.
암습을 가했다 하더라도, 범인은 최소 B급 이상의 헌터라는 의미였다.
“협회 측에서 파악한 범인은 혈귀(血鬼)라 불리는 중국의 S급 헌터입니다. 이미 중국 내에서도 유명하더군요.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한 열흘 전보다 하루 먼저 한국에 입국한 것이 뒤늦게 확인됐습니다.”
“혈귀(血鬼)말입니까?!”
“혈귀를 아십니까?”
혈귀라는 이름에 눈에 띄게 반응하는 내 모습에 김원철이 물었다.
“예... 조금...”
조금이라 말했지만 사실 혈귀는 나에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아니 혈귀는 이름이 아닌 별호다.
혈귀(血鬼).
전생의 내게 처음으로 죽임을 당한 화경의 고수이자, 말 그대로 피에 미친 귀신이다.
무림에 출두한 이후, 매일 같이 쉬지 않고 살인을 해대, 하루라도 피를 보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희대의 살인귀였던 그는 하루에 한 명은 꼭 죽였다. 물론 그가 기분 좋은 날과 나쁜 날에는 더 많이 죽이기도 했다.
게다가 혈귀의 손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시신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했다. 피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죽을 때까지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혈귀가 내가 아는 혈귀와 같음을 확신할 수 없었다.
어느 시대에나 살인귀는 존재하는 법이니 말이다.
“범인이 S급 헌터인 만큼, 박동석 헌터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S급 헌터들은 소속 국가뿐만 아니라 타국에서도 유명한 만큼, 김원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박동석을 바라봤다.
박동석이 협회 소속이긴 하지만 협회장인 김원철도 그에게 명령을 하지는 않는다.
권한이 없는 게 아니라, S급 헌터를 향한 존중의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박동석은 일체의 의문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범인의 위험성 또한 앞서의 설명으로 이해한 바,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알겠습니다.”
이어 김원철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고,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김원철은 혈귀를 S급 헌터라 했지만 아니다.
그 또한 전생의 무위를 온전히 찾았다면, 박동석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아니, 정면 승부라면, 대한민국의 누구도 혈귀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
십 수 명을 살해하고도 혈귀는 숨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혈귀가 마음먹고, 숨거나 도망쳤다면, 아무리 협회라 해도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제바...끄윽.. 끄윽..”
그런 혈귀 앞에, 온몸이 피투성이인 사내의 입에서 애처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애처로운 목소리는 삶을 구걸하는 게 아니었다.
“주겨줘...”
고통에 발음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제발 이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달라고, 죽여 달라고 빌고 있었다.
간절히 죽음을 바라는 사내는 만신창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몸에는 상처가 없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고, 얼굴도 눈이 있던 자리는 뻥 뚫려 어둠만 가득하고, 코도 성둥 잘려나가 두 개의 구멍만 남았다. 귀 또한 보이지 않아 사람 머리가 아니라, 둥그런 공으로 착각 할 정도였다.
할짝.
참혹한 몰골을 앞에 둔 혈귀가 짧은 비수에 묻은 피를 핥았다.
막 사내의 두 눈을 파내고 묻은 비릿한 피 맛이 혈귀의 혀를 타고 입 안 가득 들이찼다.
서걱.
혀가 핥고 간 비수가 다시 사내의 몸으로 향했다.
비수는 더 이상 베어낼 곳도 없어 보이는 사내의 몸을 회를 뜨듯 유린했다.
얇은 살점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붉은 핏물이 서서히 흘러나왔다.
혈귀는 딱 피가 맺힐 정도로만 베어 냈다.
인체에 대해 해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혈귀는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절로 터득한 기예였다.
“끄윽... 끄...”
그러한 혈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흘러나오던 사내의 신음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방금 베어낸 것은 한 점의 살덩어리였지만 이미 그의 몸에서 그의 몇 십 배나 되는 살점이 떨어져 나왔다. 그로 인해 흘린 피도 적지 않았다.
진즉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처와 출혈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결국 사내의 고개가 힘을 잃고 꺾였다.
“아...”
혈귀가 터트린 탄식에 안타까움이 깊게 베여있었다.
“또 죽었네?”
그러나 아쉬움도 잠시.
혈귀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문휘의 부탁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찾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중국에서처럼 수천의 포위망에 둘러싸일 일도 없고, 이렇게 사냥감들에 제 발로 찾아와 주니 말이다.
***
“여기에 혈귀가 있다는 말입니까?”
협회 측에서 사람을 붙여 안내한 장소는 도심 한 가운데에 있는 깔끔한 주택이었다.
도저히 연쇄 살인마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러나 주택을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비릿한 혈향은 안내한 헌터의 말이 사실임을 대신 증명해주고 있었다.
“예. 열흘 전에는 일가족이 살고 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말끝이 흐려졌지만 십 수 명을 살해한 혈귀가 머물고 있는 집이다. 본래의 주인이 어떻게 됐을 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