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48화. 비밀(4).
협회, 나아가 세계가 살막과 타이탄의 존재를 묵인하고, 감추고 있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히 발생할 혼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혼란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헌터들이 강해질 수 있다면, 막을 이유가 없었다.
헌터들이 강해지는 만큼, 던전으로 초래되는 위험이 낮아질 테니 말이다.
국가의 주요 인사들이 살막과 타이탄의 존재를 비밀에 부친 것은 그들의 힘이 더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세계가 그들의 존재를 숨긴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텐데요? 단순히 숨긴다고 숨겨진다는 것도 말이 되질 않고요.”
각 국가가 살막과 타이탄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이유는 알았다.
그러나 두 단체는 국가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살막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쳐도, 타이탄은 종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 일개 국가가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면, 막는다고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두 집단이 가진 힘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국이 그들의 활동영역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살막은 중국에 거점을 두고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기 때문에 파악된 것이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림첩으로 존재가 드러나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 한,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간간히 살막의 소행이라 드러나는 일들 또한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나기에 한국에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다면,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타이탄은 유럽을 중심으로 세를 불려나가고 있었고, 유럽 전역은 그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들의 존재가 위험하긴 하지만 머나먼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알고 있는 이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경계하고 있지만 모르는 이들은 알 수조차 없는 것이다. 정보는 철저히 통제되고 있으니.
“사실 지금은 살막보다는 타이탄을 더 위험한 단체로 보고 있습니다.”
여전히 존재를 숨긴 채, 암살 등으로 소수의 피해만을 주고 있는 살막보다는 국민들을 현혹해, 국가 전반을 뒤흔들고 있는 타이탄이 더 위험한 존재다.
이미 타이탄이 내세운 종교를 믿는 광신도들이 전 세계적으로 억이 넘어섰고, 그 중 헌터들만 천만에 달할지도 모른다고 추정되고 있다.
1억.
어떻게 보면, 한 나라 인구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지만 대격변 발생과 동시에 세계의 인구가 절반으로 수직하락하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의 절반가량이 사라진 것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만은 않은 수였다.
“아직은 유럽에 국한되어 있긴 하지만 그들의 포교활동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미국과 남미 지역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죠. 중국 인근의 아시아권에는 살막의 영향인지, 아직 발을 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말입니다.”
살막은 여전히 음지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타이탄은 점차 양지로 나오고 있는 형세였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위험하긴 하지만 당장 보이는 적이 국가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위협이 되는 존재다.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살막보다는 타이탄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렇군요.”
아쉽지만 타이탄을 중점으로 한 이야기는 내 관심 밖이었다.
이계의 존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타이탄의 존재가 흥미롭긴 하다.
하지만 살막은 전생에 나와 직접 연관이 있던 이들이 만들어낸 단체다. 이번 생에도 악연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내 관심은 오로지 살막에 있었다.
“흠... 저희 협회가 김태빈 헌터에게 바라는 건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한국을 위해달라는 것. 이 한 가지만 지켜주신다면, 협회는 김태빈 헌터를 적극 지원할 겁니다.”
일견 무심해 보이는 내 반응에 잠시 입을 닫았던 김원철이 나를 만나고자한 본래의 목적을 털어 놓았다.
살막과 타이탄에 대한 설명은 부가적인 것을 뿐, 지금의 만남은 김태빈이란 헌터를 완전히 아군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지원이요?”
“예. 김태빈 헌터가 필요로 하는 최대한의 지원을 할 예정입니다.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금 김태빈 헌터는 과거의 능력을 모두 찾은 상태입니까?”
“아닙니다.”
“역시. 무서우리만치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예상은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김태빈 헌터가 가지고 있던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하군요.”
김원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왔다.
화경의 경지.
마땅히 비교할 대상이 없는 세계이기에 설명하기 난해한 물음이었다.
잠시 답을 찾아 헤매던 내 시선이 차예린에게로 향했다.
“열 명, 아니 백 명 정도.”
“네?”
뜻 모를 말에 김원철이 되물었다.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차예린도 자신을 향한 시선에 의아한 눈치였다.
“같은 수준이라면, 백 명 정도는 무난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저...정말입니까?!”
“허. 지금 저를 보고 하신 말씀이신가요?!”
그제야 내 말뜻을 이해한 김원철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차예린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날카롭게 소리쳤다.
끄덕.
전혀 믿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화경의 무인은 홀로 수십의 초절정 무인을 감당할 수 있다. 하물며 반쪽짜리임에야, 그 이상, 백 명도 충분히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무슨 그 말도 안 되는!”
“SS급... 아니, 그 이상...”
차예린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한지,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김원철은 벌어져 닫히지 않는 입으로 중얼거렸다.
“김태빈 헌터가 과거의 힘을 되찾는데, 어떠한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들을 또한 온 힘을 다해 살막의 손에서 지켜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김원철은 다시 한 번 다짐하듯,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했다.
협회의 일부는 의문을 표하겠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
S급만 해도 대어라 생각했는데, 그 이상이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동시에 불안한 마음도 없진 않았다. 힘을 되찾고, 협회를, 한국을 배신하지는 않을까 하는.
S급 헌터라면, 걱정은 할지언정, 불안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빈이 진정 SS급이라 일컬어지는 천외천의 힘을 가졌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전 세계를 통틀어 단 세 명밖에 없다고 알려진 SS급 헌터다. 정확히 드러난 적은 없지만 그들 개개인의 힘은 국가라는 틀로 담아낼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냥 S급 헌터가 일인 군단이라면, SS급 헌터는 핵이라고 할까.
그렇기에 불안한 것이다. 태빈이 본래의 힘을 되찾고 한국에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어졌을 때, 돌변하진 않을까 하고.
실제로 세 명의 SS급 헌터 가운데, 두 명의 SS급 헌터가 기존의 국적을 버렸다.
아프리카의 희망이었던 가나의 검사 나젤린과, 러시아의 얼어붙은 대지를 녹였던 화염 마법사 아길라가 지금은 각기 타이탄과 미국에 몸담고 있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금의 나는 살막을 상대하기에는 한 없이 약하다.
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살막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보다 빠르게 과거의 무위를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협회가 적대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협회장에게 다시 최소한의 예를 갖췄다.
내가 갑자기 예를 차렸지만 이를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태빈의 수긍에 김원철은 곧장 머리를 흔들어 불안감을 털어냈다.
섣부른 걱정이다.
태빈은 가나의 나젤린과 러시아의 아길라르와는 다르다.
나젤린은 대격변으로 국가를 잃었고, 아길라르는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들이 국적을 버리고 전향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돌아갈 국가가 없었고, 곁에 남은 가족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태빈에게는 가족들이 있다.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진정한 가족이라 여길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둘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 차이에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태빈이라는 가능성을 포기하는 방안도 있었다.
지금 태빈의 능력은 A급 헌터의 수준.
제거 할 수도, 성장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협회장은 태빈의 성장을 택했다.
이상 현상, 그리고 살막과 타이탄의 준동.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강한 헌터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했다.
“필요한 것들을 말씀해주시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던전. 던전이 필요합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이미 깨달음은 화경의 경지다. 부족한 것은 내공뿐.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고작 하루, 이틀이 아닌, 오랜 시간 집중을 깨트리지 않고 마음 놓고 내공을 쌓을 수 있는 던전이었다.
“아. 영약이나 내단 같은 것도 구해줄 수 있습니까? 2급 몬스터 이상, 가능하다면 1급 몬스터의 것이면 좋겠는데...”
내가 덧붙였다.
일전에 나무에게서 내단을 얻으면서 이 세계에도 영약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영약과 내단은 불치병도 치료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고, 일부는 실제로도 그러한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수십억이 우스울 정도의 엄청난 금액에 거래되고 있었기에 나는 영약과 내단을 구하는 것을 포기했었다.
만약 협회를 통해 영약을 얻을 수 있다면, 과거의 무위를 되찾는데 걸리는 시일을 조금은 앞당길 수 있을 터였다.
“던전은 얼마든지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동기화가 일어날 때 까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손써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영약은... 애초에 흔한 물건도 아니고, 최근 상위 등급 던전 공략이 드문 탓에 시중에 풀린 물건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최대한 노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던전이라는 간단한 요구에 자신감이 넘치던 김원철의 표정이 한순간에 곤란해졌다.
최근들어 빈번해진 이상 현상으로 인해 던전 공략이 이뤄지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특히, A급 던전 공략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이상 현상이 발생하면, 최소 한 단계 이상의 던전을 상정해야 하는데, A급 이상, 즉, S급 던전을 공략하는 것은 현재 단일 길드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헌터들이 던전 공략 자체을 기피하는 관계로 B급 던전도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익을 우선시 하는 길드들이 위험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그로 인해 영약과 내단이라 불리는 마나석과는 다른 효용을 보이는 마나의 결정체 또한 시중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가뜩이나 B급 던전에서는 백 번에 한 번, A급 던전에서는 열 번에 한 개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물건인데, 공략 횟수마저 줄어들었으니, 더더욱 구하기 어려워 진 것이다.
“구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말 그대로다.
영약이나 내단의 도움을 받으면, 내공을 쌓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없으면 어쩔 수 없다.
살수 시절에도 원래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던가.
필요한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날 뿐이다.
“그럼 빠른 시일 내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한 비교 때문에 차예린이 나중에 꼭 확인하겠다며 한 소리 하긴 했지만 김원철과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