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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42화 (42/150)

# 42

42화. 살막(3).

문환이 자신을 소개한 언어는 한국어도, 외국어도 아니었다.

중국어와 유사하긴 하지만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중원의 언어였다.

지난 몇 달간, 입 밖으로 꺼낼 일이 없어 잊고 있던 언어다. 그런 언어가 문환의 입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언어뿐만 아니라, 문환의 눈을 본 순간, 나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복면으로 가린 얼굴 속에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그의 눈.

죽음이 깊게 배어 있는 그 눈은 단순한 살인자의 눈이 아니라, 매일을 생사의 중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는 살수의 눈이었다.

혈문과 더불어 중원 이대 살수 단체인 살막.

내 손에 문주를 잃은 그들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조금 이상한 점은 그러한 눈을 가진 이가 문환뿐이라는 것이다. 문환의 양옆에 있는 자들은 무인이되, 살수로 보이지는 않았다.

살수 집단은 소속된 인원부터 그들의 근거지까지, 모든 게 베일에 쌓여있는 폐쇄적인 단체다. 그런 단체에 살수가 아닌, 무인이 섞여 있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 그 의문을 해소할 방법은 없었다.

“?”

나는 문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 그를 바라봤다.

동시에 내 머리는 살막이 나를 찾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복잡하게 돌아갔다.

‘살막에서 무슨 목적으로 나를 찾아왔을까.’

‘내가 ‘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아직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살막은 내가 ‘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알았다면, 자신들의 막주를 죽인 나를 상대로 고작 세 명만 보냈을 리도 없고, 이토록 대놓고 자신들을 드러낼 리도 없었다.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나와 문환 등을 주시하고 있는 존재가 넷이나 남아 있었지만 느껴지는 기척으로 짐작컨대, 그들은 살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언어를 잊은 건가? 살막의 문환이오.”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한 차례 바라본 문환은 조금은 어색한 한국어로 다시 한 번 자신을 소개했다.

“살막?”

이번에도 나는 그들의 존재를 모르는 척, 되물었다.

일전에 차예린에게 들은 대로라면, 살막은 비밀에 가까운 단체다. 중원의 언어를 알아듣고, 못하고를 떠나 ‘살막’이라는 단체 자체를 일개 헌터인 내가 알아서는 안 됐다.

“그렇게 모르는 척, 할 필요 없소. 그대가 무림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왔으니.”

“무림?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무림을 말하는 겁니까?”

“허... 끝까지 모르는 척 하겠다는 거요?”

문환이 작게 탄식을 흘렸고,

“김태빈. 1992년 생. 현재 나이 27. 2016년 3월 23일 마력증후군으로 대한 병원에 입원. 2018년 3월 25일 기적적으로 깨어남... 4월 13일 E급 헌터자격증 취득. 4월 25일. D급 승급... 6월 7일 B급 승급...”

이어 문환의 입에서 내 일생에 대한 약력이 흘러나왔다.

출생부터 현재 헌터로 활동한 내력들 까지.

어떻게 알았는지, 자세히도 조사했다. 나조차도 기억에 묻혀 잊고 있던 것들이 있을 정도다.

“이게 일반적인 헌터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물론 이해는 하오. 자신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완전히 이해하기 전까지, 눈에 띄지 않으려면 숨겨야 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오. 내가 속한 살막은 그대와 같은 무림인들이 모인 단체요. 더 이상 자신의 내력을 숨길 필요가 없단 말이오.

혹, 과거 살막과 악연으로 얽혀 그러는 것이라면 신경 쓸 것 없소. 지금의 살막은 모든 무림인들이 뭉친 단체니. 사해가 동도라 하지 않았소. 다른 세계에서 같은 무림인들끼리 뭉쳐야지, 우리끼리 반목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오.”

말을 하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문환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살막이니, 무림이니, 대체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나는 그 날카로운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을 읽었다.

내가 조금의 흔들림이라도 보였다면 모르겠지만 문환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면서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해가 동도라니.

돈만 쥐어주면 동료는 물론이고, 자신의 부모도 죽일 수 있는 자들이 모인 곳이 살막이다. 비단 살막뿐 아니라, 모든 살수들이 그렇게 교육받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다.

나 또한 살수,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나서서 드러낼 필요도 없었고, 고작 몇 마디 말을 믿고 속내를 털어 놓을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흠...”

‘암영대가 잘못 파악한 것인가.’

문환이 침음을 흘렸다.

무림 출신이라면, 중원의 언어를 듣는 것만으로 동요하기 마련이다. 간혹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방금과 같은 말을 듣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여야했다.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일관적인 태빈의 반응에 문환은 설립 이후,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살막의 정보조직, 암영대의 정보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문환이 정보의 신뢰도를 의심하고 있을 때,

“크하하. 이거 문 대주가 아무래도 헛다리를 짚은 모양이군,”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숨어 있던 넷 가운데, 둘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금발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지닌 서양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소 평범하게 생긴 아시아계 사람이었다.

“문 대주께서 착각을 하셨나봅니다.”

비웃는 게 분명한 서양인의 말과는 어감 자체가 확연히 달랐지만 아시아계 사람은 듣기 좋게 순화해 통역했다.

“토니.”

그럼에도 서양인, 토니를 바라보는 문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딱 봐도 서로의 사이가 썩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타이탄의 토니다. 타이탄은 알고 있겠지?”

“뭐를 말입니까?”

토니는 그런 문환을 외면한 채, 나에게 물었고, 나는 문환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살막에 이어 타이탄이라는 단체까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에 적잖이 놀라긴 했지만 이를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타이탄도 모른다고?”

토니의 말은 통역을 거치긴 했지만 문환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른 거라고는 내가 진짜 타이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다는 것뿐. 덕분에 앞서와 같이 굳이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뭐.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게 되겠지.”

다만 토니의 반응은 문환과 사뭇 달랐다.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지, 등 뒤에 달려 있던 커다란 대검을 꺼내들었다. 무력으로 직접 확인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토니. 우리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가만히 지켜보던 문환도 토니가 대검을 꺼내들자,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환과 한 명은 검을, 나머지 하나는 도를 들어올렸다.

“뭐하는 겁니까?”

나를 사이에 둔, 두 단체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양측의 기세로 보아,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나는 두 단체의 위협적인 행동에 반응하면서도 상황을 주시했다.

수는 문한 측이 한 명 더 많긴 하지만 양측의 전력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집단이 충돌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

“좋을 대로.”

아쉽게도 내가 기대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먼저 대검을 꺼내들었던 토니가 어깨를 으쓱하며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의뭉스러운 태빈의 태도에 그저 확인을 하고자 했을 뿐, 사실 토니도 살막과 마찰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 기회요.”

토니가 물러서는 것을 확인한 문환이 이번엔 내게 검을 겨눴다.

무림의 인원이면 살막으로 받아들이는 게 맞지만 아니라면, 제거 대상인 것도 맞다.

한 명 한 명이 아쉽긴 하나, 끝까지 발뺌한다면, 제거 할 수밖에 없었다.

“살막이니, 타이탄이니,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공격해 오겠다면 나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요.”

마지막까지 모른 체 하긴 했지만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나는 마주 검을 들었다.

얼마 전, 던전 생성이라는 갑작스런 일을 겪은 뒤로는 결코 검을 놓고 다는 일이 없었기에 지금과 같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무기가 없어 당황하는 일은 없었다.

“굳이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겠다면야.”

더 이상, 말로써는 확인할 수 없음을 깨달은 문환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다른 두 명의 무인 또한 각기 좌우를 맡아 압박해왔다.

“누가 벌주를 받을지는 확인해 봐야 할 터!”

나는 문환의 말을 맞받아치며, 직선으로 쇄도했다.

저들이 나를 의심하고 있는 이상, 살수임이 드러나는 무공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사용한다 하더라도, 눈치 채지 못하게 빨리 전투를 마무리 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두머리를 치는 것보다 나은 선택은 없었다.

“검기?!”

“오러?! B급 헌터가 아니었나?!”

내 검에 서린 검기를 본 문환이 놀라 소리쳤고,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토니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살막과 타이탄을 떠나, 검에 기운을 담아내는 것은 결코 B급 헌터가 보일 수 없는 경지였다.

“실력을 숨겼구나?!”

예상치 못한 검기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문환의 검에도 검기가 서렸다.

상대가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안 이상, 무림의 무인이 맞고 틀림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문환 또한 절정의 경지. 자칫하다가는 자신이 당할 수도 있었다.

챙!

단숨에 끝내기 위해 목을 노렸지만 문환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뒤늦게 검기를 끌어올리긴 했지만 내 공격이 문환의 검에 막혔고, 문환과 둘의 반격이 이어졌다.

‘역시.’

그리고 문환과 함께 온 두 명의 무인이 공격을 전개한 순간, 나는 그들이 왜 살막의 살수로 느껴지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 둘은 살막의 살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황문과 강경채 왕길의 무공인가.’

한 명의 손에선 사파 중 하나인 사황문의 사황검법이, 다른 하나에게선 녹림 72채 중, 강경채의 채주 왕길의 독문무공인 파일도법이 펼쳐졌다.

사황문과 강경채, 둘 모두 나와 연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무공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황문 문주의 둘째 아들의 의뢰로, 첫째 아들이 내 손에 죽었고, 강경채의 채주 왕길은 그의 손에 약혼자를 잃은 한 사내의 의뢰로, 내 손에 죽었다.

십년은 족히 지난 일이었지만 ‘김태빈’의 몸으로 깨어나기 전, 또렷이 떠올랐던 그들의 얼굴이 기억났다.

그러나 복면을 쓰고 있는 탓에 지금 눈앞에 있는 둘이 사황문의 장남과 강경채 채주 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복면을 벗겨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쉼 없이 이어지는 합공을 버텨내는 게 고작이었다.

절정의 무인과 일류 둘의 합공이다. 합을 맞춘 것은 아닌지, 매끄럽지는 않았으나 본신의 힘을 숨기면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훗. 제법이구나.”

셋의 합공을 막아내고 있는 나를 보며 문환이 비웃음을 흘렸다.

‘제길. 안일했구나.’

미행을 눈치 채고 곧장 몸을 피했다면, 저들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고작 절정의 무공을 되찾고 너무 안일했다.

‘어쩔 수 없나.’

정체가 드러날 것이 두려워 계속 무공을 숨기자니, 당장 목숨이 위험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멈춰라!”

내가 결정을 내린 순간,

마지막까지 숨어 있던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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