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8화. 이상 현상(3).
“다들 물러서라!”
쾅!
박동석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제 몸의 절반만한 방패로 바닥을 내려찍었고, 굉음과 함께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미친 듯 달려들던 몬스터들의 선두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고, 이내 뒤의 몬스터들에게 밀려 도미노마냥 우르르 쓰러졌다.
그 모습이 마치 어스퀘이크라는 지진 마법이 펼쳐진 것 같았다.
마법이 아닌, 박동석이 힘으로 발생한 현상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그 결과가 무척이나 흡사했다.
“정신 차려라! 이곳 책임자가 누군가?!”
몬스터들의 접근을 한 차례 늦춘 박동석이 덩달아 놀라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는 헌터들에게 일갈을 날렸다.
“예! 주작 길드의 류진호라고 합니다.”
류진호가 신병이 자기소개를 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박동석이 막 전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선두에서 몬스터들과 싸우던 헌터였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류진호는 어릴 적부터 동경해오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두 눈을 반짝였다.
박동석은 대한민국에 셋밖에 없는 S급 헌터.
헌터라면, 모르라야 모를 수가 없었고,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류진호 헌터. 주작 길드의 철벽을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박동석도 류진호에 대해선 들어봤다.
A급 헌터 류진호.
자신과 같은 탱커 계열로, 1세대 길드인 주작 길드의 철벽이라 불리는 이름 있는 헌터였다.
“아... 아닙니다.”
류진호는 진정한 철벽인 박동석이 자신의 예명을 언급하자,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류진호의 방어가 아무리 견고한다 한들, S급 헌터인 박동석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방금도 단 일격에 수십에 달하는 몬스터들을 헤집어 놓았다. 고작 앞을 막아내는 수준의 류진호와는 비교조차 불가한 수준이었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통제 부탁하네.”
박동석은 등급이 높다고 류진호의 지휘권을 빼앗을 생각이 없었다.
류진호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 대부분이 주작 길드의 소속이다.
전설 속의 신수 주작이 새겨진 옷만 봐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합을 맞춰왔을 터. 굳이 자신이 나서서 그 합을 깰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류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상과의 만남은 기꺼웠지만 한가로이 얘기나 나눌 시간은 없었다.
휘청거리며 넘어졌던 몬스터들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들고 있었다.
“전위를 부탁드립니다.”
“알겠네.”
“감사합니다. 헌데 옆에 분은...?”
그제야 류진호가 몬스터들 너머 던전을 응시하고 있는 태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경하던 헌터, 박동석을 만나 잊고 있었다. 전장에 도착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음... 신경 쓸 거 없네. 제 몫은 해낼 테니.”
S급 헌터이니 만큼, 전투에 가담한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태빈이 그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발 물러나 던전을 주시하고 있는 태빈의 모습에 박동석은 방해해선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
류진호는 다시 몬스터에게 집중했다.
박동석이 말이 아니더라도, 몬스터들이 코앞까지 닥쳐왔기 때문에 더 이상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박동석과 함께 온 만큼, 어느 정도 실력은 있겠지만 당장은 박동석만으로도 충분했다.
“충격에 대비하라!”
박동석의 등장으로 끊어졌던 전투가 류진호의 외침과 동시에 다시 시작됐다.
***
쿵! 쿵!
탱커들과 몬스터들이 부딪치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과연 국내에서 손꼽히는 1세대 길드, 주작 길드에 소속된 헌터들답게 전위에 선 탱커들의 기량은 뛰어났다.
몬스터들의 덩치가 헌터들에 비해 몇 배는 크고, 수도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탱커들은 한 발짝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몬스터들이 반발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기까지 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박동석이었다. S급 헌터라는 이름이 허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마나가 깃든 방패에 부딪친 몬스터가 그대로 터져나갔다.
한순간에 육편이 되어 주변을 붉게 수놓은 몬스터는 3급 몬스터인 오우거였다.
B급 헌터 둘이 힘을 합쳐야 간신히 잡을 수 있는 오우거가 박동석의 방패에 부딪친 것만으로 죽어 버린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방패로 오우거를 터트리며 몬스터들의 돌진을 막아낸 박동석은 곧장 대검을 휘둘렀고, 수 마리의 몬스터들이 검의 궤적에 따라 두 동강나며 스러졌다.
몬스터들이 가득 메우고 있던 자리에 한 순간 반원의 공간이 생겨날 정도.
단 한 번의 공방으로 수 마리의 몬스터들을 고깃덩이로 만들어버린 박동석의 무위는 S급 헌터가 왜 일인군단이라 불리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군.’
헌터와 몬스터 간의 격돌을 한 차례 지켜본 나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던전을 바라봤다.
박동석을 비롯한 헌터들이 잘 싸워주고 있었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역시, 기운의 흐름이 불규칙적이다.’
이상 현상이 발생한 던전.
던전은 전과 마찬가지로 기운이 숨을 쉬듯 움직이며 몬스터들을 토해냈다.
사실 ‘숨을 쉬듯’이라 표현하긴 했지만 그 흐름이 호흡처럼 규칙적인 건 아니었다. 오래 동안 기운이 옅어지기도 하고, 순간 폭발적으로 강해지기도 했다.
확실한 건, 항상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일반적인 던전과는 기운의 흐름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확연한 차이점이 존재함에도 어째서 협회가 여전히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평소에는 차이가 없을 수도 있겠지.’
내가 이상 현상이 발생한 던전을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한 것은 동기화가 발생한 순간에 기운의 흐름이 급격히 변화함을 감지한 뒤부터다.
그 이전에 리자드맨 던전과 나무가 나왔던 던전, 두 곳의 이상 현상이 발생한 던전을 경험했지만 특별한 점은 느끼지 못했었다.
당시에는 기운의 흐름을 감지해낼 만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좀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건...”
모든 몬스터를 토해내고 반쯤 무너져 내린 던전이 회광반조라도 일으키듯, 거대한 기운을 토해냈다.
무너져 내리는 던전 입구를 가득 채우며 머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크기가 6~7m에 오우거도 거뜬히 나올 수 있는 크기의 던전이었다. 그런 던전을 고작 머리 하나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드레이크...”
던전을 뚫고 나온 머리는 도마뱀의 것과 유사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도마뱀의 머리 크기가 6~7m나 될 리는 없었다.
던전을 뚫고 나온 머리는 드래곤의 아류종이라 불리는 1급 몬스터 드레이크의 것이었다.
“과연 이상 현상이 발생한 A급 던전이라는 건가.”
사실 지금 헌터들과 싸우고 있는 몬스터의 면면은 오우거, 트롤, 만티코어 등등은 B급 던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3~4급 몬스터에 불과했다.
수가 많기는 하지만 A급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라고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드레이크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1급 몬스터는 A급 헌터가 최소 열 명은 달라붙어야 간신히 처치가 가능한 몬스터다. 그것도 절반이상의 희생을 감안한 것이다.
던전 내에 드레이크가 한 마리만 있다 해도 A급 던전이라 불리는데, 수백의 3~4급 몬스터까지 더해진다면, 재앙급 던전으로 분류된다 해도 과하지 않았다.
크와와와!
던전 밖으로 머리를 완전히 내민 드레이크가 괴성을 토해냈다.
한창 싸우고 있던 헌터들과 몬스터들이 주춤거리며 순간 전투를 멈출 정도로 강력한 힘이 담긴 괴성이었다.
드레이크는 괴성을 내지르며 머리보다 큰 몸뚱이를 던전 밖으로 내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
“드레이크다!”
“지원... 당장 지원 요청해!”
그제야 드레이크의 존재를 인지한 헌터들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1급 몬스터인 드레이크가 출현한 이상, 당장 눈앞의 몬스터가 문제가 아니었다.
“허둥대지 마!”
류진호가 허둥대는 헌터들을 다잡았다.
류진호 외에도 많은 A급 헌터들이 있음에도 왜 그가 지휘를 맡고 있는지, 보여주는 예였다.
‘드레이크. 박동석 헌터가 있으니, A급 헌터 대여섯이 지원한다면, 잡아내지 못할 몬스터는 아니다. 그 때까지 나머지 헌터들이 버텨줄 수 있느냐가 문젠데...’
류진호의 머리가 바빠졌다.
수백의 3~4급 몬스터.
박동석이 가세하기 전에도 조금 밀리긴 했지만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박동석이 가세한 지금은 완전히 우세를 점하고 있고.
그러나 박동석과 A급 헌터들이 대여섯이나 빠져나간 다면, 단숨에 전세가 뒤집어 질 것은 뻔했다. 아무리 3~4급 몬스터들이라 해도 그 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박동석 헌터님 드레이크를 맡아주십시오! 1조는 박동석 헌터님을 지원한다!”
그렇다고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이미 머리에 이어 앞발 하나가 밖으로 삐져나왔다. 이제 완전히 나오는 것은 시간 문제다.
전력의 부재로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드레이크가 완전히 던전 밖으로 나오기 전에 결판을 보는 게 나았다.
드레이크가 완전히 나온 뒤에는 그 피해가 몇 배는 커질 것이 자명했으니.
“지원은 필요 없네. 잠시만 버티게”
박동석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드레이크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는 태빈이 보였다.
태빈 또한 S급 헌터.
자신이 가세한다면, A급 헌터들의 지원은 필요 없었다.
***
처음 마주한 1급 몬스터 드레이크.
아직 몸은 보지 못했지만 용이 되기 위해 승천을 준비하는 이무기를 연상케 하는 생김새였다.
이전이었다면, 호기심에라도 놈이 온전히 던전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드레이크를 보고도 크게 흥미가 일지는 않았다.
몬스터들이 가진 기운에 비해 형편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당장 눈앞의 드레이크도 초절정에 준하는 기운을 내뿜고 있다. 내지른 괴성만 해도 초절정 무인의 사자후와 같았다.
그러나 그 뿐.
초절정의 무인이 앞에 있다 해도 두렵지 않은데, 고작 몬스터 따위에게 위협을 느낄 리는 없었다.
‘그래도 내가 처리해야겠구나.’
약간의 우세를 점하고 있긴 하지만 수백의 몬스터와 싸우는 헌터들에게 여유는 없었다.
헌터들을 한 번 바라본 나는 곧장 드레이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속에는 내심 1급 몬스터이니만큼, 영약이나 내단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피융!
비수 한 자루가 내 손을 떠나 드레이크를 향해 날아갔다.
모든 생명체들의 급소라고 할 수 있는 눈을 노린 비수였다.
사람 몸뚱이만한 크기였기에 빗나갈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팅!
그러나 비수는 드레이크의 눈에 닿지 못하고 힘없이 튕겨져 나갔다.
빗나간 것은 아니었다. 내기가 실려 있었음에도 눈꺼풀을 뚫어내지 못한 것이다.
생각보다 단단한 피부였다.
크와와와!
기습을 받은 드레이크가 분노로 울부짖었다.
동시에 다 무너져 내린 던전이 마지막 힘을 토해내듯, 드레이크를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