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화. 암습(4).
사기로 인해 하루 늦게 수련을 시작하게 됐음에도, 이는 예상했던 삼십일 보다 열흘가까이 빠른 속도였다.
사기를 정화하기 위해 자연지기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덕분이었다. 악재로만 여겼던 사기의 존재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이십일 동안 단전에 들이 찬 기운이 넘칠 듯 넘실거렸다.
때가 무르익었음을 깨달은 나는 운기를 통해 기운을 인도했고,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려진 대해와 같은 기운이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목표는 명확했다.
백회혈.
쿠르릉!
머리로 몰려든 기운이 동시에 백회혈을 들이쳤다.
백회혈은 임독양맥을 타통했을 때보다 더 단단한 벽이 가로 막고 있었지만 기운은 단숨에 벽을 허물어뜨렸다.
과거, 신기루와 같은 깨달음의 실마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삼일 간 무아지경에 빠져 겨우 성공했던 것에 비하면,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쉽게 무너진 벽이었다.
삼화취정(三化聚頂).
백회혈이 개화되고 상단전이 열리며 내 머리 위로 새어나온 기운이 세 개의 꽃봉오리와 같은 환영을 그려냈다.
이내 꽃봉오리는 다시 백회열을 통해 내 몸으로 들어왔고, 기운은 내 인도에 따라 대주천을 거친 뒤, 다시 단전으로 돌아왔다.
“후우우...”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뜬 눈에선 일순 안광이 폭사됐다 사라졌다.
안광이 사라진 자리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현기가 깃든 눈이 남았다.
“축하드립니다.”
모든 과정을 끝마친 뒤, 나에게 팀원들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삼화취정과 같은 단계를 알지는 못하지만 신비롭다 못해 경건해 보이는 모습을 통해 내가 성취를 이뤄냈음은 안 것이다.
“어...?”
목표했던 날보다 빠르게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고작 십일 가량에 불과했지만 살막이라는 위협적인 적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하루라도 빨리 본신의 무위를 되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분명 기꺼운 일이었다.
“고맙다.”
나는 만족스러움에 미소로 화답했고, 지금껏 보지 못했던 내 미소에 당황한 듯,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팀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
태빈을 찾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사마휘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산을 올랐다.
그가 오르고 있는 산은 도봉산.
살이 쏘아지듯 빠른 속도로 수 미터씩 질주하고 있음에도 사마휘의 발밑의 수풀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과연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답게 극상의 경지에 오른 초상비였다.
까드득.
“던전에 틀어박혀 있었다니.”
사마휘가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이를 갈았다.
고작 절정 무인 한 명 때문에 추영대의 대주인 자신이 이십 일이 넘게 기다렸다.
사실 급할 것 없는 일이긴 했지만 앞서의 실패로 사마휘 스스로 만들어낸 조급함 때문이다.
행여나 막주의 분노가 터질까 조마조마한 나날들에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가 쌓였고, 그 분노의 대상은 자연 태빈이 되었다.
물론 사사로운 감정으로 임무를 그르칠 수는 없으니, 포섭을 우선으로 하겠지만 만약 거부한다면, 살아있음을 후회하도록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저 연놈들은?”
몇 걸음 떼지도 않은 것 같은데, 사마휘는 순식간에 산 중턱에 도착했고, 던전과 던전을 지키고 있는 성현과 상은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을 발견한 사마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일전에 태빈을 도와 자신의 일을 방해한 연놈들이다. 당시에는 우연을 가장했지만 역시나 협회에서 태빈을 보호하고 있는 게 맞았다.
“크크. 잘됐군.”
사마휘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임무의 실패에는 차예린이 자신을 막아선 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둘의 방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저 둘만 아니었다면, 문환 일행이 태빈을 제압할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니, 곱게 지나칠 생각이 들지 않았다.
[ 조용히 처리해야 하는 일 아니었나. ]
사마휘의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살기에 여전히 모습을 감추고 있던 왕추가 전음을 보내왔다.
무림인과 관련된 임무는 언제나 은밀히 처리해왔다. 막주는 아직까지도 살막의 정체가 수면위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때문에 차후에 그들의 실종과 사망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왕 살수는 나설 것 없소.”
[ 개인적인 감정은 임무에 방해만 될 뿐이다. ]
왕추의 말에 사마휘의 살기가 가라앉았다.
자신이 추영대의 대주이긴 하지만 특급 살수인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말이 맞다. 지금은 저 연놈들을 죽이는 것보다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어차피 던전을 지키고 있는 것 같으니, 나올 때 처리하고 가고 늦지 않았다.
“후... 알겠소.”
사마휘는 성현과 상은의 눈을 피해 던전에 진입했다. 고작 절정, 게다가 반쪽짜리인 두 사람의 이목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성현과 상은의 곁으로 한 줄기 바람이 스쳐지나갔지만 그 둘은 사마휘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산 바람이 한 번 불어왔구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때까지도 왕추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사마휘가 움직였을 때와 달리, 바람 한 줄기조차 불어오지 않았다.
***
이제 완전히 이류의 경지에 오른 팀원들의 무공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전과 다르게 거칠게 몰아붙였다. 결코 내 미소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는 것에 대한 사감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헉... 헉... 죽을 것 같아...”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공격을 퍼부어 댄 탓에 팀원들은 살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 결과, 내가 손을 멈춘 순간, 세 명 모두 물 밖에 나온 물고기마냥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그래도 확실히 강해진 거 같지 않아?”
김영기의 물음에 잔뜩 찡그린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장만식과 김시연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C급 헌터들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자신감이 들 정도다. E급으로, 제대로 된 헌터 대우도 받지 못하고 짐꾼으로 전전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강해진 것이다.
당장 죽을 만큼 힘들어 바닥에 쓰러져 있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직 웃을 힘은 남았나 보군.”
팀원들의 귓가에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닙니다.”
팀원들이 황급히 안색을 바꿔 죽을상을 해보였다.
낯선 모습에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고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해오다니, 자신들의 팀장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으로 태빈의 인간적인 면을 본 것 같아서 좋았다.
“다들 당장 일어나라.”
“네...?”
“침입이다.”
던전 전체에 넓게 퍼져있던 내 기감에 두 개의 기척이 걸려들었다.
기척은 던전에 진입해 처음 도착했던 장소에서 시작됐다. 누군가 던전에 진입했음을 의미했다.
분명 A급 헌터인 성현과 상은이 던전 밖을 지키고 있다. 동기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떠한 접근도 허하지 않기 위해.
그럼에도 둘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는 것은 그들이 A급 헌터 둘을 무력화 시켰거나, 이목을 속이고 던전에 진입했다는 뜻이다.
A급 헌터가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강자가 둘.
굳이 보지 않아도 그들이 어디 소속인지는 쉬이 알 수 있었다.
살막. 그들이 나를 찾아 온 것이다.
순간, 두 개의 기척 중,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리 기감을 집중해도 사라진 기척의 흔적은 잡을 수 없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내가 놓치다니. 아무래도 살막이 단단히 준비를 한 듯했다.
“끄응...”
팀원들은 낮게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앓는 소리를 내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팀원들이 지쳤다.
멀쩡해도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을 테지만 고작 이류 수준에 지치기까지 한 탓에 지금은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오호. 그 사이에 성취가 있었나보군.”
던전 입구에서부터 자신의 존재를 감추지 않고 다가온 하나의 기척.
사마휘가 고작 이십일 사이에 달라진 내 기도를 눈치 채고는 감탄을 터트렸다.
곧장 적의를 드러내진 않았다. 전에 문환이 그랬던 것처럼 시작은 대화였다.
내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이상, 혼자서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음에도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살막인가.”
나는 날은 세운 채, 사마휘를 맞이했다.
그를 향해 세운 날이 아니다. 드러난 적보다는 드러나지 않은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내가 기척을 읽어내지 못할 정도의 고수가 몸을 숨긴 채, 나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했다.
“이미 알고 있으니, 얘기가 수월하겠군. 한 번만 묻지. 살막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왜 그렇게 나에게 집착하는 거지?”
나는 대답 대신 반문했다.
국가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단체다.
내가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하나, 살막 전체 전력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다.
굳이 왜 나를 끌어들이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게 될 거다. 그러자면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무림보다 넓은 세상이니까. 너에게 기회를 주는 거다. 함께 영광을 누릴.”
“나 하나쯤은 없어도 문제 될 거 없지 않나.”
“뭐 그렇지. 그런데, 가만 놔두면, 방해가 될 수도 있겠지.”
요컨대, 자신들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서 성장할 존재가 두렵다는 거다.
당장은 절정의 경지에 불과하지만 언제고 화경, 혹은 그 이상의 경지에 올라 자신들을 방해하게 될지 모르니, 그전에 포섭하거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같은 무림의 동도끼리 돕고 살면 좋지 않겠나.”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흥. 전에도 그렇게 오리발을 내밀더니, 변함이 없군.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건가.”
사마휘가 코웃음을 쳤다.
문환 일행을 죽일 때의 무공, 고작 이십일 만에 이뤄낸 성장 등. 이 세계의 헌터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정황들이 태빈이 무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끝까지 모른 체를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쉽군. 머리가 장식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사실 나도 더 이상 모른 체 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모른 체 할 이유가 없었다.
“이놈이! 대답해라! 살막에 충성할 건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을 건지.”
“큭. 그렇게 나와야지, 언제부터 살수들에게 그런 의(義)가 있었다고.”
실소가 흘러나왔다.
고작 삼만 냥에 이십 년간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나를 죽이려 했던 자들이 살수다.
삼만 냥이 적은 돈이라곤 할 수 없지만 흑도 무리도 돈에 동료를 팔아넘기는 짓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뒤로는 몰라도 대놓고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은 오로지 살수뿐이다. 그들에게 한 푼 값어치도 없는 동도와 같은 말은 지나가는 개만도 못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대답은?”
사마휘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