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45화. 비밀.
“차예린 헌터?!”
1세대 길드인 신의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S급 헌터를 만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차예린은 그들을 알고 있었지만 성현과 상은이 그녀를 본 것은 먼발치에서 스치듯 봤던 게 전부.
갑작스러운 차예린의 등장에 성현과 상은이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차예린이에요. 김태빈 헌터와 따로 얘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노려보듯 태빈을 한 번 바라본 차예린은 그와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성현과 상은에게 양해를 구했다. 당장 의문을 해결하고 싶긴 하나, 둘에게 들려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예... 예.”
성현과 상은은 차예린의 날선 기세에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분노 가득한 차예린의 눈은 거절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부탁을 가장한 강제였다.
아니, 애초에 강제였다 하더라도 둘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누가 S급 헌터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 같은 S급 헌터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고마워요.”
차예린이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성현과 상은을 등 떠밀 듯 밀어냈다.
강요 아닌 강요에 의해 밀려나다시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성현과 상은이 완전히 자리를 뜬 것은 아니었다.
태빈의 보호라는 임무로 인해, 꽤나 멀찍이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래도 거리가 거리인지라 태빈과 조용히 얘기를 나눌 정도는 되었다.
“차예린 헌터라니. 대체 김태빈 헌터와는 무슨 관계일까요?”
상은이 차예린과 태빈에게 호기심어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글쎄...”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기에는 성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거리가 멀어 대화소리는커녕 입모양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탓에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성현과 상은의 시선은 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후...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성현과 상은을 밀어낸 뒤, 깊은 한숨으로 흥분을 가라앉힌 차예린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나타날 때는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았는데, 전에 만났을 때와 같이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다. 아니 당장이라도 질문을 쏟아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에 하시죠.”
과거로부터 이어진 문제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구적과 왕길.
분명 그들은 내 손에 죽은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이 세계에 나타났다. 첫 살행 대상이었던 노인에 이어.
게다가 단순히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 똑같은 무공을 익힌 채였다. 경지 또한 내게 죽임을 당했을 때와 같았다.
사황문의 장남, 구적은 불과 열 셋의 나이에 절정을 바라보면서 일대의 기재로 손꼽혔고, 강경채 채주 왕길은 일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성취에도 줄을 잘 타 운 좋게 녹림 72채의 끄트머리인 강경채의 채주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유일하게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는 문환뿐이다. 그러나 그도 내가 살막주 여문휘를 죽이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내 손에 당했던 살막의 살수 중 하나라고 한다면, 쉽게 설명이 가능했다.
하나같이 복면을 쓰고 나를 뒤쫓던 이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기억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할 테니까.
벌써 네 명.
내 손에 죽임을 당했던 이들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이들도 이와 같은 형식으로 살아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방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살막 또한 단순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살막과 이름만 같은 곳이 아닌, 과거와 비슷한 형태의 단체일 가능성 또한 무척 높아졌다.
내게 죽임을 당한 이들이 이 세계에 살아난 것이라면, 살막주 여문휘 또한 살아있을 테니 말이다.
“아니!... 중요한 문제에요.”
단호한 거절에 언성을 높이려던 차예린은 살짝 구겨진 내 표정을 보고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경험으로 태빈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S급 헌터인 그녀가 강압적으로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보다는 예를 갖춰 대하는 편이 대답을 듣기 수월했다.
그리고 차마 내색하진 않았지만 S급 헌터인 자신이 잠시나마 주눅들 정도의 한기가 돌던 눈빛을 차예린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살막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상, 김태빈 헌터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어요.”
차예린은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차예린의 개인적인 사견이었지만, 방금 자신을 위협할 정도의 힘을 가진 사마휘나, 한순간 태빈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살막의 무인들을 보면, 가벼이 움직인 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무슨 뜻입니까?”
살막은 지금 내가 고민하던 것과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단체다.
게다가 개인적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만에 하나 이 세계의 살막이 내가 아는 살막과 같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한 번 당신을 목표로 한 이상, 이대로 포기할 리 없다는 말이에요. 김태빈 헌터는 물론이고, 가족들도 위험할 수 있어요. 살막은 상상이상으로 집요한 놈들이니까요.”
“가족?”
“네. 살막의 목표가 된 헌터의 가족이 무참히 살해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세간에는 살막의 짓이라고 알려지지 않긴 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목표한 헌터는 물론이고 가족까지도 아무 이유 없이 죽일 정도로 무자비한 놈들이니까요.”
차예린은 몇 가지 사례를 예로 들며 살막의 집요함을 경고했다.
살막은 목표물을 제거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도 서슴지 않았고, 수많은 방법들 중, 가족들을 인질로 삼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방법이고, 실제로 내가 살수일 때, 같은 방법을 사용한 적도 있었다.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강해지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한 없이 약해지기도 하니까.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나는 위기에 처한다하더라도 얼마든지 이겨낼 자신이 있다. 물론, 방금 안일한 대처로 위험에 빠지긴 했지만 다시는 없을 일이다.
그러나 가족은 아니었다. 나와는 달리, 일반인에 불과한 그들이다. 형이 무공을 배우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E급 헌터에도 미치지 못하니,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걱정하실 건 없어요. 가족 분들의 안전은 확인했으니까.”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눈에 띄게 동요하는 나를 차예린이 안심시켰다.
상대가 살막이라는 것을 알기에 상황이 끝나자마자, 조취를 취해 놓았다. 임시방편에 불과하겠지만 당장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도 할 줄 아시네요?”
내 말에 차예린은 의외라는 듯,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하긴 내가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는데, 남인 그녀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 살막을 왜 가만히 놔두는 겁니까? 살막의 존재를 그렇게 까지 숨기는 이유는 또 뭐고요?”
어색함에 나는 곧장 그녀의 얘기를 듣는 와중에 생긴 몇 가지 의문을 쏟아냈다.
맥락이 급격히 바뀌긴 했지만 어찌됐건, 그토록 위험하다 하면서 살막이라는 단체를 가만히 놔두는 것도 모자라, 존재자체를 숨기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예?! 아... 그건...”
내가 관심을 보이자, 열변을 토해내던 차예린의 입이 한순간에 다물어졌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단 살막은 가만히 놔두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들이 가만히 있는 거라고 봐야 맞는 거겠죠. 살막은 한국 같은 일개 국가가 어찌 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니니까요.”
고민하던 차예린이 입을 열었다.
내가 던진 두 개의 질문에 모두 답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드러난 그들의 힘에 대해서만 설명했을 뿐이다.
“예?”
내가 살행에 나선 횟수는 백 번이고, 만약 살막에 내게 죽임을 당한 이들이 모두 모였다 하더라도 그 수는 고작 몇 백에 불과하다.
고작 몇 백밖에 되지 않는 집단 하나를 수천에서 수만의 헌터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가 어쩌지 못한 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 파악된 살막의 힘은 웬만한 국가는 우습게 생각할 만큼, 강력해요. 그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상위등급 헌터의 수가 수백에 달하고, S급 헌터에 비견되는 힘을 가진 이들만 해도 열 명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소문에는 S급 헌터 이상의 힘을 가진 이들도 있다고는 하는데, 아직 확인된 건 아니에요.”
“음...”
이어진 차예린의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세계는 무림이 아니다. 고작 초절정에 불과한 수준의 S급 헌터가 1인 군단에 비견되는 세상이다.
실제로 S급 헌터는 단순히 이세계의 총칼 따위로 막아낼 수 없다. 미사일을 날리고 하면, 얘기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소수가 마음먹고 게릴라전이라도 펼친다고 가정하면, 일개 국가가 손쓸 방법은 없었다.
시민들 사이에 뒤섞여 맨손으로 건물을 때려 부수는 이들을 향해 미사일을 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S급 헌터가 열 명 이상이 있다고 하니, 차예린이 살막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단순히 소문이라고 했지만 정말 내가 죽인 이들이 살아난 거라면, S급 헌터, 즉 초절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무인 또한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내가 죽인 이들 중에는 살막주 여문휘를 비롯한 세 명의 화경의 무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최소한 여문휘는 살막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다.
살막의 막주로.
“다른 질문에는 답을 안 한 것 같습니다만.”
“그건...”
“헌터들의 성장 때문입니까.”
차예린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살막의 존재를 숨기고 있는 이유는 쉬이 짐작이 갔다.
문환이 말했다. 자신들은 과거 무인일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헌터의 등급이 고착화 되어 있는 세계다.
그러한 세계에서 무공이라는, 헌터의 등급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지닌 단체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혼란을 불러일으킬 거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 혼란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렇기에 기존의 기득권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이를 숨기는 것은 특별한 것도 없는 일이다.
“그걸... 어떻게?”
차예린이 눈이 튀어나올 듯, 급격히 커졌다.
살막이 헌터를 성장시킬 수 있는 모종의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은 비밀 중에 비밀이다.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 발생할 혼란을 생각해, 숨기고 있었는데, 어떻게 태빈이 이를 알고 있는 지 놀라울 뿐이었다.
“그럼 타이탄도 마찬가지 이유군요.”
“네... 맞아요.”
차예린은 더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쉽게 수긍했다.
태빈의 말대로 살막과 타이탄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이유는 헌터들의 성장과 연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