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50화. 암습(2).
나는 던전 내의 기, 마나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이상 현상이 발생했던 던전의 마나는 숨을 쉬듯 움직였다. 같은 이상 현상이 발생한 던전인 만큼, 공통점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死)기?’
던전에 진입해서 가장 처음 느낀 것은 사기였다.
죽은 기운.
자연의 기운을 머금은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기가 던전 내에 퍼져있었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기운을 느낀 적이 있었다. 바로 나무가 있던 던전이다.
주변의 생기를 모두 빨아 먹은 나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죽어있던 그곳에도 사기가 가득했다.
취익...취익...
나무와 같은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감을 끌어 올린 채, 걸음을 옮기다 보니 서른 마리가량의 오크가 보였다.
내가 느꼈던 사기는 그 오크들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강인한 오크 주둔지 >
이번에 내가 발을 들인 D급 던전 이름이다.
7급으로 분류되는 오크는 리자드맨과 더불어 D급 던전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몬스터로, 스스로를 전사로 여기며 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싸움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오크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크들과는 피부색이 전혀 달랐다.
붉은 색.
피처럼 붉은 피부를 가진 오크들이 누런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크들의 눈에는 먹물이라도 짜 놓은 듯, 검은 눈자위만 존재할 뿐,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온통 검은 그 눈은 이지를 잃고 술자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언데드라 부르는 몬스터의 특징과도 같았다.
“분명 < 강인한 오크 주둔지 >였는데.”
“이상 현상이군요.”
의문을 표하는 장만식과 달리, 김시연은 상황을 금세 파악했다.
진입하기 전, 내게 던전의 설명을 들은 그녀다.
이상 현상이 발생은 공략팀의 실패를 통해 알려진다.
단순한 실수로 인한 공략 실패일 수도 있지만 충분히 공략 가능한 팀과 뒤이어 진입한 구조대까지 돌아오지 못했다면, 더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 실패들이 언데드화 된 오크들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수가 너무 적은데?”
그렇다고 의문이 가시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공략팀과 구조대까지 실패로 몰아가기에는 오크들의 수가 너무 적었다.
언데드는 이지를 상실해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생전보다 능력이 떨어진다.
고작 오크 언데드 서른 마리에 공략팀과 구조대까지 실패했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놈들이 전부가 아니다.”
그 의문은 내가 해결해주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고작 열 마리가 전부지만 느껴지는 기척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앞에 있는 서른은 우스울 정도로 많은 수의 언데드들이 주변을 에워싼 채,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물론 오크 따위가 죽음마저 거스른 언데드가 되었다고 해도 나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팀원과 형에게는 한순간에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강력한 적이었다.
수백의 적들 사이에서 내가 그들을 전부 보호해 줄 수 없으니, 각자 스스로를 지켜야했다.
“네.”
놈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에 전원이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의문은 전투가 끝난 뒤에 해결해도 늦지 않았다.
취익... 취익...
크어어...
그 사이, 사방에서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의 모습을 한 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부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앞서 공략에 나섰던 공략팀과 구조대의 헌터들로 보였다.
“이럴수가...”
팀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앞서 진입했던 헌터들이 단순히 공략에 실패한 것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안식에 들지 못하는 언데드 몬스터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정신 차려라!”
팀원들을 향해 일갈을 날린 나는 망설임 없이 놈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오크들은 언데드화 됐음에도 약체로 평가되는 구울에 불과했지만 인간 형상의 언데드들 중에는 자신의 머리통을 들고 있는 듀라한 십여 마리와 상급 언데드인 데스나이트도 한 기 섞여 있었다.
팀원들에게만 맡기기에는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사이사이 섞여 있는 듀라한이나 다크나이트는 팀원들이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걱. 서걱.
나는 팀원들에게 버거울 정도의 힘을 가진 듀라한과 데스나이트들을 우선순위에 두고 움직였다.
D급 헌터와 비견되는 힘을 가진 장만식과 김시연도 버거운 몬스터들이었지만 단 한 마리도 내게서 일합 이상을 버텨내지 못했다.
언데드들 사이에서나 강한 개체일 뿐이지, 내 입장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앞에 막아!”
“태성씨! 물러나요!”
팀원들도 그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지, 제 몫을 충분히 했다.
형, 태성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오크 구울들을 상대해 나갔다.
크륵...
오크 구울들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벌써 백여 마리.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하던 오크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영원한 안식을 맞이했다.
“음?”
주위를 에워싼 언데들이 절반쯤 줄어 그 포위망이 조금은 헐거워졌을 때, 갑자기 전투가 멈췄다. 끝없이 달려들던 언데드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전사임을 자처하며 전투 중에 죽는 것을 명예로운 죽음으로 여기는 오크나, 이미 이지를 상실한 언데드들이 내린 판단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아직도... 생(生)자들이... 남아있었나...”
물러난 언데드들 사이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치.”
기억 속에 있는 몬스터의 이름이 내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전신을 가린 로브 때문에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드러난 손이나 얼핏 보이는 뼈밖에 남지 않은 얼굴, 그리고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생을 위해 자신의 몸을 언데드화 한 리치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수백에 달하는 오크들과 헌터들이 어째서 언데드가 되어 버렸는지 설명이 됐다.
눈앞의 몬스터가 정말 리치라면, 오크와 헌터들을 언데드로 바꾸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리치? 어떻게 D급 던전에서 리치가...”
김시연이 침음을 흘렸다.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2급으로 분류되는 리치는 수많은 언데드 몬스터 가운데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한 몬스터다.
고작 D급 던전에서 볼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리 이상 현상이 발생한 던전이라 해도, 리치의 출현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네가 이상 현상의 원인인가?”
“이곳은... 실험장... 생자는 허락되지 않는다...죽어라...”
내 물음에 리치가 비어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죽음을 담고 있는 사자의 기운이었다.
이백에 달하는 언데드들이 풍기는 것보다 짙은 사기가 리치 한 마리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피해라.”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기운에 나는 경고와 동시에 리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툭... 데구르르...
리치는 무방비한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고, 내 검은 정확히 놈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수백의 언데드들을 만들어 낸, 2급으로 분류되는 몬스터치고는 너무 허무하게 머리가 떨어져 내렸다.
“네...놈은... 제법 강하구나... 좋은... 재료가 되겠어... 나머지는... 쓸모없군...”
그러나 리치는 목이 잘려나갔음에도 죽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에서 여전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검은 기운에 의해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머리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미친.”
처음 보는 기괴한 모습에 장만식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리치는 육신을 죽여도 죽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달랐다.
리치는 라이프 배슬을 부수지 않는 이상, 죽일 수 없는 존재다. 게다가 라이프 배슬의 위치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자신의 생명과 마찬가지니, 최대한 꽁꽁 숨겨 놓기 때문이다.
때문에 보통은 사제 계열을 직업을 가진 헌터들이 리치의 육신을 잠시간 소멸시키는 방법으로 공략을 진행했다.
불사의 존재지만 사라진 육신을 수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 사이 던전 핵을 부숴 공략을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제 계열의 헌터가 없었다. 눈앞의 리치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불사(不死)의 존재를 보는 그의 눈에는 두려움이란 감정이 피어올랐다.
“나는... 불멸의 존재다...”
리치의 말에 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리치가 죽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놈의 목에는 라이프 배슬이 없었으니.
그저 실험을 했을 뿐이다. 정말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지.
콰직.
호기심은 끝났다.
나는 무영보를 밟으며 바람과 같이 움직였고, 내 검은 섬전과도 같이 리치의 골반을 꿰뚫었다.
“어떻게...”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리치의 몸이 부서져 내렸다.
리치는 몰랐겠지만 나는 놈의 라이프 배슬이 골반 뼈 사이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사기 가득한 리치의 몸에서 유일하게 골반에서만 생명력이 맥동하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취익...
가장 위험한 존재였던 리치가 죽었다.
아직 백여 마리의 언데드들이 남았지만 듀라한과 데스나이트 같은 상급 언데드는 모두 내 손에 안식을 찾은 뒤였기 때문에 정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마리를 제외한 모든 언데드들이 잃어버린 안식을 찾았다.
***
막주의 분노를 간신히 피한 사마휘는 지체 없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이미 몬스터의 소굴이 되어버린 땅을 지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중국과 한국 사이의 항공로는 아직 안전한 편에 속했다.
한국에 도착한 것은 사마휘 혼자였다. 막주 여문휘가 데리고 가라고 했던 왕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특급살수를 눈으로 찾으려는 건 미련한 짓이다. 굳이 찾지 않아도 알아서 잘 따라오고 있을 터였다.
“묵영대주 사마휘다.”
사마휘는 곧장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암영대원을 찾았다.
신분을 밝히자, 눈앞의 암영대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리 소속이 다르다 해도 일개 대의 대원이 대주를 상대로 보이기에는 무례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사마휘는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혹여 적에게 붙잡혀도 비밀을 토설하지 않으려 스스로 혀를 자른 이들이다. 대답을 하지 못함은 당연했다.
약물이나 마법으로 정신을 망가트릴 수 있는 세상이지만 암영대원들은 과거에나 지금에나 변함이 없었다.
“김태빈의 위치를 파악해라.”
당시에는 우연이라 치부했지만 협회의 헌터와 S급 헌터가 그 자리에 있던 게 우연일 리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며칠 자리를 비운 사이, 김태빈은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이 나라의 협회가 움직였음이 분명해졌다.
한국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작은 나라지만 의외로 헌터들의 힘은 강한 나라다.
이미 한 번 접촉했다 실패한 상황에서 그런 나라의 협회가 움직였으니, 다시 놈의 행적을 찾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래도 암영대가 나섰으니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