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57화. 이상 현상(2).
과한 시선에 질겁하는 태빈과 달리, 박동석은 설렘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림과 연관된 직업이나 스킬을 가지고 있는 헌터들도 있긴 하지만 무공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지구의 헌터들은 스킬 덕분에 무공의 초식 등을 흉내 낼 수 있을 뿐이다. 구결이나 묘리 등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과정은 생략되고 결과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가르침을 내릴 수는 없었다.
박동석 또한 마찬가지.
황실 근위기사단장이라는 직업에 마그니스 검법을 알고 있었지만 검법에 대한 이해도 자체는 낮았다. 검법이 가진 무리를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각성자와 헌터들이 생겨나고, 현실이 소설과 같이 변했음에도 박동석이 동경하던 무림은 여전히 환상 속의 세계였다.
그런데, 태빈이 나타남으로써 무림의 존재와 무공을 직접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서른셋의 사내가 영웅을 꿈꾸던 십대의 소년으로 돌아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후...”
살막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 요량으로, 이 세계의 살막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자세히 파고들다 보니, 무림의 살막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이 실수였다.
살막 얘기가 나오고, 무림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낸 박동석의 이어진 질문에 대답을 해준 게 시작이었다.
그 이후, 박동석은 현란한 언변으로 실제 중국에 존재하고 있는 소림파나 무당 등을 들먹거리며 대화를 주도해갔고, 결국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온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각성 후, 헌터가 되기 전에는 회사에서 영업을 뛰었다고 했다.
언변은 그 때 익힌 박동석의 기본 생존 스킬이었다.
게다가 박동석이 나를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만큼,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었다.
“이미 S급 헌터이지 않습니까. 지금 무공을 배운다 한들,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한숨을 한 번 몰아쉰 나는 박동석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에둘러 말했다.
귀찮음이 가장 크긴 했지만 내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기와 오러.
마나라 불리는 자연지기를 체내에 쌓고, 이를 이용한다는 점은 같지만 그 방법에 차이가 있었다.
무인이 단전이라는 그릇을 매개로 내공을 쌓고, 맥을 통해 발산하는 방식으로 기를 사용하는 반면, 기사라 불리는 이들은 그들의 몸, 근육 등에 머물러 있는 자연지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어떻게 보면, 기사들의 방법이 제대로 체계조차 잡히지 않은 구시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각기 장단점이 있어 누구의 방법이 우위에 있다고 단정 지어 말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기를 이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무공을 가르치기 꺼려지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아무리 박동석이 원한다 해도, 기를 이용하는 방식이 다른 만큼,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었다.
“상관없습니다. 수십 년간 꿈꿔오던 일입니다. 그 정도 고난도 없다면, 오히려 실망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박동석의 집요함도 만만치 않았다.
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데, 무공만 배울 수 있다면,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흠... 그럼 저에게도 박동석 헌터님의 검법을 먼저 전수해주실 수 있습니까?”
쉽게 승낙하지 못하리란 생각에서 한 제안이었다.
무림에서는 쉽게 자신의 무공을 보여주지 않는다. 수련을 지켜보는 것도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닌 이상, 금기에 가깝다.
게다가 황실 근위기사단장을 황제의 수신호위와 같은 위치라 본다면, 그의 검법은 황실의 소유일 확률이 높다.
외인인 나에게 함부로 전수해 줄 수 없을 터. 이를 빌미로 거머리같이 달라붙는 박동석을 떼어놓을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박동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보다는 드디어 자신도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황실의 근위기사단장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황실의 검법을 이렇게 외인에게 전수해줘도 되는 겁니까?”
“뭐, 직업만 그렇다 뿐이지, 제가 실제로 제국의 근위기사단장인 것도 아니고, 실제로 황실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상관없습니다. 몸이 기억하는 검법을 펼치는 게 전부라 가르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박동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이 세계에는 황실도 없고, 그가 진짜로 황실 근위기사단장인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런 직업을 가지고 각성한, 무림을 동경하는 서른셋의 사내만 있을 뿐이었다.
“음...”
잘못 생각했다.
이곳의 헌터는 나처럼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능력을 부여받았을 뿐이다. 과거의 예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지금 당장은 가르쳐드릴 수 없습니다.”
애초에 단칼에 거절했다면 모를까, 이런저런 핑계를 댄 이상, 더 이상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그렇다고 곧장 박동석에게 무공을 가르치거나 한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그에 앞서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김원철에게 받은 영약을 흡수하는 것.
언제 살막이 또 다른 살수를 보내올지 모르니, 안전을 고려한다면, 후일로 미루는 게 나을지 모르지만 한시라도 빨리 강해져야 했다.
“혹, 영약을 흡수하기 위해서 입니까?”
박동석은 언변만 뛰어난 게 아니라 눈치 또한 빨랐다.
곧장 호기심을 어린 눈을 하고서 관심을 보였다.
“제가 호법을 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호법을 서주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괜찮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화로,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이번에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박동석은 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다. 신뢰도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호법을 맡길 수는 없었다.
사실 호법도 필요 없었다.
살수는 평생을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직업이다.
자연히 심법은 운기 중에도 무아지경에 빠지지 않는 이상, 기감이 미치는 영역 내에 침입자가 발생하면, 언제든 운기를 멈추고 대응이 가능하도록 발전했다.
영약을 흡수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전에 나무의 내단을 흡수해봤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당시에는 임독양맥을 타통하는 과정에서 반쯤 무아지경에 빠지긴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고작 영약하나 먹고 변화를 바랄만한 경지도 아니고, 그저 내공이 좀 늘어나는 정도일 뿐이다.
기감으로 접근을 감지할 수 있는 이상, 호법을 필요치 않았다.
“이럴 때는 호법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소설과 현실은 다른 법이니까요.”
박동석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내 단호함에 더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호법보다는 영약을 흡수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박동석을 내쫓듯, 밖으로 몰아낸 나는 김원천에게 받은 영약을 꺼냈다.
목함을 열자, 영약 특유의 청아한 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직접 보니, 확실히 알겠다.
김원철이 영약을 보여줄 때도 느꼈지만 향을 맡은 것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질 정도다.
눈앞의 영약은 나무의 내단 이상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나무의 내단을 흡수하는데, 하루가 조금 안 되게 걸렸다. 그 때와는 경지가 다르긴 하지만 영약의 기운으로 보아 걸리는 시간은 비슷할 것 같았다.
스르륵.
나는 망설임 없이 영약을 입안에 들이 밀었다.
주먹 크기의 영약을 씹을 필요도 없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영약의 기운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는 한 톨의 기운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할 시간이었다.
***
예상대로 영약을 흡수하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흡수가 끝나자, 일갑자가 조금 넘던 내공이 지금은 일갑자 반에 달했다.
반 가까이 늘어난 내공에 단전에선 충만감이 가득 올라왔다.
“오오. 영약을 온전히 흡수하신 겁니까?”
밖으로 나온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박동석이었다.
필요 없다고 했음에도 그는 집 앞에서 밤새 내 호법을 서주었다.
기감을 통해 느껴지던 박동석은 혹 방해라도 될까 숨도 조심스럽게 쉬었고, 나를 찾아온 모든 이들을 조용히 돌려보냈다.
덕분에 좀 더 원활하게 흡수를 마칠 수 있었다.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나이에 비해 가벼워 보였는데, 조금은 신뢰가 생겼다.
“축하드립니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동석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그런데, 곧장 영약과 관련된 기연 이야기를 꺼내며 들러붙는 모습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중요한 순간이 지나자마자 진중함은 벗어던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니, 사람이 참 한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말했다시피, 무공을 가르치기 전에 박동석 헌터의 검법을 봐야겠습니다.”
내가 박동석에게 가르치기로 한 무공은 삼재검법과 육합검법으로 저잣거리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삼류 무공이다.
박동석은 그것만으로도 구명지은을 입은 듯, 감격에 겨워했다. 그 모습이 일전에 팀원들의 모습과 겹쳐 보일 정도였다.
어쨌든, 대단한 무공을 가르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의 충돌이 있을 수 있으니, 우선은 박동석이 어떤 방식으로 기를 사용하는지 알아야 했다.
혹시나 해서 마나를 움직일 수 있냐고 물었더니, 박동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때문에 그가 스킬로 사용하는 검법을 직접 봐야했다.
지잉.
얘기를 마치고 막 나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진동이 일었다.
출처는 박동석의 주머니 속이었다.
핸드폰을 꺼내든 박동석의 얼굴에서 감격에 겨워하던 감정이 사라졌다.
“정말... 아쉽지만 무공을 배우는 건 다음 기회로 미뤄야 될 것 같습니다.”
박동석이 아쉬움을 숨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A급 던전에서 동기화가 발생해,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이 있긴 했지만 이상 현상이 발생했던 던전으로 그들만으로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위치가 어디입니까.”
나는 곧장 위치를 물었다.
박동석 개인에게 온 지원요청이지만 살막 때문에 함께 움직여야 되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동석이 나에게 상황을 설명한 거기도 하고.
“강동구입니다.”
다행히 멀지 않았다.
차로는 30분 정도.
나와 박동석 모두 S급 헌터. 5분이면 충분했다.
***
강동구에 도착하니, 이미 전투가 한창이었다.
이번 던전에 발생한 이상 현상은 몬스터의 등급이 높은 것보다는 다수의 몬스터가 출현하는 형태였다.
지원요청이 있고, 5분이 흘렀음에도 던전은 사라지지 않은 채, 몬스터들을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수백은 되어 보이는데, 던전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막아!”
“밀리면 안 돼!”
수십의 헌터들이 사력을 다해 막아내고 있었지만 몬스터의 수가 너무 많았다.
헌터들의 손에 쓰러지는 몬스터보다 던전에서 튀어나오는 수가 더 많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