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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56화 (56/150)

# 56

56화. 이상 현상.

“그럼 향후 대책에 대해 논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측에서는 이번 사건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살막이 베일에 쌓여있는 집단이라고는 해도 타국의 S급 헌터가 국내에서 버젓이 활개치고 다닌 일이니까요.”

무기에 대해 말하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던 김원철의 표정이 한순간에 딱딱하게 굳어지며 진지하게 변했다. 그 진지함 속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타국의 헌터가 자국의 헌터를 노렸다.

길드들의 견제와 최근 발생한 이상 현상으로 인해 영향력이 위축되어있긴 하나, 대한민국의 헌터들을 이끌어가는 협회장으로서 그 동향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다.

“저희는 살막이 또 다시 김태빈 헌터를 노려올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원철이 말을 이었고,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막이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점은 나와 생각이 같았다.

이번 일의 성패 여부를 떠나 상상 이상으로 집요한 놈들이니까.

물론 의문도 있었다.

나를 포섭하거나 제거하는 게 살막에게 그 정도의 이익을 가져다줄까 하는.

그러나 작은 의문으로 마음 놓고 있기에는 위험이 컸다.

“해서 저희 측에서 박동석 헌터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이번 일에도 드러났듯, S급 헌터가 A급 헌터의 이목을 속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S급 헌터를 막을 만큼, 많은 A급 헌터를 차출할 수 없는 실정이기도 하고...”

초절정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열 명의 절정 무인이 필요하다.

그것도 한 명의 적을 대상으로 한 검진을 익히고, 최소 일 년 이상 합을 맞춰왔다는 가정 하에나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이 세계의 A급 헌터가 그런 훈련을 받았을 리 없었고, 이상 현상으로 곳곳에서 동기화에 대비하고 있는 지금, 그 만큼 많은 전력을 빼낼 여력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사마휘의 같은 경우에는 정말 운이 좋았다.

왼팔만 멀쩡했다면, 성현과 상은을 비롯한 팀원들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가 분노로 이성을 잃지만 않았더라도 결과는 어떻게 뒤바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S급 헌터인 박동석을 부른 것이다.

한명 한명이 일인군단으로 불리는 S급 헌터 둘이면, A급 수십은 우스울 정도다. 웬만한 전력으로는 건드릴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게다가 박동석의 역할을 탱커.

제국 근위기사단장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는 탱커이면서도 딜러에 상응하는 공격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박동석이 나와 조합을 이룬다면, 도망치거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는 정도는 가능하리란 게 협회 측의 판단이었다.

“...해서 한동안은 박동석 헌터가 김태빈 헌터와 동행하게 될 겁니다.”

제안보다는 통보에 가깝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 또한 당장은 살막에 홀로 맞설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저 우락부락한 사내와 같이 다녀야 한다는 게 조금은 마음에 걸렸다.

보통 사람 세 배는 됨직한 몸이다. 덩치로는 내로라하는 장만식도 한 수 접어줘야 될 정도다.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살막의 시선이 따라붙기 쉬웠다.

“그리고 이건 전에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이어진 김원철의 말과 함께 내밀어진 그의 손에 담긴 물건을 보는 순간, 박동석에 대한 생각은 저만치 밀려났다.

누런빛을 띄고 있는 동그란 구슬.

완벽한 구체를 이루지 않았다면, 누군가의 배설물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색이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영기는 결코 전에 내가 먹었던 나무의 내단에 뒤지지 않았다.

“영약이군요.”

나는 기쁜 마음으로 영약을 건네받았다.

첫 만남에서 협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김원철에게 내가 요구했던 사항이었는데, 이번 습격 등의 일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당장 구할 수 있던 건 이거 하나뿐이었습니다.”

“충분합니다.”

진심이었다.

하나뿐이라는 게 아쉽긴 하지만 이렇게 영약을 구할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당장 느껴지는 기운으로만 봐도 제대로 흡수하고 나면, 예상했던 기한을 한 달은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필요하시다면,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을 가득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

“실패했다고?”

호랑이 가죽이 둘러진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여문휘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좀처럼 믿지 못하고 재차 되물었다.

“예. 삼 호와의 연락이 끊겼고, 암영대원이 김태빈이 공략 중이던 던전이 있던 도봉산에서 협회 측이 신원미상의 시신 두 구를 수거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모든 살수들이 두려워마지 않는 여문휘가 인상을 쓰고 있음에도 보고를 올리는 사내의 표정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여문휘를 앞에 두고도 유일하게 두려워하지 않는 사내는 살막의 두뇌인 군사를 맡고 있는 제갈민이었다.

제갈민.

스스로를 제갈량의 후예라 자처하는 제갈 세가의 가주 제갈풍과 첩실 사이에서 태어난 삼남이었다.

영웅은 삼처사첩이라, 세가의 가주가 첩실을 두는 게 흠될 건 없었다.

문제는 제갈민이 자신의 제갈풍이 자신의 어미를 홀대하고, 정부 또한 첩실인 어미와 자신을 음해한다는 피해망상에 젖어 있다는 점이었다.

결국, 제갈민은 살막에 제 아비와 정부를 죽여 달라 의뢰하는 패륜을 저질렀고, 그 의뢰금을 자신의 두뇌로 대신해, 살막의 군사가 된 것이다.

“절정이라 하지 않았었나.”

“암영대가 그의 위치를 추적하는데, 이십일 가량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무림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이 초절정으로 올라서는 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협회에서 개입을 해왔다고 합니다. 절정고수 둘이 있었고, 김태빈이 키우는 것으로 보이는 이류 무인들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뭐, 그렇다 해도 삼호 정도는 사마휘를 미끼로 몸을 빼낼 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긴 합니다. 암영대에게 지시를 해놨으니, 놓친 부분이 있다면, 곧 밝혀질 겁니다.”

제갈민이 의문을 남기며 보고를 마쳤다.

사마휘는 살막이 이 세계에서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포섭한 사파의 무인.

언제 잃어도 아쉬울 게 없는 자다.

그러나 삼호는 달랐다.

살막 시절부터 수십 년간 공들여 키워온 특급살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초절정 고수를 죽일 수 있는.

그런 삼호가 임무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도망도 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흠...”

여문휘가 짧게 침음을 흘렸다.

무림에서야 조금 과장하면, 초절정 무인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일대의 패자를 자처할 수 있을 정도로 드물다.

제갈민이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세계를 발아래 두고자 하는 여문휘의 입장에서는 두 명의 초절정 고수를 잃은 것은 아까운 손실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삼호가 실패한 이상, 일호가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만.”

제갈민이 물었다.

제 성질도 어쩌지 못하는 사마휘가 있다고는 하지만 특급살수와 초절정 고수 둘이 실패한 일이다. 김태빈의 포섭이든, 제거든,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전력이 필요했다.

“음... 군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문휘는 검지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고민에 빠졌다.

“벌써 제자를 거두어들인 것으로 보아, 그의 한계가 초절정이 아닐까싶습니다. 고작 초절정 고수 한 명에서 신경 쓰기보다는 권왕과 혈귀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삼호가 실패하면서 드러난 태빈의 경지는 초절정.

시간이 지나면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드물다.

무림과 달리, 이 세계의 던전에 기가 풍부하다고는 하지만 화경의 경지는 단순히 내공이 많다고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니까.

이미 두 명의 초절정 고수를 잃었다. 당장 태빈을 포섭한다 하더라도 손해란 뜻이다. 고작 초절정 고수 하나 때문에 더 이상의 인재를 낭비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겠지. 권왕과 혈귀의 포섭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잠시간의 침묵 뒤, 여문휘가 입을 열었다.

권왕과 혈귀.

자신과 같이 이 세계에서 새로운 생을 부여받은 화경의 무인들이다.

권왕 고영은 정파와 사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한 마리 고고한 학처럼 중원을 주유하던 중도의 인물로, 관과 재수 없게 얽히는 바람에 처형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리고 혈귀는 별호에 혈(血)자가 들어갔을 정도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희대의 악인이다.

무림공적으로 몰린 뒤, 홀연히 사라졌는데, 이름 없는 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며 그 죽음이 알려졌다.

과거가 어찌됐든, 여문휘는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된 후로, 오래 동안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고, 최근 들어 슬슬 그간의 노력이 효과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혈귀는 거의 넘어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 중국 당간부의 자제를 죽이면서 수배가 내려진 상태입니다.

중국 정부가 얽혀있는 만큼, 가볍게 볼 사안은 아니지만 혈귀를 얻음으로서 생길 이익을 생각하면, 감수할 만 합니다.

반면, 권왕은 여전히 반응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홀로 활동해왔던 만큼,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오는 게 내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무림과 달리, 지구에서는 마냥 홀로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으니, 뜻을 굽히는 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가.”

여문휘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권왕과 혈귀.

제갈민의 말대로 둘만 살막의 휘하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초절정 고수 하나 쯤이야 어찌돼도 상관없었다.

***

나는 한동안 협회가 소속 헌터들에게 지원해주는 아파트에서 머물기로 했다.

아무래도 원래 살던 집은 거리가 멀어 위급 상황 시, 지원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협회의 보호를 받고 있던 부모님도 이번 기회에 모셔왔다. 협회에서 지원해준 헌터들이 지켜주고 있긴 했지만 B급 수준에 불과해, 안심이 되질 않았다.

형과 팀원들도 마찬가지, 안전을 확신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함께 있는 편이 나았다.

“정말 무림이란 곳이 실제하는 겁니까?”

옆에 있던 박동석이 물었다.

다행히 아파트였기 때문에 협회가 박동석에게 옆집을 내주면서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박동석은 내가 무림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쉽사리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른셋인 그는 거의 이십 년 동안 무협지에 빠져 살았다고 했다. 그 만큼, 무림에 대한 동경이 컸고,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무림을 삼분하고 있는 정파. 사파. 마교부터 시작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파의 세력 구도 등.

세세한 것까지 쉼 없이 물어오는 탓에 귀찮을 정도였다.

“혹시 저도 무공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박동석의 눈이 소년의 것처럼 반짝거렸다.

서른셋에 수염이 가득한데다, 몸집도 내 세 배는 큰 사내가 눈을 빛내며 쳐다보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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