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47화. 비밀(3).
“물론입니다.”
차예린이 답했고, 김원철은 그녀의 대답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미 살막과 타이탄에 대한 비밀도 공유하고 있는 그들이다. 태빈의 비밀이 하나 더해진다 해도 새어나갈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내 고민을 덜어주지는 않았다.
그들의 대화와는 별개로 내 머릿속에서는 그들을 죽이고 협회를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계획이 차근차근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계획의 실행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나를 포함해 넷. 그 중, 셋이 죽는다면, 범인이 나라는 것은 너무 쉽게 드러난다.
그게 내 고민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들을 죽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 뒷일 또한 문제였다.
무림과는 달리,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이들의 죽음이 다른 소문들에 휩쓸려 묻히는 게 아니다.
고작 며칠, 혹은 몇 달 사이에 누군가의 죽음이 잊힐 만한 세상이 아닌 까닭이다.
특히, 그 누군가가 헌터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협회의 장과 한국에 셋밖에 없는 S급 헌터 중 하나라면, 몇 달은커녕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살행 후에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나 하나쯤이야 어렵지 않겠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쉽지 않았다.
만일을 대비해 안가를 준비를 해뒀어야 했는데, 과거의 무위만을 생각하다보니,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말씀드리는 거지만 김태빈 헌터의 입으로 직접 듣고자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알맞은 거래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살막과 타이탄은 김태빈 헌터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고, 김태빈 헌터 혼자의 힘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요.”
김원철이 대답을 독촉했다.
이미 두 단체와 부딪친 이상, 태빈은 그들과 척을 졌다.
물론 전향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받아들이겠지만 상황을 직접 경험한 성현의 보고에 따르면, 그럴 확률은 낮았다.
“무림입니다.”
김원철의 언급에서 내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비밀을 세 사람만 알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끝까지 발뺌하긴 했지만 살막 또한 확신에 가깝게 내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다.
나를 찾아온 이들을 모두 죽이긴 했지만 그들이 살막의 전부가 아닌 이상, 눈앞의 셋을 죽인다고 가려질 비밀이 아닌 것이다.
“역시 그랬군요.”
내 대답에 차예린만 조금 놀랐을 뿐, 김태빈과 유인원은 예상했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번에 타이탄이 움직였다는 것 때문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했을 뿐, 이미 확신하고 있는 상태에서 물은 것이다. 놀랄 이유가 없었다.
“혹시, 김태빈 헌터가 기억하고 있는 무림인에 대해서도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거절하죠.”
김원철은 더 나아가 무림에서의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질문에서만큼은 한 치의 고민 없이 단호했다.
살막의 존재들이 내가 죽인 이들이라는 것이 확실시 되는 이상, 내 정체를 완전히 밝힐 수는 없었다.
당장 이들이 지금의 비밀도 지킨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정체를 밝혔다가 살막에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그들의 복수를 피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럼 어느 쪽이었는지 정도라도 알고 싶군요.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 중에서.”
“어떻게 그런 것들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김원철이 포권을 취한 순간,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
무림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삼대 세력까지 알고 있다니,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흠...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김태빈 헌터와 같은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저와 같은 경우?”
“예. 김태빈 헌터와 같이 온전한 이계의 기억을 가진 이들 말입니다.”
“살막과 타이탄이 전부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묻고 있으면서도 의문을 가지고 있던 부분이었다.
나만 해도 무림과는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깨어났다.
나만 예외가 아닌 이상, 아무리 살막이라 해도 전 세계에 흩어져 각성했을 그들을 모두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어찌어찌 파악했다 하더라도 수백이나 되는 이들을 모두 회유하거나 살인멸구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살막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이들도 적잖이 존재했고, 무엇보다 그중에는 살막주 여문휘와 필적하는 화경의 고수도 있었다.
타이탄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터.
그렇기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그들이 전부입니다. 협회에서 파악하고 있는 한에서이긴 하지만. 어찌됐건, 과거에도 김태빈 헌터와 같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무림 출신이 둘, 타이탄 출신이 셋, 총 다섯이. 그들 모두가 이계의 자의식이 현재 몸을 차지한 경우였습니다.”
“현재는?”
협회장의 얼굴에 짙은 회한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대강의 상황을 짐작하긴 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협회장이 나에게 출신을 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하기 위해서.
“넷이 살막과 타이탄으로 전향했고, 하나는 그들 손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김원철의 말은 간결했지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다섯 모두 오늘 나와 같은 일을 겪었다. 그 결과, 넷은 그들의 뜻에 따랐고, 하나는 끝까지 거부하다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럼 협회는 무림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많이 아는 것은 아니나, 기본적인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김원철이 간략히 설명을 이어갔다.
그가 말한 것처럼 많은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파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던가, 사파의 사패련과 녹림, 그리고 마교까지.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깊이 있는 정보는 단 하나도 없는 무림에 갓 발을 들린 강호초출이 가지고 있을 법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저희가 만난 이는 검호문의 진무라는 무인이었습니다. 강호에 발을 디디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암살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주듯 김원철이 덧붙였다.
문파에 소속돼, 기본적인 지식을 익혔다 하더라도 강호에 몸 담은 게 1년밖에 되지 않았다면, 아는 게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검호문의 진무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몰라도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는 것부터 시작해 꽤나 많은 것이 떠올랐다.
그가 죽은 이유는 특별할 것 없었다.
영웅심이 너무 넘쳐흘렀다는 것.
그러다 보니, 평범한 사람들의 등골을 빼먹는 흑도 무리, 흑사회와 얽혔고, 검호문이라는 배경이 걸렸던 흑사회는 백살문에 의뢰를 했다.
“안타깝게도 살막에 죽임을 당한 유일한 무인이기도 합니다.”
옛 기억에 잠겨있는 내 귓가로 김원철의 말이 들려왔다.
영웅심이 넘쳤던 진무가 살막 따위에 몸담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들리는 대로 죽음이었다.
“그렇군요.”
김원철은 젊은 영웅의 죽음에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큰 감흥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내 손에 죽어서는 안 될 이였기에 과거의 죽음은 미안했지만 현재도 죽어버렸다니, 사죄할 길은 없었다.
“흠... 김태빈 헌터는 본인이 무림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밝히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좋습니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거래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아까도 물었지만 왜 살막과 타이탄의 존재를 감추는 겁니까?”
김원철은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 얘기했지만 나로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는 것은 알겠다. 그들이 가진 힘이 강해 어쩌지 못하는 것도 이해한다. 그런데 왜 그런 적의 존재를 소수만 알고 있고, 감추고 있는지, 그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으음...”
차예린 때와 마찬가지로 김원철도 이 질문에서만큼은 대답을 망설였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지도 모릅니다.”
망설이던 김원철이 입을 열었다.
“살막과 타이탄의 역사는 각성자들이 생겨난 것과 동시에 시작됐습니다.”
이야기는 살막과 타이탄의 기원부터 시작됐다.
두 단체는 대격변과 동시에 생겨났다.
실제로 세계가 살막과 타이탄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육 개월 전에 불과했지만 그 이후, 이전에 벌어진 몇 가지 사건들이 두 단체가 벌일 일이었다는 게 밝혀졌고, 그로 인해 두 단체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가 대격변 직후임이 밝혀진 것이다.
“살막은 이름과 같이 살(殺)을 업으로 하는 자들, 그리고 타이탄은 종교집단입니다. 아니 광신도들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군요.”
살막은 과거 살수집단이었다는 명성에 걸맞게 요인 암살 등의 일을 주업으로 삼았고, 중세 판타지의 기사나 마법사 등, 다양한 직업군이 모인 타이탄은 유럽에 종교집단으로 뿌리를 내렸다.
여기까지는 조직을 이루는 주체가 헌터들이 됐다는 것뿐, 삼합회나 마피아, 혹은 사이비 종교집단 같은 여느 조직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실 타이탄에 대해서는 세계가 주목하고 있었지만 살막의 존재는 누구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요.”
타이탄은 종교집단으로 그 실체를 어느 정도 드러낸 반면, 살막에 대해서는 그 수나 거점 등 대부분이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들의 존재도 먼저 찾아 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육 개월 전, 스스로 세계 각국의 헌터 협회에 무림첩이라는 것을 보내왔기에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타이탄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종교의 일원화. 과거 유럽에서 일어났던 종교전쟁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편할 겁니다. 그러나 살막의 목적은 무림첩이라는 것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몰랐습니다. 존재조차 몰랐으니, 당연한 일이죠.”
문제는 살막과 타이탄의 목적이었다.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두 단체는 무림일통과 제국건설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살막은 무림일통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전 세계의 헌터들을 자신의 발밑에 두고자 했고, 타이탄은 종교를 통해 유럽 전역, 나아가 전 세계를 아우르는 신성제국을 건설코자 했다.
“아시겠지만 살막은 무공, 타이탄은 마나 수련법이라는 헌터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 방법을 통하면, 일반인도 헌터들과 같은 능력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타이탄은 이를 이용했다. 마나 수련법을 미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그들을 세뇌한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특별히 문제될 게 없다고 볼 수 있다. 세뇌는 사이비집단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니까.
문제는 그들이 이단, 즉 자신들의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었다. 그들의 교리에 이단에게는 죽음뿐이었다.
실제로 그들과 접촉했음에도 그 종교를 받아들이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비밀리에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살막의 목적은 무림첩에 적인 내용을 토대로 추론한 것일 뿐이지만 무림첩은 전 세계 헌터들에게 굴복을 종용하고 있었고, 굴복하지 않는 이들의 결과는 타이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존재를 숨겼습니다.
타이탄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 많은 이들이 세뇌를 당할 것이고, 그 보다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살막도 마찬가지, 그들은 살(殺)과 무(武)만을 숭배하는 집단. 약자에게는 가차 없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