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43화. 살막(4).
협회 소속 A급 헌터인 성현과 상은은 협회장으로부터 비밀리에 태빈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다.
협회장은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는데, 태빈을 보호하되, 협회가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는 태빈과 그를 노리는 적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항이었고, 성현과 상은이 협회장의 지시를 이행하며 태빈을 보호하기 위해선 은밀히 그의 주변에 머무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협회장의 우려대로, 태빈에게 수상쩍은 자들이 접근했다.
각종 무기에 방어구로 특이한 복장의 헌터들 중에서도 보기 힘든 무복을 입은 자들이었다.
A급 헌터인 자신들이 그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은밀한 접촉에 성현과 상은은 경계심을 잔뜩 끌어 올린 채, 태빈과 그들의 만남을 지켜봤다.
“외국인?”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새로운 자들이 나타났다.
아시아계 헌터 하나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금발의 서양인 헌터였다.
성현과 상은은 당황스러웠다.
특이한 무복을 입은 자들에 이어 외국인으로 보이는 이들의 존재도 감지하지 못했다.
물론 자신들이 이런 일에 전문가가 아닌 탓에 은신 등에 특화된 직업이라면, B급 헌터 정도만 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이목을 속이는 게 가능하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저들 모두가 최소 B급 이상의 헌터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죠?”
“아직 기다려보자.”
현재 태빈은 무복을 입은 자들과 서양의 헌터에게 앞뒤로 포위된 형태였다.
공격이라도 당한다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감지한 상은이 물어왔지만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지금, 무작정 개입하기에는 협회가 태빈을 보호하고 있음을 스스로 밝히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무복을 입은 자들부터 서양의 헌터까지. 태빈을 중심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확실했다.
그리고 잠시 뒤,
서양의 헌터가 먼저 대검을 꺼내드는 것으로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자신들은 협회 소속. 헌터 간의 분란을 막고, 중재하는 것만으로도 저들의 싸움에 개입할 이유는 충분했다.
***
성현과 상은이 나와 문환 일행의 사이를 가로 막았다.
고가의 오우거 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예리함이 명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검을 든 성현과 회색빛 로브를 뒤집어써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을 가리고 있는, 마법사로 추정되는 상은의 존재는 상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홀드.”
움직임을 구속하는 홀드 마법이 한창 싸움을 벌이고 있던 나와 문환 일행을 붙잡았다.
마법사라면, C급 헌터도 쓸 수 있는 기본적인 마법이라 그 구속력이 강하지 않았고, 저항에 곧장 깨져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등장과 함께 싸움을 멈추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협회 소속 헌터 성현이다. 헌터들 간의 싸움은 자격박탈 이상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성현이 곧바로 소속과 함께 자신들이 개입한 이유를 밝혔다.
성현은 이로서 자신들이 태빈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음을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협회?”
그러나 나는 성현과 상은의 목적이 다른데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백화점을 나선 순간부터 성현과 상은의 시선이 따라붙었음을 눈치 채고 있던 나다.
그 목적이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단순히 싸움이 일어나 이를 제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어쨌건, 중요한 순간에 성현과 상은의 개입으로 한 차례 위험을 넘겼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협회가 나선 이상, 살막과 타이탄도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듯했다.
“흠흠. 아니오.”
역시나.
예상치 못한 협회의 등장에 문환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검을 거두며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몸만 그리 움직일 뿐, 물러나는 문환의 눈은 음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명 사마휘님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었을 텐데.’
갑작스런 협회 헌터들의 등장에 문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타이탄에서 태빈을 노릴 것은 예상했다. 상관없었다. 방금 토니에게 말한 대로 우선권은 자신들, 살막에게 있었으니까.
그런데, 협회의 개입은 예상 밖이었다.
소란이 일 수도 있었기에 자신들 외에도 사마휘 대주까지 나섰다. 사마휘 대주는 자신보다 한 수 위인 초절정의 고수. 저들이 어떻게 사마휘 대주의 눈을 피해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태빈을 포섭할 수 없다면, 죽이라는 명을 이행해야 했다.
‘토니’
문환은 토니에게 은밀하게 시선을 보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이긴 하나, 목적은 타이탄도 살막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힘을 합친 다면, 협회의 헌터들도 문제될 건 없었다.
“오우. 싸움이라니요. 난 말리려 온 거라고요.”
문환의 시선을 받은 토니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한 발짝 물러나며 자신은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나를 비롯한 협회의 헌터들이 빠져나갈 길목을 교묘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전부 무기를 버려라.”
안타깝게도 성현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제 역할에 충실했다. 경고와 함께 사건을 일으킨 헌터들을 주시했다.
“모른 체 했다면, 좋았을 것을. 운이 없음을 탓해라!”
먼저 움직인 것은 문환이었다.
협회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검을 내려놓는가 싶던 문환이 품속에서 마법사, 상은을 향해 암기를 한 차례 뿌리며 곧장 몸을 날렸다.
헌터들 간의 싸움에서 가장 방해 되는 존재가 마법사다. 살인멸구를 택한 이상, 마법사를 가장 먼저 제거해야 했다.
“쉴드!”
급작스런 공격이었지만 잔뜩 경계하고 있던 상은은 곧바로 쉴드를 펼쳐 날아오는 암기를 막아섰다.
문환이 날린 암기는 마나로 만들어진 쉴드를 뚫어내지 못했고,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상은을 향한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크하하.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 군.”
문환이 암기를 던짐과 동시에 토니 측도 움직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폭발적인 속도로 쏜살 같이 쏘아진 토니가 곧장 성현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고, 단순한 통역이 아니었던 아시아계 헌터 파퀴아의 검이 여전히 상은을 노리고 있었다.
“제길!”
서로 대치하고 있던 양측이 갑자기 합공을 가해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상은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쉴드는 암기를 막아내는 것으로 역할을 다하고 깨져 사라졌고, 토니를 막아서고 있는 성현의 도움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상은은 망설임 없이 바닥을 굴렀다. 마법사란 근접전에 취약한 존재다.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그 외는 자신을 노리는 파퀴아의 공격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윽!”
상은이 바닥을 구르는 동시에 짧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비명은 상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상은을 공격하던 파퀴아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갑작스런 비명에 상은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파퀴아를 바라봤고, 피가 흐르는 오른팔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파퀴아를 볼 수 있었다.
“홀드.”
“파이어 스톰.”
“아이스 스피어.”
“실드.”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구사일생한 상은은 곧장 홀드로 파퀴아의 발을 묶고 마법을 난사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불의 폭풍과 얼음 창이 파퀴아를 향해 쏘아졌다. 상은은 그 와중에도 문환의 공격에 대비해 실드를 전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shit!”
이번엔 역으로 파퀴아가 욕설을 내뱉으며 지혈이 되지 않은 팔을 들어 올렸다.
부상 탓에 온전히 힘이 실리지 않고, 홀드가 움직임을 방해했지만 급히 쏘아내느라, 완성도가 떨어지는 마법이다. 애초에 피할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기를 쏘아낸 존재였다. 자신이 미처 막거나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순간에 이뤄진 암습이다.
파퀴아의 눈이 슬쩍 태빈이 서있던 자리로 향했다.
문환을 가로막고 있는 태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아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방어에 급급했던 태빈이 지금은 오히려 문환 일행을 압도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파퀴아의 짐작대로 태빈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여섯 개의 비수 중,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파퀴아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문환 일행을 몰아붙이면서도 자신에게 비수를 날릴 정도로 여유가 있는 태빈을 보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당장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법이 먼저였다.
쾅! 쾅!
불안정한 마법은 파퀴아의 검기를 뚫어내지 못했고, 굉음에 비해 조금은 허무해 보일 정도로 쉽게 막혀버렸다.
“커억... 제기랄.”
그러나 파퀴아는 자신의 불안감을 외면했던 조금 전의 자신을 행동을 후회했다.
가슴과 어깨에 박힌 두 자루의 비수를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와 함께 초점을 잃어가는 눈이 그의 생이 다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나는 문환의 음험한 눈빛에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환이 토니와 시선을 주고받는 순간, 그들이 그냥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둘의 관계가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위해서 적과 손을 잡는 것도 흔하디흔한 일이다.
예상대로, 성현의 제재를 따르는 듯 보였던 문환이 암기를 쏘아내며 상은을 향해 달려들었다.
토니 측도 마찬가지.
토니는 성현에게로 향했지만 파퀴아가 상은을 노렸고, 한순간에 상은은 앞뒤로 공격 받으며 위태로워졌다.
쐐애액.
나는 망설임 없이 문환을 가로막으며 파퀴아를 검로를 방해할 요량으로 비수를 날렸다.
당장 목적을 알 수 없는 성현과 상은을 아군이라 할 순 없다. 그러나 문환과 토니라는 명확한 적을 둔 이상, 잠시 힘을 합칠 여지는 충분했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간 비수가 정확히 파퀴아의 오른팔을 스쳐지나갔다.
단순히 검로를 방해할 목적으로 날려 보낸 것 치고는 기대 이상의 효과였다,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상은의 마법의 마법에 몸을 숨겨 다시 한 번 두 자루의 비수를 쏘아 보냈다.
창졸간에 날린 비수도 파퀴아가 미처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의 경지에 달한 암기술이다.
마음먹고 쏘아 보낸 비수는 마법으로 인해 시선이 분산된 파퀴아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커억...제...”
파퀴아가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뒤에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긴 했지만 거리가 멀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섞여 들리지 않았다.
꾸벅.
그제야 내가 도왔음을 눈치 챈, 상은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번엔 그녀가 나를 돕기 위해 마법을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