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46화. 비밀(2).
“그렇군요.”
“하지만 단순히 김태빈 헌터가 생각하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에요.”
너무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차예린이 변명하듯, 말했다.
원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겠지만 어떻게 보면, S급 헌터인 그녀 또한 기득권이라 할 수 있었고, 나에게서 같은 취급을 받는 다는 게 무척이나 억울해 보였다.
때문에 무언가 더 설명하려는 눈치였지만 그녀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이를 보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나는 그녀가 하려다 만 말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애초에 살막이라는 단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그 존재를 묵인하고, 숨기는 이유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차예린의 변명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차예린 헌터님. 김태빈 헌터님.”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성현과 상은이이 차예린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들 뒤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시체 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인력도 보였다.
“무슨 일이죠?”
오해를 풀지 못한 채, 대화를 방해받았기 때문인지, 차예린의 목소리가 조금은 싸늘하게 느껴졌다.
“협회장님께서 두 분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협회장이?”
성현과 상은이 마냥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이곳에서 발생한 일에 대한 보고를 마쳤고, 이에 협회장이 두 사람을 보고자 한 것이다.
“네. 꼭 좀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차예린이 노려보던 눈빛을 풀었다.
신의 길드의 부길드장, 그리고 S급 헌터라는 위치는 대부분 거리낄 것이 없게 만들어주었지만 협회장은 아니다.
과거 한국의 멸망을 막았다고까지 표현되는 1급 몬스터 드레이크를 막아낸 협회장이다. 물론 단신의 힘이 아닌 수많은 동료들의 희생이 뒷받침 된 일이긴 하지만 그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지금은 길드들과의 관계를 등한시하고 오로지 협회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긴 하지만 한 때, 대한민국의 영웅이라고까지 추앙받던 협회장이 ‘꼭’이라는 말까지 붙여 만나고자 했다면, 웬만해선 거절하기 어려웠다.
“김태빈 헌터님?”
성현과 상은의 시선이 아직 대답 없는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예린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다. 꽁꽁 감춰둔 비밀을 어렵사리 하나씩 꺼내 놓는 느낌이다. 그것도 실수, 혹은 내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부분에 한해서.
때문에 수박 겉핥기만 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이미 살막이 내가 죽인 이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확신하는 것과 확인하는 것은 다르다.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헌터계를 총괄하는 협회장을 만난다면, 확인에 필요한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상은이는 인원 통제해서 현장 정리하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성현이 손짓을 하며 앞장섰다.
같이 싸움을 한 입장에서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강자라는 사실을 파악한 성현이다. 강제할 수 없으니, 내심 그가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차를 타고 이동할 겁니다.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성현을 따라 이동한 곳에는 언제 불러뒀는지, 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셋 모두 A급 이상의 헌터들이기에 굳이 차로 이동할 필요성은 없었지만 대낮에 도심을 날아다니듯 질주하며 평범한 사람들에게 괜한 위화감을 조성할 필요는 없었다.
***
이동하는 도중,
성현은 차예린이 어떻게 김태빈을 찾아 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됐다.
차예린은 인근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우연히 태빈을 미행하고 있는 살막과 타이탄의 정체를 눈치 채고 뒤를 따랐고, 사마휘라는 자로 인해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태빈이 바로 옆에 있는 상황에서 자신 또한 그를 미행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찌 그런 일이...”
차예린이 슬쩍 나 보며 말했지만 다행히 성현과 나, 둘 모두 다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헌터 백화점 인근에는 백화점 외에도 헌터와 관련된 시설들이 많았고, 그녀가 인근에 볼 일이 있는 게 이상할 건 없었다.
그 보다 성현은 살막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무고한 시민들을 해했다는 말에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나는 그 정도 소란이 일었음에도 주변이 조용한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그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듯했다.
“...그래도 때마침 차예린 헌터님 주변에 계셔서 다행이군요.”
분노하던 성현이 긴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나마 차예린 덕분에 피해가 줄었고, 자신들도 무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다.
차예린과 대등할 정도로 강한 헌터라니.
자신과 맞붙었던 토니를 비롯해 문환 일행만 해도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만큼 강한 자들이었다.
차예린이 말한 사마휘라는 자까지 가담했다면, 이렇게 무고한 희생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 또한 그 희생의 대상이 됐을 테니 말이다.
“도착했습니다.”
협회가 있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고, 몇 마디 얘기를 나누기도 전에 운전기사의 말이 들려왔다.
“이쪽으로.”
“가죠.”
협회에 처음 방문하는 것이 아닌지, 차예린은 성현의 안내에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고, 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오셨군요.”
성현을 따라 도착한 협회장의 집무실 앞에는 한 사내가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유인원 비서님. 오랜만이네요.”
마중을 나온 사내의 정체는 협회장을 보좌하는 유인원이었다.
성현이 고개를 숙였고, 차예린도 일면식이 있는지 인사를 건넸다.
공식적인 직책은 단순히 비서에 불과했지만 항상 협회장과 붙어 있으면서 개인적으로도 A급 헌터이기까지 한 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쪽이 김태빈 헌터님이시겠군요.”
유인원의 시선이 성현과 차예린을 지나 나에게로 향했다.
흥미로운 눈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흥미는 잠시 접어 둘 때였다.
“들어오게.”
한 차례 확인을 마친 유인원이 안에 기별을 넣었고, 협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하면서도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차예린 헌터님. 김태빈 헌터님. 갑작스런 부름에도 이렇게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협회장 김원철이라고 합니다.”
성현은 우리의 안내를 끝으로 제 임무를 다하고 돌아갔고, 나와 차예린만 협회장 실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김원철이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네 왔다. 협회장 김원철은 사십대 초반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강직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음?”
차예린은 거리낌 없이 김원철의 손을 맞잡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악수가 단순히 이 세계의 인사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이곳에 와서 단 한 번도 악수를 해본 적어 없었다. 손을 그리 쉽게 내주는 게 아직은 익숙지 않았다.
“이...”
“허허. 이런 식으로 하던가요.”
유인원이 나서려는 순간, 김원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이며 포권을 취해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김원철이 내가 기대한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주 포권을 취해보였다.
“피차 바쁘실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살막과 타이탄의 습격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자칫 어색해질 수 있는 상황이 지나가고, 김원철이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는 불필요한 얘기들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알고 계셨군요.”
차예린이 답했다.
협회에서 무언가 알고 있을 거라는 것은 성현과 상은을 봤을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다.
“살막이 움직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습니다. 타이탄까지 나설 줄은 몰랐지만.”
역시, 김원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유인원과의 대화를 통해 김태빈이 살막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했고, 직접 보호를 위해 성현과 상은을 붙여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살막에서 차예린을 위협할 정도의 인물이 나설 거라는 것과 타이탄까지 움직일 거라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설명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김태빈 헌터는 누구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내가 반문했다.
진지한 김원철의 눈은 그가 단순히 ‘김태빈’이라는 존재에 대해 묻는 게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질문 그대로입니다. 김태빈 헌터, 그대가 과거의 김태빈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몸만 과거의 김태빈의 것일 뿐, 정신은 아마도 무림, 혹은 타이탄 불리는 곳의 인물의 것이겠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김원철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어왔고,
“설마...?”
뜬금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해 하던 차예린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머릿속에선 지금껏 이해가 가지 않았던 퍼즐들이 맞춰지고 있었다.
놀람만이 가득했던 눈에 점차 이해가 서렸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생각을 끝낸 내가 입을 열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흔들림 없는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속인다고 넘어갈 수 없음을 깨달았고,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아까와 같은 예는 없었다. 그들을 향한 감출 수 없는 적의가 흘러나왔다.
“저희 협회는 김태빈 헌터가 승급을 했을 때부터 줄곧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막과 타이탄의 움직임이 저희의 의문을 확신으로 바꿔주었습니다. 당신이 무림인이나 타이탄인이 아니라면, 그들이 그렇게 움직일 리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김원철의 말대로, 그는 태빈을 줄곧 의심하고 있었지만 확신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살막과 타이탄이 직접 행동에 나서면서 확신하게 됐다. 그가 과거의 김태빈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묻고 있는 겁니다. 김태빈 헌터가 무림인인지, 타이탄인인지.”
“...”
결코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비밀이다.
이에 나는 김원철의 말을 들으며 고민했다. 이들을 죽임으로써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가에 대해.
김원철과 유인원이 A급. 차예린이 S급이다.
단순히 전력상으로는 가능성이 없긴 하지만 차예린만 암습으로 제거할 수 있다면, 나머지 둘은 전면전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나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게 이들 셋이 전부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혹, 비밀이 새어나갈까 그러시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김태빈 헌터의 비밀을 아는 것은 이곳에 있는 저희들이 전부고, 김태빈 헌터님의 가족 분들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차예린 헌터님.”
김원철은 나를 안심시키려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이 내 고민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다.
이들만 죽이면, 비밀은 계속해서 비밀로 지켜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