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화. 암습.
이 세계에선 보기 힘든 낯선 장소였다.
단순히 오래된 나무를 깎아 만든 커다란 탁자뿐이었다면, 엔틱한 느낌을 살린 가구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단에 놓인 왕좌를 연상케 하는 황금 빛 의자, 그리고 그 의자를 두른 살아있는 듯, 머리가 그대로 박제된 호랑이 가죽은 탁자와 더불어 낯선 느낌을 배가시켰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러한 가구들이 놓여 있는 장소가 평범한 방 안이 아니었다.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다는 점은 방과 다르지 않지만 종유석과 같은 것들이 매달려있는 사방을 가로 막은 벽은 자연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다.
동굴.
그렇다. 과학이 발전한 현대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가구들이 놓인 곳은 동굴 안이었다. 그나마 종유석 사이사이 달려있는 전구가 이 이질적인 장소의 시간대가 현대를 벗어나지 않았음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사마휘. 문환이 죽었다 들었다.”
그러한 동굴 안에 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좌와 같은 의자에 앉아, 등 뒤에 박제된 호랑이 머리를 두고 자신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마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사내.
동굴 안이라 그 소리가 더 울렸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사내의 목소리에는 감히 흉내 내지 못할 무게감이 서려있었다.
“죄송합니다. 막주. S급 헌터 하나가 끼어드는 바람에...”
사마휘가 고개를 조아린 채, 답했다.
협회 헌터들도 개입하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S급 헌터 차예린만 아니었다면, 문환이 죽을 일은 없었다.
사마휘는 문환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차예린에게 전가했다.
“...”
사마휘가 막주라 칭한 사내.
이 세계에 베일에 싸여있는 단체인 살막의 막주 여문휘가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사마휘를 바라봤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빛에 사마휘의 전신에 한기가 일었다.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라는...”
“그래. 내가 그랬지. 조용히 처리하라고. 내 사마 대주의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줄은 몰랐군.”
여문휘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러나 듣고 있는 사마휘에게는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고저 없는 목소리에는 질책이 담겨있었다.
고작 S급 헌터 하나가 개입했다고 조용히 처리하지 못했냐 하는.
쿵!
“죄... 죄송합니다.”
사마휘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소름이 일 정도의 한기를 느끼면서도 사마휘의 온몸은 고열에 녹아내리듯 흘러내리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평온함을 가장한 여문휘의 분노에 S급 헌터도 아래로 볼,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임무는 실패한 건가?”
“아... 아닙니다.”
여문휘가 물었다. 실패했냐고.
굳이 묻지 않더라도 실패라는 것쯤은 여문휘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물었다는 것은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마휘는 두려움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렇군. 그런데, 여기서 뭐하는 건가? 임무 중에.”
명백한 축객령이다.
이 숨막히는 순간, 장소를 일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사마휘는 그 축객령이 기꺼웠다.
“아...”
“왕추를 데려가라.”
“감사합니다. 막주!”
왕추.
살막에 다섯뿐이었던, 지금은 셋뿐인 특급 살수다.
특급살수는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화경의 무인까지도 노려 볼 수 있다는 경지에 오른 살수에게만 내려지는 칭호다.
물론, 노려볼 수 있다는 거지,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왕추가 얼마나 대단한 살수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사마휘는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도 모자라, 특급살수인 왕추까지 지원해 준 여문휘에게 감사를 표하며 물러났다.
“흠... 생각이 많아졌어...”
홀로 남은 여문휘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사마휘가 보였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거라면, 변명에 앞서 머리를 찧었을 것이다.
그리 가르쳤고, 그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변명이 앞섰다. 과거와는 다르기에 당연하겠지만 달갑지 않은 변화였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내칠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 사마휘 정도의 무인을 키워내는 건 결코 쉽지 않으니까.
한 손으로 턱을 괸 여문휘의 두 눈이 조용히 감겼다.
***
협회에서 준비한 던전은 도봉산에 있는 D급 던전이었다.
산 속에 위치해 접근이 까다로운 것은 둘째 치고, 이상 현상이 발생한 탓에 찾는 이가 없는 던전이다.
협회가 굳이 이상 현상이 발생한 던전을 준비한 까닭은 내가 직접 요구했기 때문이다.
일전에 이상 현상이 발생한 던전의 동기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봤던 마나의 움직임, 마치 던전이 숨을 쉬는 듯 느껴졌던 그 때의 기억에, 이상 현상이 발생한 던전의 내부를 꼭 한 번 경험하고 싶었다.
협회는 내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가뜩이나 던전 공략에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한 던전 하나를 처리할 수 있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목표한 바를 이루시고 무사히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협회는 동기화가 일어날 때까지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갑작스레 동기화가 발생한다면, 다소 위험이 따를 텐데도 협회는 이를 감수하기로 했다.
그만큼 나에 대한 기대가 크고, 바라는 게 많다는 의미 일 수도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빚을 진만큼만 갚을 생각이다.
“열흘에서 오십 일이라.”
도봉산의 D급 던전이 생성된 것은 사일 전.
동기화가 보통 이주에서 두 달 사이에 일어나는 것을 고려하면, 적게는 열흘에서 길게는 오십 일가량이 남았다. 물론 보통의 경우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 기간의 중간 값, 한 달을 생각하며 초절정을 목표로 두었다.
살수는 집요하다. 살막이 한 번 나를 목표로 움직인 이상, 이대로 포기 할 리 없었다.
때문에 일단은 한 달 동안 수련에 매진 한 뒤, 살막의 추후 움직임에 따라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본신의 무위를 완전히 되찾는다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화경의 경지는 고작 열흘에서 오십일의 노력으로 되찾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무려 이십 년을 살아남고자 밤낮없이 발버둥 친 끝에 간신히 닿은 경지다. 이미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세월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는 없다.
던전 안에 가득한 기운이 그 시간을 앞당겨주기는 하겠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급한 대로 초절정의 경지에만 오른다 하더라도 화경의 무인을 제외하곤, 나를 위협할 존재가 없을 테니, 아쉬운 대로 이를 목표로 삼았다.
“B급 이상의 던전이었다면, 직접 영약이나 내단을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던전은 어렵지 않게 준비해주었지만 영약이나 내단은 협회도 당장에 구할 수 없었다.
시일이 더 필요하다 했다.
이미 한 번, 내단의 효과를 톡톡히 경험한 나로서는 이를 구하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협회가 준비한 던전이 B급 이상이었다면, 직접 얻는 것도 기대해 볼 수 있겠지만 D급 던전에 불과했다.
급하게 준비한 탓에 이런저런 여건을 고려할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애초에 A급 헌터 한 명이 B급 던전을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만큼, 아쉬움에 나온 말에 불과했다.
설령 공략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협회 측에서 상위 등급의 던전에 태빈을 몰아넣는 위험을 감수 할리 없었다.
SS급 이상을 기대할 수 있는 헌터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잃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인재였다.
***
“후... 시작부터 산행이라니.”
뒤에서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장만식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도봉산의 던전까지 길이 나있지 않은 산을 타야 했다.
헌터인 이상, 아무리 험준한 산행이라고 해도 고될 리 없지만 체력은 소모된다.
물론 그러한 점보다는 단순히 산행을 귀찮아하는 기색이 가득한 투덜거림이었다.
“좋기만 하네.”
“아직 산을 즐길 줄 모르네.”
장만식과는 달리, 김시연과 김영기는 나름 산의 풍취를 즐기고 있었다.
녹음 가득한 공간에서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며 지구에서 그나마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기를 숨결에 담았다.
“...”
그리고 가장 후미는 형이 말없이 산을 타고 있었다.
내 뒤에는 그렇게 네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살막은 거대한 단체다.
내가 본신의 무위를 되찾는다 해도, 그들이 마음먹고 나를 죽이고자 한다면, 상당한 위협이 될 것이다.
그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내가 아닌, 가족이.
당장은 협회가 힘을 써주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그들의 손을 빌릴 수 없다. 지금의 호의가 나를 묶을 족쇄로 변할지 모를 일이다.
때문에 협회 외에 가족을 지킬 힘이 필요했고, 내가 선택한 방법이 팀원들과 형이었다.
나는 나를 갈고 닦음과 동시에 그들 또한 성장시킬 생각이었다. 단숨에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하겠지만 한계까지 몰아붙인다면, 일류까지는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들에게는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이 되겠지만.
“수련을 하러 갈 생각이다.”
나는 팀원들에게 뜻을 물었고, 말에 그들은 기꺼이 수락했다.
살막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음에도, 팀원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나에게 무공을 배운 순간부터 나를 따르기로 결정한 이들이다. 한 명이 낙오하긴 했지만 나머지 셋의 마음은 위기가 닥쳤다고 바뀔 만큼, 약하지 않았다.
“다 왔다.”
산행은 길지 않았다.
거의 뛰다시피 움직였기 때문에 고작 800m도 되지 않는 산의 중턱에 있는 던전까지는 한순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태빈 헌터.”
살막과 타이탄에서 찾아왔을 때, 나에게 도움을 줬던 성현과 상은이 나와 일행을 맞이했다.
성현과 상은, 협회는 고작 D급 던전에 A급 헌터를 둘이나 파견했다.
그들이 맡은 역할은 단순히 던전의 보안 및 태빈의 지원.
잡무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인력낭비로까지 느껴질 정도의 과한 지원이었지만 협회장 김원철은 자신이 말한 대로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은 내키지 않아 했지만 맡은 바 임무에는 충실했다.
“던전에서 나오실 때까지 저희가 이 지역을 통제할 것입니다. 진입하기 전에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필요한 준비는 이미 마친 상태다.
기존의 공략과는 달리, 짧게는 열흘에서 길게는 두 달 가까이 던전에 머무르는 일이다.
식량은 물론이고, 옷가지부터 잠자리를 위한 텐트까지 들고 온 짐만 한 가득이다. 조금 과장하면, 거의 집을 통째로 옮기는 정도.
두 사람의 지원은 고맙지만 더는 필요한 게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태빈의 무위를 봤던 성현이다.
D급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이상 현상이 발생한 던전인만큼, 일말의 걱정은 있었다.
“가자.”
나를 포함한 다섯은 잠시의 휴식도 없이 곧장 던전에 진입했고, 익숙한 마나의 일렁임과 함께 새로운 환경이 눈앞에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