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55화. 암습(7).
“후읍. 후읍.”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마지막 신음 이후로 누구의 신음도 이어지지 않았다. 거친 호흡 소리만 가득했다.
한계에 이르러 반쯤 무아지경에 빠져 방어를 반복하던 이들이다. 제대로 된 상황파악도 하지 못한 채, 신음 소리만으로 자신들의 마지막을 예상할 만큼.
갑자기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찾아온 적막에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똑!
그리고, 어디선가 물방울이 지면에 부딪쳐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이들이 현실로 돌아왔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폭풍처럼 몰아붙이던 사마휘의 목덜미를 뚫고 나온 검신에서 한 방울 핏물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었다.
“크륵...”
사마휘의 입에서 피거품이 새어나왔다.
눈을 부릅뜬 그의 몸이 간질이라도 온 것 마냥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푸슉!
목을 뚫고 나왔던 검신이 빠져나가며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호선을 그리며 뿜어져 나왔다.
이내 핏줄기가 약해졌고, 목 아래 몸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검붉은 빛의 액체는 순식간에 흑색 도복 밑단까지 적셔나갔다.
그것이 사마휘의 마지막이었다.
인간인 이상,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 생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사마휘는 어느새 피 웅덩이가 고인 바닥에 철퍽 소리를 내며 머리를 처박았다.
“팀장님...”
“김태빈 헌터...”
나를 부르는 갈라진 쇳소리가 들려왔다.
말 한 마디 내뱉는 것도 힘들 정도로 한계에 몰려 있던 팀원들과 성현이 간신히 뽑아낸 소리였다.
그들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서있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싸움은 끝났지만 멀쩡하게 서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살아있는 게 신기할 만큼, 상처 가득한 몸으로 간신히 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직접 전투를 치르지 않고,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형도 전투가 끝나자, 극도에 달했던 긴장이 풀리면서 탈진한 사람처럼 축 늘어져버렸다.
***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에서 한 번 봤던 유인원과 함께 지원 병력이 도착했다.
총 열 명으로,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개개인이 내뿜는 기세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아, 최소 B급 이상의 헌터로 보였다.
그 중, 다섯만 협회 소속임을 나타내는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나머지는 인근에 있던 헌터들에게 지원을 받은 것 같았다.
“살막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S급 헌터 둘이라...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나는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했고, 유인원은 살막이라는 말에 주변을 한 차례 살피며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휘와 왕추의 무위를 생각하면, 누군가 죽었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팀원들이 던전 핵을 파괴하기 위해 움직였을 때, 왕추가 자신을 노리지 않았다면, 필시 팀원들 중 한 명은 죽었을 것이다. 운이 좋아야 불구가 되는 선에서 그쳤을 거고.
또한 왕추가 나를 알아보고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한계에 몰려 있던 팀원들과 성현, 상은이 위험할 뻔했다. 자신이 막 사마휘의 숨을 끊던 순간, 다들 삶을 포기하기 일보직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한 명도 죽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죽임으로써 위기를 넘겼으니, 그의 말대로 다행이었다.
“같이 있던 헌터들은 모두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큰 상처는 없어보였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나머지는 협회 측에서 마무리 하도록 할 테니, 김태빈 헌터님도 병원에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인원이 조심스럽게 권했다.
S급 헌터 두 명의 습격에도 살아남은 태빈이다. 한 명을 다른 헌터들이 맡았다고 해도, 남은 한 명은 태빈 혼자 상대했으니, 그도 S급에 올라섰음이 확실했다.
SS급 이상의 성장을 자신했던 태빈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S급 헌터는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해야 하는 인재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긴 했지만 작은 이상이라도 있다면, 이는 금전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큰 손해였다.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권유를 정중히 사양했다.
내상을 입기는 했지만 이런 저런 검사로 귀찮게 하는 병원보다는 조용히 운기를 하는 게 나았다.
***
“후...”
대주천을 마친 진기가 다시 단전으로 돌아가고,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 운기를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남아있던 내상이 말끔히 치유됐다. 적지 않은 내상이었기에 치료하는 데만 꼬박 사흘이나 걸렸다.
그 사이, 팀원들은 병원에서 하루 동안 푹 자고 쾌활한 모습으로 일어났고, 가장 많은 상처를 입었던 성현도 오늘 부로 퇴원 할 거라는 얘기를 들었으니, 사마휘와 왕추의 습격으로 인한 육체의 상처는 모두 치유된 셈이었다.
“살막.”
치유는 끝났지만 내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이번 일로 살막은 초절정의 고수를 두 명이나 잃었다. 이로써 나와는 완전히 적대 관계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문환을 잃고도 회유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재차 나를 포섭하려 들 수도 있긴 하지만 내 뜻에 변함이 없는 이상,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살막의 살수들은 집요하다.
문환에 이어 두 명의 초절정 고수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 강한 전력을 투입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게 될 적은 다수의 살수가 될 확률이 높았다.
한국에도 셋뿐일 정도로 그 수가 적은 S급이다. 아무리 국가를 위협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살막이라 해도, 초절정 고수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다수의 살수는 특급 살수만큼, 위협적이진 않지만 그 나름대로 까다롭다.
여러 살수가 나서는 만큼, 독과 암기, 그 외에도 갖가지 살법을 염두 해두어야 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가족이나 팀원들을 인질로 잡을 가능성도 높았다.
협회의 보호 하에 있긴 하지만 초절정 고수가 마음먹고 나선다면,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다.
특히나 가족의 안위는 내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이 나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국가를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적으로 돌려세웠으니,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다.
***
협회 측의 지원을 받기 위해 전화를 걸려던 찰나, 협회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유인원의 연락이었는데, 이번 습격과 관련해 협회로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마침 나도 필요한 것이 있었기에 곧장 협회로 향했다.
“김태빈 헌터.”
협회에는 유인원뿐만 아니라, 협회장 김원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외에 처음 보는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눈에서 흐르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은 절로 위압감이 들게 만들었다.
“이쪽은 협회 소속 S급 헌터인 박동석 헌터입니다.”
사내의 정체는 김원철의 소개를 통해 밝혀졌다.
박동석.
신의 길드 부길드장 차예린과 더불어, 한국에 셋뿐인 S급 헌터 중 한 명이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네 번째 S급 헌터가 될지도 모른다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박동석입니다.”
“김태빈입니다.”
박동석이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왔고, 나 또한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 손을 마주잡았다.
음?
단순한 악수로 여겼는데, 박동석의 손에서 전해지는 악력이 점차 거세졌다.
내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힘겨루기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피할 이유는 없었다.
가볍게 끝날 악수가 길어졌다.
성인 남성 허벅지만한 박동석의 팔뚝에 힘줄이 뱀처럼 꿈틀거렸고,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유인원과 김원철이 나와 박동석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두 사람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크하하. 초면에 무례를 범해서 미안합니다. 이거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같은 S급이라도 내 악력을 버티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과연 듣던 대로 대단하군요.”
박동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손에 힘을 풀었고, 나 또한 가벼운 미소와 함께 손을 거두어 들였다.
애초에 내 힘을 간접적으로나마 시험해보고 싶어 하는 느낌이 강했고,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피하지 않은 힘겨루기다. 이를 트집 잡아 얼굴 붉힐 만한 일은 아니었다.
“휴우...”
혹여나 싸움으로 번질까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유인원의 작게 한숨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른 땀을 찍어내는 게 여간 마음 졸인 게 아닌 듯했다.
하긴 유인원이 A급 헌터라고는 하나, S급 헌터들의 싸움은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말리기 위해서는 협회에 상주하고 있는 모든 헌터들을 투입해도 가능할지 미지수인데, 걱정이 안 됐을 리가 없었다.
“하하. 소개는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군요.”
김원철 또한 태연한 척, 웃음을 흘리며 마무리 지었지만 떨리는 입가와 어느새 흘러내린 땀으로 반질대는 이마는 감출 수가 없었다.
“김태빈 헌터님을 뵙고자 한 것은 이번 습격에 대한 사후처리와 향후 대책에 대해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작은 소동이 마무리되고 김원철이 본론을 꺼냈다.
우선 사후처리.
사마휘와 왕추의 시신은 협회 측에서 처리했다. 아마 실험실로 옮겨졌을 거다.
헌터와 마나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분야고, 헌터의 시신을 해부해 볼 기회는 쉽게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의 시체를 태우건, 가르건 관심 없었다.
나와 논의할 부분은 그들이 남긴 무기에 대한 것이었다.
사마휘는 도를, 왕추는 단도와 암기 몇 개를 남겼다. 감정 결과, 중국 장인의 손길이 닿은 무기들로, 그 값어치가 만만치 않았다.
도는 일억 이상, 단도는 사용하는 헌터가 많지 않은 관계로 암기까지 더해 삼천 정도가 예상됐고, 나는 그 처리를 협회에 맡겼었다.
값어치가 있는 무기인 만큼, 아무래도 헌터 백화점을 통하는 게 판매에 용이했는데, 개인이 직접 등록을 하는 것보다는 절차가 간단했기 때문이다.
“도는 일억 삼천에, 단도와 암기는 도합 오천으로, 총 일억 팔천 만원에 등록해놨습니다. 만약 판매가 이루어진다면, 수수료를 제한 금액을 곧바로 김태빈 헌터님의 계좌로 이체할 예정입니다.”
한 명의 장인이 한 자루의 무기를 만드는데,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까지도 걸린다. 때문에 인정받는 장인의 손길이 닿은 무기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다.
몇 억을 호가하는 무기들도 있는 만큼, 마냥 비싸다고 할 만한 가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피를 묻힌 무기이기 때문에 가격이 낮게 책정됐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좋은 무기들이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김문수 장인과 이호진 장인의 검보다 월등히 뛰어난 도와 단도였으니까.
“감사합니다.”
어찌됐건, 번거로운 일을 대신 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물론, 김원철이 직접 하지는 않았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