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54화. 암습(6).
간신히 검을 들어 막아내긴 했지만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목을 타고 역류하는 피에 내장 찌꺼기가 섞여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내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기회만을 노리던 왕추가 혼신의 힘을 다한 암습을 막아냈다.
드러난 살수는 같은 초절정이라 해도 반 수 정도 아래의 실력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사마휘까지 큰 부상을 입은 상태이니, 내상을 입었다 해도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이를 증명하듯,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사마휘는 말할 것도 없고, 복면으로 가린 왕추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암습이 막힐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
내 검보다 짧은 단도를 든 왕추가 재차 달려들었다.
그도 팀원들이 던전 핵을 파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시한 것은 목표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던전 밖에 있는 성현과 상은이 합류한다 하더라도 목표만 처리하고 나면, 충분히 몸을 빼낼 자신이 있었다.
암습은 실패했지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으니, 목표가 내상을 회복하기 전에 끝장을 봐야 했다.
챙!
왕추의 단도가 내 검과 부딪쳤다.
내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같은 경지의 살수와 정면대결에서 밀릴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나 또한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는 그를 단숨에 제압 할 수 없었다.
[ ... ]
오로지 급소만을 노리는 몇 차례의 공방이 빠르게 지나가고, 한 발 뒤로 물러선 왕추의 입이 달싹 거리는 게 보였다.
혼자 힘으로는 쉽게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자, 사마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무인이었다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게 합공이지만 살수에게는 그딴 거 없다. 무슨 짓을 하든, 목표를 죽이기만 하면 그만이다.
괜히 무림에 어린아이와 여자, 그리고 노인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울던 아이가 비수로 목을 찌르고, 방금 전까지 정을 나누던 여인이 비녀를 꼽고, 노인이 제 몸을 지탱하던 지팡이에서 검을 꺼내드는 게 살수들의 세계다.
고작 합공 따위는 부끄러운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왕 살수... 크윽...”
나와 왕추가 공방을 주고받는 사이, 사마휘는 지혈과 함께 흑의를 찢어 반쯤 덜렁 거리던 어깨를 억지로 동여매고 있었다.
어차피 제 구실을 상실한 어깨다. 균형을 잡아주기야 하겠지만 덜렁거리는 어깨가 움직임에 주는 방해가 더 컸다.
잘라내면 더 편할 텐데도 사마휘는 자신의 신체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살수와 무인의 차이였다.
하긴 무림과 달리, 이세계의 의학은 저 팔을 고쳐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후우...”
나는 왕추가 잠시 물러난 틈을 타 호흡을 고르며 조금이라도 내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피와 함께 내장 찌꺼기들을 한 번 토해내고 났더니, 속이 조금은 편해진 느낌이었다.
호흡을 고르며 눈앞에 선 두 적을 주시했다.
사마휘의 어깨에 치명상을 입히고, 왕추의 암습을 막아내면서 작은 이득을 보긴 했지만 아직 확실한 우위에 선 것은 아니다.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콰지직.
사마휘의 조치가 대충 끝나고, 왕추가 다시 나를 향해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팀원들이 무사히 던전 핵을 파괴했는지, 주변환경에 균열이 가며 던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딱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아무리 부상을 입고, 드러난 살수라 해도, 초절정 고수 둘의 합공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팀원들이 늦지 않고 제 임무를 완수해냈다.
***
성현과 상은은 갑자기 무너지는 던전을 보며 무기를 꺼내들었다.
동기화의 전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괜히 이상 현상이라 부르는 게 아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일곱?”
무너지는 던전을 지켜보던 두 사람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던전에는 분명 다섯이 들어갔다. 그런데, 던전이 사라진 자리에는 일곱이 무기를 꺼내든 채, 대치하고 있었다.
“제길.”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목을 속일 정도로 뛰어난 자들이 던전에 진입했고, 태빈 일행과 싸움이 발생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두 사람은 태빈 일행을 돕기 위해 곧장 신형을 날렸다. 그 때까지도 정체 모를 이들과 태빈 일행의 대치는 계속되고 있었다.
“두 분은 팀원들과 함께 저자를 맡으세요. 왼쪽 어깨에 작지 않은 상처를 입었으니, 방어에 집중한다면, 버틸 수는 있을 겁니다.”
나는 두 사람과 팀원들에게 사마휘를 맡겼다.
냉철함은 바탕으로 작은 틈이라도 파고들 수 있는 살수보다는 분노로 반쯤 이성을 잃은 사마휘 쪽이 더 상대하기 쉬웠다.
“으.. 알겠습니다.”
한 쪽 어깨가 반쯤 잘려나가 아예 못 쓸 정도인 상대를 두고도 고작 버틸 수 있을 거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성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나 이내 현실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경계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부상당한 몸으로 흘리고 있는 사마휘의 기세만으로도 자신들이 감당하기 힘든 존재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빈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사마휘를 두 사람과 팀원들에게 맡긴 나는 왕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살막에 있는 다섯 명의 특급 살수 중, 내게 죽임을 당한 것은 셋이다.
여문휘를 죽이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하나, 천라지망에 둘러 쌓였을 때, 둘.
각기 독과 암기, 그리고 단도를 주 무기로 쓰는 자들이었는데, 눈앞에 있는 살수가 들고 있는 무기로 보아, 그들 중에 단도를 쓰던 자로 보였다.
그르륵.
내 손을 따라 교차한 두 자루의 검이 서로의 검신을 긁어냈다.
동시에 암습에 실패한 뒤, 상황을 살피며 눈을 굴리던 왕추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란에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예상되는 시간은 대략 십분.
우연치 않게도 사마휘가 나와 팀원들을 두고 선택을 내리라며 주었던 시간과 같았다.
타앗.
내가 무영보를 펼침과 동시에 내 신형과 그림자가 사라졌다.
나를 살왕의 자리에 올려주었던 보법이다.
신형과 그림자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와 왕추 사이의 거리 또한 사라진 것처럼 순식간에 좁혀졌다.
챙!
상황이 틀어지자, 내빼려던 건지, 어둠 속에 동화되어 가던 왕추가 다급히 단도를 들어 올렸다.
어김없이 급소를 노리고 찔러 들어가던 검은 막아냈지만 생각보다 빠른 접근에 놀란 듯, 눈이 커졌다.
“네 놈...?”
왕추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급격히 떨리는 눈동자가 놈이 단순히 내 접근에 놀란 게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눈동자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나를 알아본 것이다.
평생 복면을 얼굴과 같이 살아왔으니, 얼굴을 보고 알아본 건 아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고 무기를 맞대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아무래도 보법을 보고 눈치 챈 것 같은데, 사실 어떻게 알아봤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이 기회라는 점이다. 내 정체를 안 놈이 지금까지와 달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크읏.”
한 번 균형이 기울어진 저울을 걷잡을 수 없었다.
오로지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몰아붙이는 내 공세에 왕추의 손발이 급격히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커억. 네... 놈도...살아...”
결국, 심장을 꿰뚫린 왕추가 입과 뚫린 가슴에서 울컥 울컥 핏물을 토해냈다.
왕추의 눈은 빠르게 초점을 잃어갔고, 내뱉던 말은 끝내 다하지 못했다.
철퍽.
생기를 잃은 몸 뚱아리가 힘없이 바닥에 꼬꾸라졌고,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
“저희가 상대할 테니, 물러서 계세요.”
성현이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태빈이 합공을 하라하긴 했지만 고작 E급 헌터들이다.
S급 헌터에 준하는 적을 상대함에 있어 방해가 되면 방해가 됐지, 도움이 될 수준은 아니었다.
팀원들이 이류 무인, 즉, C급 헌터의 수준에 올랐다는 걸 알지 못하는 성현으로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저희도 싸울 수 있습니다!”
“방해는 되지 않을 겁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외치는 절규에 가까웠다.
계속해서 짐만 되고 있다는 사실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문 팀원들의 얼굴에는 분통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성현이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나같이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얼굴을 보니, 방해 될게 뻔한 데도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다.
“제가 보조 할 게요. 방어만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죠.”
상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어차피 자신들이 말린다 해서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괜히 갑자기 끼어들어 방해를 받을 바에는 애초에 그들을 염두 해두고 싸움에 임하는 게 나았다.
“전부 죽여주마!”
잠깐의 실랑이를 하는 사이, 분노로 이성을 잃은 사마휘가 달려들었다.
왼쪽 팔이 못쓰게 된 상태임에도 그의 기세는 전혀 줄지 않았다. 아니,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보려는 심산인지, 한층 더 거칠어진 기세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쾅!
“컥!”
초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단순히 아래로 내려 긋는 내려찍기에 불과했음에도 이를 막아낸 성현의 무릎이 땅에 닿을 듯 굽혀졌다.
신음을 토하는 성현은 자신과 상은이라면, 상대해 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상을 입었어도 S급 헌터는 S급 헌터다. 자신들이 결코 어쩔 수 있는 상대였다. 방어에 집중한다 해도 과연 버티기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막아!”
다행히 김시연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끼어든 팀원들의 도움으로 성현을 향한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장만식을 전위로 한 팀원들은 삼재진을 펼쳐 사마휘의 도격을 막아냈다.
“크윽.”
막아내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세 개의 부와 검이 도 하나에 짓눌렸고, 팀원들의 몸은 태풍 앞에 갈대 마냥 휘청거렸다.
“배리어.”
“아이스 에로우.”
상은의 지원과 견제가 이어졌다.
그러나 배리어는 사마휘의 도에 무참히 깨져나갔고, 아이스 에로우는 힘없이 부서져버렸다.
“크윽.”
성현이 굽어진 무릎을 펴고 팀원들과 함께 공세를 받아냈다.
펴졌던 무릎이 곧 바로 다시 굽혀졌다.
태빈의 말 대로였다.
성현이 한 번 막아내면, 그 뒤를 팀원들이 받쳤다. 사이사이에 상은이 배리어로 도력을 흐트러트리고, 갖가지 마법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 흐트러진 도력을 다시 성현이 감당해 내고. 팀원들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성현을 향한 공격을 방해했다.
자칫 삐끗하면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위태위태하긴 하지만 힘을 합치면 간신히 버틸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버텨내고는 있었지만 도강의 여파에 육체에는 상처들이 가득했고, 한 순간의 실수에 죽을 수도 있다는 긴장감은 끊임없이 정신력을 갉아먹었다.
“커억!”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냈다.
가장 앞에서 공세를 받아낸 성현의 전신은 피로 가득했고, 후방에 있던 상은도 마나탈진 증세를 겪고 있는 상황.
모두가 이 신음이 내 신음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한계에 몰려 있었다.
다만, 단말마에 가까운 이 번 신음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함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렇게 모두가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