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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53화 (53/150)

# 53

53화. 암습(5).

사실 사마휘는 당장에라도 태빈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아끼던 수하를 죽인 것은 둘째 치더라도, 임무를 실패하게 만들었다는 데에 대한 분노는 이십 일의 기다림 속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있었다.

혼자였다면, 임무고 뭐고 놈의 목부터 베어 버렸을 지도 몰랐다.

아니. 그리 편하게 죽일 수는 없다.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꼴을 봐야 간신히 풀릴 분노였다.

임무의 성패는 걱정이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놈이 거절했고, 그에 따라 처리했다 보고하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군인 자신조차 위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은신해있는 왕추가 지켜보고 있었기에 생각에 그쳐야했다.

“내가 충성을 맹세한다 한들, 어떻게 확인 할 거지?”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사마휘의 손에서 손톱 크기의 검은 물체가 쏘아졌다.

암습은 아니었다. 그가 살기를 줄줄 흘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검은 물체에서는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세계의 놀이 중 하나인 캐치볼을 하듯 가볍게 던져졌을 뿐이다.

“먹어라. 충성의 증표다.”

나는 어렵지 않게 검은 물체를 낚아챘고, 이어진 사마휘의 말에 손에 들린 환약 같은 동그란 물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독.

일정 주기마다 해독을 필요로 하는 독은 예로부터 강제적인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흔히 사용돼온 도구다.

죽음에 초연한 이들에게는 효과가 없겠지만 얼마나 되는 이들이 죽음에 초연할 수 있을까. 그만큼 확실한 방법이었다.

사마휘가 자신하는 걸로 보아 적어도 초절정의 경지로는 해독할 수 없는 독이다.

물론 화경의 경지에 오른다고 해도 해독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해질 뿐이지, 만독불침이 되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단순히 기존에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내공만을 늘려 오를 수 있었던 초절정의 경지와는 달리, 화경의 경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김태빈의 기억이 섞여들며 불안전해진 정신을 가다듬어 부동심(不動心)을 이루고, 내공이 단전이라는 그릇을 넘어 전신 세맥에 스며드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내가 보고 있는 기한은 육 개월.

이전까지는 일 년 이상으로 길게 보고 있었지만 협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잡은 기한이다.

화경의 경지에 올라 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해도, 최소 육 개월 동안은 놈들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흠...”

나는 고민하는 척, 대답을 미룬 채, 사마휘의 눈을 응시했다.

사마휘는 충성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를 내 앞에 던져 놓았다.

충성. 할 수 있다. 그러나 배신을 전제로 한 충성이다.

자유를 위해 장장 이십 년간 원치 않는 삶을 살아왔던 나다. 눈앞의 위협 따위에 잃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럼에도 고민하는 이유는 나는 그들과 대립하게 되었을 때, 예견된 팀원들의 죽음 때문이다.

당장 내가 거절을 선택하면, 사마휘는 기다렸다는 듯 검을 꺼내들 것이다. 숨기지 않고 흘리는 살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사마휘의 무위는 초절정.

정면으로 맞붙어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은신하고 있는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나조차 기척을 감지해내지 못할 정도의 살수가 마음먹고 팀원들을 노린다면, 요행으로라도 그 손길을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저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망설이는 나를 보며 그 망설임에 자신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깨달은 팀원들이 결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나같이 죽음을 각오한 눈이다.

수없이 봐왔던, 나를 맞이했던 이들이 지어보였던 눈.

“수하들인가 보군.”

사마휘의 시선이 팀원들에게로 향했다.

지금까지 팀원들을 자연경관과 동격으로 여기고 작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그다.

고작 이류 무인 수준의 헌터들, 자신에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취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아마 얘기가 끝난 뒤에는 입막음을 위해 모두 죽일 생각이었을 거다.

그러나 내 반응과 팀원들의 결연한 다짐을 통해 서로의 관계가 단순히 함께 던전 공략을 위해 함께하고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팀원들에게도 살기를 뿌려댔다.

무언의 협박이다.

내가 거절하는 순간, 팀원들을 죽이겠다는.

‘김시연, 장만식, 김영기. 그리고 형.’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듯, 무기를 쥔 손에 힘을 더하는 그들의 모습에 손에 들린 독단이 꽤나 묵직하게 느껴졌다.

사마휘가 대놓고 협박을 해대고 있었지만 내가 충성을 맹세한다고 해서 그가 팀원들을 살려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사마휘는 피를 원하고 있다. 내가 굴복하고 나면, 존재가 불필요해진 팀원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운 좋게 살려준다고 해도 그들 또한 독을 통한 강제적 충성을 강요받을 게 뻔했다. 나와 달리, 그들은 독단을 먹는다면, 해독에 대한 기약도 없다.

적어도 화경의 경지에 올라야 해독이 가능할까 의심되는 수준의 독단이다.

팀원들이 이를 해독해내기 위해서는 수십 년 간, 매일 같이 죽을 각오로 피를 토할 정도의 수련을 하고, 벼락을 수십 번 맞고도 살아남을 정도의 운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했다.

결국, 내가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팀원들은 살아남는다 해도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장기 말로 전락할 확률이 높았다.

“생각할 시간을 줄 수는 없나.”

“허튼 수작부릴 생각 마라. 지금부터 십 분 주지. 그 때까지 대답하지 않는 다면, 저 놈들 중, 하나를 죽이겠다.”

일단은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시간을 끌어보려 했지만 사마휘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얘기가 길어질 대로 길어졌다. 더 기다려 줄 용의는 없었다.

“참을성이 없군.”

내가 짐짓 여유로운 척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속내는 달랐다.

이제 십 분 내로 결정을 내려야했다. 사마휘의 살기를 받으며 내 머리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 김시연, 내가 사마휘를 공격하는 순간, 던전 핵을 파괴해라. 장만식과 김영기는 뒤에서 김시연을 보호하고. 형은 움직이지 마. ]

팀원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실 이미 마음은 기울어 있었다. 상황이 어찌됐든, 다시는 누군가의 밑에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단지 나에겐 지켜야할 사람들이 있었고, 어떻게 해야 그들을 지킬 수 있느냐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을 뿐이다.

그리고 막 그 고민을 끝냈다.

밖에는 성현과 상은이 있다. 그 둘이 팀원들과 합공을 한다 해도 사마휘 하나 감당할 수 없겠지만 공격을 완전히 포기하고 방어에만 집중한다면, 잠시간은 버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정체를 숨긴 살수가 팀원들을 노린다면, 던전 핵을 파괴하기 전에 한 명 이상은 당할 확률이 높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내가 굴복하고 죽음을 맞이하거나, 장기 말이 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이건 다시 돌려주지.”

내 손에 들려있던 독단이 사마휘를 향해 날아갔다.

사마휘처럼 가볍게 던진 것이 아니다. 독단은 탄지공의 묘리에 내기가 실린 하나의 암기가 되어 있었다.

“놈!”

갑작스런 기습에 사마휘가 성난 고함을 터트렸다.

그러나 고함과는 달리,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사마휘가 곧장 도를 꺼내들며 단약을 쳐냈다. 아니 오히려 내 기습을 반기는 듯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챙! 챙! 챙!

절정도 아니고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다.

고작 단약 하나로 사마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허리춤에 달려있던 여섯 개의 비수 중, 세 개가 빛이 반사돼, 길게 꼬리를 늘어트리며 허공을 갈랐고, 내 신형 또한 비수의 꼬리를 따라 사마휘에게로 쏘아졌다.

“!”

사마휘의 도가 거칠게 움직이며 전방에 폭풍을 일으켰다.

세 개의 비수는 묵빛 강기가 만들어낸 폭풍을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 사마휘의 도에 차례로 튕겨져 나갔다.

“도왕문?”

놈의 거칠기 짝이 없는 도법에 감숙 일대에서 제법 유명세를 떨치던 문파의 이름이 떠올랐다.

사파 특성상, 여러 무인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도법을 익힌 무인들이 중심이 된 문파다. 그래서 이름도 도왕문.

역사도 길지 않고, 문주가 고작 초절정에 불과했기에 제(帝)나, 황(皇)이란 글자를 쓰지 않고, 왕(王)을 썼다.

지금까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거침없이 드러내는 모습으로 보아 살수가 아닌, 사파 쪽의 인물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도법을 보고나서야 확실히 떠올랐다.

도왕문의 문주 이름이 사마휘였다.

“오호. 도왕문을 알고 있었나. 감숙에 너 같은 고수는 없었던 것 같은데.”

의외라는 듯 사마휘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감숙 일대에서야 제법 유명하긴 했지만 무림 전체로 보면, 중견 문파에 불과하다. 도법만으로 자신이 도왕문 소속임을 알아보는 것은 같은 감숙의 무인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마휘의 기억 속에 태빈과 같은 무인은 없었다. 적어도 감숙에서 활동하던 무인들 중에는.

진정한 고수로 분류되는 초절정 무인의 수가 적은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것도 아니다.

한 지역으로 따지면, 백 명 가량.

무인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의 초절정 고수들은 꿰고 있어야 했다. 이름뿐만 아니라 특징까지도.

특히, 한 문파의 문주라면, 이는 필수다. 그래야, 괜한 마찰을 피할 수 있으니.

“크악!”

나는 대답 대신 검을 찔러 넣었다.

놈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감숙에서 활동하는 무인이 아니라, 놈이 마지막 가는 길의 안내자였으니.

물론 그 사실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순간 떠오른 기억에 흘린 말일뿐이다.

내가 독단을 내던진 순간, 팀원들은 던전 핵으로 몸을 날렸고, 여전히 몸을 숨기고 있는 살수는 더 완벽한 기회를 노리는지, 아직까지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 그가 개입해 올지 알 수 없는 이상, 한가롭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

그 순간이었다.

내가 사마휘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는 순간, 여태 자신을 꽁꽁 숨기고 있던 놈이 존재를 드러냈다.

사마휘가 옆에 있던 나무 밑동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동시에 날카로운 기운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사마휘를 공격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덕분에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기운을 알아차린 것과 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살수는 사마휘를 미끼로 나를 노렸다.

피한다면, 피해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사마휘를 공격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아니 포기한다 해도 완벽히 피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만큼 완벽한 순간에 이뤄진 암습이었다.

“크윽!”

사마휘의 어깨가 갈라지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살수였다면, 억지로라도 집어삼켰을 신음을 그는 숨김없이 토해냈다.

독단과 비수, 그리고 찌르기로 이어진 기습.

앞서 두 개의 공격은 잘 막아내지만 아쉽게도 마지막 찌르기까지는 완전히 피해내지 못했다. 심장을 노린 것을 어깨를 내주는 선에서 그친 것이 전부였다.

“...”

그리고 내 입가에서도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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