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44화. 살막(5).
“크윽.”
문환이 침음을 흘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았던 태빈이다.
정보와 달리, A급 헌터였다는 게 의외이기는 했지만 마주한 태빈은 이 세계의 헌터라는 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랜 시간을 갈고 닦은 무인들과 달리, 가진 바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도 모르는.
그러나 다시 마주한 태빈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잠깐 사이에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자신의 숨통을 조여 왔다.
두 자루의 검으로 펼쳐내는 검법은 예사롭지 않았고, 마법사를 돕기 위해 선보인 암기술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네 놈...도 살수였구나.”
여유가 넘치던 문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정확히 급소만을 노려오는 검법과 정확히 파퀴아의 숨통을 끊어 낸 암기술.
그게 아니더라도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태빈이 자신과 같은 부류임을.
자신을 죽인 살수였다는 것까지는 기억해내지 못한 듯했지만.
“알고 온 거 아니었나.”
문환의 분노한 음성에 냉소로 맞받아친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수하의 목을 노렸다.
고작 일류밖에 되지 않는 이들이지만 문환을 상대하는데, 적잖이 방해가 되는 존재들이다. 거치적거리는 방해물들을 우선 치워낼 필요가 있었다.
“피해!”
문환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수하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향하는 검을 보고 한발 늦게 뒤로 물러섰지만 태빈의 검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 뒤였다.
검이 스치고 지나간 목덜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수하가 살기위해 두 손으로 목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한 번 잘려나간 동맥을 다시 이을 수는 없었고, 흘러내리는 피를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목을 부여잡은 수하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붉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왕길!”
문환의 외침에 내 눈에 이채가 서렸다.
녹림 강경채 채주 왕길의 독문무공인 파일도법을 쓰던 자는 이름 또한 왕길이었다.
“아이스 스피어!”
왕길의 숨이 끊어짐과 동시에 상은의 마법이 문환 일행을 향해 쏘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태빈의 공격을 막는 게 고작이었다.
왕길이 죽은 마당에 마법사 상은의 공격까지 이어지자, 둘 밖에 남지 않은 문환 일행은 더 이상 버텨내지 못했다.
“사마휘...님만...”
내 검에 심장을 꿰뚫린 문환이 피거품을 쏟아내며 한탄했다.
나에게는 그 후회 섞인 한탄을 끝까지 들어줄 아량이 없었다. 단숨에 문환의 목을 잘라냈고, 원통함에 눈도 감지 못한 문환의 머리가 애처롭게 바닥을 굴렀다.
“젠장.”
문환 일행과의 전투가 끝나갈 무렵, 토니라 불린 서양인 헌터와 성현의 싸움은 이미 끝난 뒤였다.
파퀴아가 죽었을 때부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을 느끼고 있던 토니가 문환 일행 중 왕길이 당하자마자, 곧바로 뒤도 보지 않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성현은 굳이 도망치는 토니의 뒤를 쫓지 않았다. 태빈의 보호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문환 일행을 상대하던 것을 보면, 굳이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긴 했지만 임무는 임무였다.
“괜찮아?”
성현이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상은을 바라봤다.
몇 차례나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상은이다. 겉은 멀쩡해 보이긴 했지만 동료로서 걱정스러웠다.
“후...”
상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A급 헌터가 된 뒤로 오랜만에 겪어보는 위기였다. 그것도 몬스터가 아닌, 같은 인간에게 느낀 위협이다.
전투 중에는 다급함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전투가 끝난 지금은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질 않았다.
“예. 전 괜찮아요.”
어렵사리 놀란 마음을 억누른 상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성현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구적. 왕길.’
성현이 상은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을 때, 나는 둘을 경계하며 문환 일행의 시체를 뒤지고 있었다.
시체에는 당연하게도 신분 등을 확인할 어떠한 표식도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있었다.
복면 뒤에 숨겨져 있던 그들의 얼굴.
문환을 제외한 둘은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사용한 무공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얼굴 또한 바로 사황문의 장남 구적과 강경채 채주 왕길의 것이었다.
문환의 외침으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직접 확인하고 나니,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괜찮으십니까?”
성현이 내게 다가와 물어왔다.
사건과 관련된 유일한 증인이자, 자신들의 보호대상이다.
사실 상은보다 우선적으로 안위를 확인했어야 함이 맞긴 하지만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문환 일행의 시체를 뒤지고 있었기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의 물음도 그저 의례적으로 하는 말에 불과했다.
“전 괜찮습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저 둘의 목적 또한 알 수 없었다.
방금도 안일함에 위험에 빠지지 않았던가.
도움에는 감사하되,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저희는 협회 소속의 헌터들입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경계어린 시선에 성현이 무기를 거두며 한 발 물러서 거리를 벌린 채, 물어왔다.
외진 곳이라고는 하나 도심 한 가운데에서 A급 헌터들이 난동을 부린 사건이다. 태빈이 자신들의 보호대상이라는 것을 떠나, 간과하고 넘어 갈 수는 없는 문제였다.
“자신들을 살막과 타이탄 소속이라 밝힌 자들이었습니다.”
이미 싸움까지 일어난 마당에 그냥 넘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놈들이 나를 영입하려 했다는 것과 이를 거절하자 공격해 왔다는 것 등.
내가 살막과 타이탄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만을 제외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살막? 타이탄? 흐음...”
처음 듣는 단체의 이름에 성현이 의문서린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개입하기 전부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태빈의 말과 다른 부분은 없었다.
애초에 협회장에게 태빈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언질을 받았다.
그 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협회장은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이에 대해서는 보고를 하면, 협회장이 판단을 할 터. 자신이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상황 판단을 마친 성현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김태빈!”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
태빈을 만나기 위해 길드를 나선 차예린은 수상한 무리가 태빈을 뒤쫓고 있음을 발견했다.
수상한 무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무려 세 무리가 두셋씩 나뉘어 태빈을 은밀히 미행하고 있었다.
‘살막과 타이탄... 나머지는 협회...?’
차예린은 그들의 특이한 복색을 보는 순간, 그 정체가 무엇인지 단박에 파악해 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복면뿐 아니라, 온통 검은 무복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셋은 살막의 무인들이었고, 중세 기사를 연상케 하는 대검을 든 자가 있는 무리는 익히 알고 있는 타이탄의 특색과 같았다. 그리고 남녀로 이루어진 둘은 차예린도 일면식이 있는 협회 소속의 헌터들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태빈이 살막과 연이 있음은 대충 눈치 채고 있었지만 타이탄과 협회의 움직임은 예상 밖이었다.
차예린은 태빈을 중심으로 한 수상한 움직임에 망설임 없이 그들의 뒤를 쫓았다.
‘악연이 아니었나..?’
이내 차예린은 살막의 무인들이 먼저 태빈에게 접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서로 악연으로 이어져 있다면, 일어날 리 없는 접촉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계속해서 차예린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살막에 이어 타이탄 측 또한 태빈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얘기가 잘 풀리지 않았는지, 대검을 꺼내들며 공격할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윽! 누구냐?!”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차예린은 곧장 개입하려 했지만 암습으로 인해 그럴 수 없었다.
간발의 차로 피해 내긴 했지만 태빈 쪽을 살피느라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한 탓에 자칫하면 위험할 뻔했다.
아니 실제로 살갗이 살짝 베인 목에서 옅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막?!”
불의의 기습에 차예린이 주변을 살폈고, 느긋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살막의 무인들과 같은 무복을 입고 있는 사내였다.
“오호. 살막을 알고 있었나? 하긴 S급 헌터라면, 알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사내는 차예린을 알고 있다는 듯, 자문자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살막의 존재가 비밀에 가깝긴 하지만 S급 헌터라면, 살막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네 놈은 누구지?”
차예린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내의 말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침착하게 상대를 살폈다.
본능적으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사마휘라고 한다. 미안하지만 자네는 나와 어울려줘야겠군.”
사마휘가 태빈이 있는 곳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차예린이 개입하는 것을 막겠다는 의미였다.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
사마휘가 자신의 검을 들어보였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피가 묻어있는 검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아아. 파리가 몇 마리 꼬여서 말이야.”
검에 묻은 피를 본 차예린이 차가운 음성에 사마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말투만 보면, 정말 파리와 같은 벌레가 꼬여들었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나 검신에 짙게 묻어 있는 피는 사마휘가 말하는 파리가 본래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
어쩐지 소란이 일고 있음에도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사마휘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깨달은 차예린이 입을 다물고 검을 들어 올렸다.
태빈의 문제를 떠나 무고한 사람들을 해한 사마휘를 가만히 놔둘 순 없었다.
챙!
분노한 차예린은 곧바로 사마휘에게 달려들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작지 않은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어느 누구도 이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태빈 쪽은 싸움이 한창이었고, 그 외에는 인근에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열 내지는 마라. 괜히 S급 헌터를 죽여,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사마휘의 말대로 그는 차예린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는 듯,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했다.
그렇다고 사마휘가 열세에 몰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마휘는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로 차예린의 모든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있었다.
“음?!”
상황이 반전된 것은 태빈을 공격하고 있는 살막의 무인들이 밀리기 시작하면서였다.
타이탄 소속의 기사가 갑자기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살막의 무인 하나도 태빈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그 모습에 여유롭던 사마휘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어딜?!”
태빈 측의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자, 이번에는 차예린이 자신을 떨쳐내려는 사마휘에게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여유를 부리던 아까와는 다르게 사마휘는 전심전력을 다했고, S급 헌터인 차예린의 힘으로 막아내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다음에는 이번처럼 봐주는 일은 없을 거다.”
그도 잠시, 이미 일을 그르쳤다는 것을 깨달은 사마휘가 차예린과의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차예린도 간신히 그를 붙잡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실력이 사마휘에게 미치지 못함을 알기에 그를 쫓지는 못했다.
사마휘가 사라지고, 차예린의 머릿속에 의문이 차올랐다.
대체 태빈이 어떤 존재이기에 S급 헌터인 자신을 위협할 만한 존재까지 나서게 만들었는지 말이다.
차예린의 시선이 그 의문을 해소해 줄 태빈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