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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59화 (59/150)

# 59

59화. 이상 현상(4).

쿠오오!

동양의 용보다는 서양의 드래곤을 닮은 드레이크가 거칠게 포효하며 새로운 세계, 지구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머리만 내밀고 있을 때도 모두가 위압감을 느꼈다. 그러한 존재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채, 포효를 내지르자 4급 몬스터들과 B급 헌터들은 그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을 떨어댔다. 나머지도 순간, 멈칫 할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김태빈 헌터!”

방패로 몬스터들을 밀어내며 뚫고 나온 박동석이 드레이크의 앞을 막아섰다.

방패와 대검을 든 그는 온 몸으로 기세를 뿌리며 드레이크에 대적했다.

꿈뻑.

세상을 오시하던 드레이크의 시선이 자신 앞을 막아선 인간에게 집중됐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자신의 발 하나 크기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드레이크의 본능이 경고했다. 이 인간이 가장 위험하다고.

수백의 미물들이 죽고 죽이는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 수백보다 눈앞의 인간 하나가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콰콰쾅!

드레이크는 망설임 없이 꼬리를 휘둘렀다.

수 미터에 달하는 꼬리가 대지를 긁어내며 그대로 박동석의 방패를 후려쳤다.

충돌과 동시에 포탄이라도 터진 듯, 거친 폭음이 터져 나왔고, 충돌 지점을 중심으로 크레이터가 생겨날 정도로 강력한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드레이크는 자신에게 위험을 느끼게 한 인간이 육편이 되어 사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드러난 광경는 드레이크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다.

박동석이 제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밀려나지 않은 채, 드레이크의 꼬리를 막아낸 것이다.

“하압!”

이어 박동석이 기합을 내지르며 대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대검은 떨어져 내리며 정확히 꼬리를 때렸다. 아쉽게도 드레이크의 꼬리를 단숨에 잘라내지는 못했다.

몬스터들을 물 베듯 도륙해내던 박동석이었지만 오우거 서너 마리를 겹쳐 놓은 것만큼 두꺼운 꼬리다.

대검은 꼬리를 반쯤 파고들다 드레이크의 뼈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푸욱!

그러나 드레이크를 향한 공격은 끝이 아니었다.

박동석이 시선을 끄는 사이 드레이크의 바로 앞까지 다가선 내가 그대로 뛰어올라 놈의 눈에 검을 꽂아 넣었다.

자신의 바로 앞에서 솟아나듯 튀어나온 내 기습에 놈은 제대로 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눈꺼풀만이 본능적으로 눈을 보호하기 위해 닫혔지만 비수와 달리, 강기가 감싸고 있는 검은 눈꺼풀을 그대로 꿰뚫어 그 뒤에 눈알까지 헤집어 놓았다.

쿠와왁!

부서진 눈알에서 희멀건 액체가 흘러나왔다.

절대자라 불려도 부족하지 않은 1급 몬스터인 드레이크다. 꼬리가 반쯤 잘린 것에 이어, 한쪽 눈이 부서진 상처는 드레이크가 여태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태어나 처음 겪는 생소한 고통에 드레이크가 비명을 토해내며 몸부림쳤다.

수십 미터 크기의 괴물의 몸부림에 일대의 땅과 건물들이 부서지며 생겨난 돌무더기가 사방으로 튀었고,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박동석이 탄식을 흘렸다.

투석기가 쏘아낸 듯, 튀어 오른 돌무더기와 시야를 가리는 짙은 흙먼지는 인간과 몬스터들에게 재앙이었다.

전투가 한창인데다, 시야를 가리는 흙먼지까지 겹쳐 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튕겨져 나간 돌덩이에 깔려 죽거나 다치는 헌터들이 속출했다.

드레이크와 조금 더 가까이 있던 몬스터들의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헌터들에게까지 날아온 돌들은 낙하하며 붙은 가속도까지 더해져 훨씬 파괴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즉사를 면치 못했고, 목숨을 부지했다 하더라도 부상의 정도가 더 심각했다.

그나마 수백에 달하던 몬스터들이 입은 피해에 비하면, 헌터들의 수가 적은 덕분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미미하다는 게 위안이었다.

“박동석 헌터! 피해를 줄이고 싶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놈을 죽여야 합니다.”

나는 황망한 얼굴로 드레이크를 바라보는 박동석을 일깨웠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주변을 파괴하고 있는 드레이크를 멈추기 위해선 죽이는 방법뿐이었다.

다행히 시야를 방해하는 뿌연 흙먼지도 드레이크의 거대한 몸체만은 가리지 못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크기다. 제한된 시야로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공격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박동석은 곧장 드레이크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나 또한 마찬가지. 박동석의 대검과 내 검이 드레이크의 몸에 만들어내는 상처가 빠르게 늘어갔다.

드레이크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고통과 분노로 거칠게 포효하며 자신의 몸에 상처를 늘려가는 나와 박동석을 압사시키기 위해 발로 찍고,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그러나 드레이크의 발과 꼬리는 그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나에게 전혀 닿지 못했고, 박동석의 견고한 방어를 뚫어내지도 못했다.

“브레스!”

육체의 공격이 닿지 않자, 드레이크의 입주위로 주변의 기운이 빨려 들어가듯 집중됐다.

집중된 기운을 일순 뿜어내는 브레스라 불리는 기술이었다.

드레이크의 입에서 뿜어진 기운이 전방을 휩쓸었다.

앞에 있던 건물의 잔해들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먼지로 화해 사라질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브레스도 박동석의 견고한 방패를 뚫어내지 못했다.

진정한 드래곤 브레스라면, 이렇게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류인 드레이크의 브레스는 드래곤의 것에 비하면 그 힘이 부족했다.

쿠오오...

브레스를 뿜어내며 상당수의 기운을 소모한 드레이크는 몸에 상처가 하나둘 늘어감에 따라 빠르게 힘을 잃어갔다.

이미 흘린 피가 땅을 적시는 것도 모자라 작은 내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단일 개체가 흘린 피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이다.

아무리 치명상이 없다하더라도 생명체인 이상,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도 살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쿠웅!

이내 서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는지, 거대한 몸체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고여 있던 피가 찰팍 소리를 내며 튀었다.

바닥에 쓰러진 드레이크가 간헐적으로 꿈틀댔다. 발작과도 같은 꿈틀거림은 점차 잦아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그쳤다.

“허. 드레이크가 이렇게 허망하게 쓰러지다니.”

박동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박동석은 숨이 끊어진 드레이크의 시체를 보면서도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

두 명의 S급 헌터가 붙기는 했지만 드레이크는 결코 만만한 몬스터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렇게 드레이크가 죽어 있는 데에는 태빈의 영향이 컸다.

드레이크의 몸에 나있는 수많은 상처.

그 중에서도 치명상이라 불릴 만한 것들은 모두 태빈에 의해 새겨진 것이다.

같은 S급 헌터였지만 박동석이 만들어 낸 상처는 태빈이 것에 비하면, 생채기들에 불과했다.

대검으로도 고작 피부를 긁어낸 수준에 그친 자신의 공격과 달리, 태빈의 단도는 놈의 몸 깊숙이 파고들어 뼈까지 잘라낼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무공!’

박동석의 눈에 기이한 빛 피어올랐다.

단순히 무공의 차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드레이크와의 싸움에서 보여준 태빈의 무위는 박동석의 무공에 대한 열망에 다시 한 번 불을 지폈다.

갑작스러운 지원요청으로 무공을 배울 기회를 미뤄야 됐던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리사욕을 채울 때가 아니었다.

드레이크의 예상치 못한 투석 공격으로 헌터들의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난전으로 변했다.

그 와중에 발생한 부상자들은 스스로 물러나거나, 동료 헌터들의 손에 의해 후방으로 옮겨지고 있었지만 난전 상황에서 모두를 챙기기란 여의치 않았다.

전장 한 가운데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부상자가 적지 않았고, 몬스터들의 손에 의해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김태빈 헌터님.”

박동석이 나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지만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빨리 이 싸움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S급 헌터는 충분히 전투를 종결시킬만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고, 박동석과 함께 다시 전장에 몸을 담갔다.

***

수백에 달하던 몬스터의 수는 이어진 전투와 드레이크가 야기한 피해로 이미 절반 이하로 줄어있었다.

헌터들이 우위에 서있는 상황에서 나와 박동석까지 가세하자, 전투는 금방 끝을 보였다.

박동석은 일검에 수 마리의 몬스터를 도륙해냈고, 나는 그것보다 빠르게 전장을 종회무진하며 몬스터의 급소에 검을 찔러 넣었다.

난전 속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몬스터들을 학살하는 건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박동석과 대등한, 아니, 그 이상의 무위를 선보이는 내 모습에 헌터들이 전투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멍하니 바라볼 정도였다.

“끝났다...”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마지막 몬스터가 쓰러졌다.

수백의 몬스터들이 만들어낸 시체가 산을 이뤘고, 바닥에 고인 몬스터들의 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려오는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혹한 광경에 소름끼치는 소리였지만 전투가 끝난 지금, 이를 신경 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으윽...”

“살려줘...”

전투는 끝났지만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체들 틈에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부상자들이 섞여 있었고, 후방에도 아직 치료받지 못한 부상자들이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누군가의 도움을 갈구하고 있었다.

“빨리 의료지원 요청하고, 부상자들 상태부터 파악해!”

헌터들을 이끄는 류진호는 전투 때보다 급박하게 움직였다.

전투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전후처리과정에서 제대로 조치를 받지 못해 죽는 것은 막을 수 있는 피해다.

다들 지쳐있긴 하지만 조금만 바삐 움직인다면, 몇몇은 더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여기 들것 가져와!”

“부상자 발견!”

헌터들도 류진호의 지시에 따라 힘을 냈다.

꼭 지시가 아니더라도, 부상자들 모두 자신들의 동료였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몸이 힘든 것쯤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었다.

“부상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곧이어 인근 병원 등에서 의료지원이 도착했고, 의사와 간호사 수십이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헌터 중에도 치료가 가능한 스킬을 보유한 이들이 있긴 했지만 그 수가 극히 적고, 치료할 수 있는 인원에도 한계가 있었다.

간단한 상처라면 모를까, 몬스터에게 입은 부상은 최소가 골절 이상이었기 때문에 부상자의 치료는 여전히 의사들의 소관이었다.

“후... 이제야 숨 좀 돌리겠네.”

부상자를 챙기며 바삐 움직이던 류진호가 의료진의 도착을 확인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수백에 달하는 몬스터부터 드레이크까지. 쉽지 않은 전투였다.

그 과정에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긴 했지만 적의 규모를 생각하면, 오히려 적다고 말할 수 있는 피해였다.

박동석과 그와 함께 온 이름 모를 헌터 덕분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드레이크를 잡기 위해 상당한 전력을 투입해야 했을 테고, 피해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커졌을 것이다.

류진호는 감사를 전하기 위해 두 사람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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