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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41화 (41/150)

# 41

41화. 살막(2).

10억.

평범한 사람이 평생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현재는 물론이고,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살수시절에도 이 정도 돈은 손에 쥐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살왕의 자리에 오른 전생의 말미에는 가지려면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눈앞에 다가온 자유에 목말라 있었지, 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를 위해서건,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서건 쓰고자 하면 쓸 데는 얼마든지 있었다.

스르릉.

검집에서 두 자루의 검을 꺼내 보았다.

김문수 장인과 이호진 장인의 검.

과연 장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적지 않은 수의 몬스터들을 베어냈음에도 두 자루 모두 아직 이 하나 나가지 않았고, 여전히 날카로운 예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의 검보다 더 좋은 검들이 많긴 하지만 멀쩡한 검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무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살행의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살행 이후에 무기를 잃고 간신히 몸만 빼낼 수 있었던 적도 있었고, 화경의 경지에 오른 뒤로는 한낱 나뭇가지도 내 손에 들리면, 훌륭한 살행 도구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대상의 목을 따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흠...”

내 시선이 검 너머의 벽으로 향했다.

투명할 정도로 빛나는 검신과 비교되게 오래 돼, 누렇게 뜬 벽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문득, 이참에 집이란 것을 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살행에 나섰다. 하늘을 지붕 삼아, 땅을 이불 삼아 중원 각지를 떠돌았다. 당연히 집이 필요하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자유를 얻으면, 고향에 작은 집을 구해 유유자적 살아볼까 하긴 했지만 실현되지 못한 꿈이었다.

더불어, 새 집에서 기뻐 할 부모님과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야 내 한 몸 뉘일 곳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생각해보니, 오래 됐을 뿐만 아니라, 네 가족이 살기에는 비좁은 집이다.

김태빈의 기억 속에 있는 집은 이토록 낡고 비좁은 집이 아니었다. 필시, 내 병원비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리라.

이 또한 ‘김태빈’의 기억의 영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내가 깨어나기 전까지, 못 먹고, 못 입어 가며 내 병원비를 내준 사람들이다.

형은 차치하더라도, 부모님은 혹여나 나중에 자신들이 자식들의 짐이라도 될까, 여전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서 일을 해오고 있다.

그런 그들의 노고에 작은 보상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군.”

가족을 생각하니, 갑자기 생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씻은 듯 사라졌다.

***

그 날 저녁,

여전히 무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는 형과 일을 마치고 돌아온 부모님을 모시고 오랜 만에 식사자리를 가졌다.

“집을 사겠다고?”

이사를 가자는 내 말에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아버지 또한 조금 의아한 얼굴이었다.

헌터가 벌이가 괜찮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 고작 두 달이 조금 넘었다. 집을 살 만큼, 많은 돈을 벌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네.”

“무슨 돈이 있다고...”

어머니가 말끝을 흐렸다.

하루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내느라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자다시피 할 뿐이지만 당연히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마음일 뿐,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다.

2년 간, 시체처럼 누워있던 작은 아들이 깨어난 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기쁘다. 하지만 자식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여전히 여유는 없었다.

“헌터 일을 하면서 벌은 돈이 좀 되요. 이사 비용으로는 충분할 거예요.”

내가 A급 마나석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A급 마나석 뿐만 아니라, 이번에 잡은 켈베로스의 사체 대금이 족히 1억은 된다. 그 외에 지금까지 공략을 하는 동안, 모인 돈도 적지 않았다. 대궐 같은 집은 무리더라도 웬만한 집은 충분히 살 수 있었다.

“마나석이구나.”

어머니는 식탁에 놓인 구슬 같은 것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한 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그 값어치까지 알아보진 못했다.

“마나석? 이거 A급이잖아?!”

비명과도 같은 외침은 하루간의 수련을 복기하느라 지금껏 관심 없던 형에게서 튀어나왔다.

마나석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잠시 시선을 돌렸다, 놀랄 만한 크기의 마나석이 A급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D급, E급 던전을 전전하던 짐꾼이 A급은커녕, B급 마나석이나 본 적이 있겠냐마는 형은 한 눈에 알아봤다.

“이거 10억은 할 텐데?!”

“뭐?! 10억?!”

이어진 형의 말에 이번엔 어머니가 놀라 소리쳤다.

아버지는 그래도 체면을 차린다고 소리를 치지는 않았지만 두 분 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액수에 혹여 마나석이 떨어져서 깨지기라도 할까 안절부절 못하며 마나석에서 도통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난거야? 훔친 건 아니지?! 아니. A급 마나석을 훔칠 수 있을 리 없지.”

형은 믿지 못하겠는지 나와 마나석을 번갈아 보며 횡설수설했다.

형의 말마따나 A급 마나석은 훔치고 싶다고 훔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A급 마나석을 얻기 위해서는 최소 A급 던전에서 나오는 2급 이상의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데, 어느 누가 그런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힘을 지닌 헌터에게서 마나석을 훔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같은 A급 헌터나 그 이상의 S급 헌터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들은 고작 10억 때문에 도둑질을 해야 할 만큼, 궁하지 않다.

나만 해도 고작 켈베로스 한 마리를 잡고 A급 마나석을 얻지 않았던가.

A급 던전을 밥 먹듯 공략하는 A급, S급 헌터들에게 10억은 고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적은 돈이었다.

“이번에 켈베로스를 잡아서.”

“뭐?!! 케...켈베로스?!!”

내가 이번 동기화에서 발생한 일을 간단히 설명하자, 형은 흡사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호들갑을 떨어댔다.

눈앞에 있는 동생이 사실 켈베로스한테 죽고 남은 영혼이 아닌지, 직접 몸을 더듬어 가면서 말이다.

“형.”

“흠흠... 태빈이 말대로 이사 가요.”

내가 눈치를 주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형은 부모님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목숨 걸고? 구해온 것이긴 하지만 켈베로스를 잡을 정도라면, 고작 A급 마나석 한 개로 그칠 리 없다.

“그래도... 앞으로 너희 장가도 가고 해야 할 텐데...”

그래도 내키지 않는지, 아버지는 조금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계셨고, 어머니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내 돈에 손대는 것을 꺼려했다.

“됐어요. 이 거 하나면, 집 사고도 몇 억은 남을 텐데. 아니 이참에 두 분 일도 그만 두세요. 거 얼마나 번다고 몸 상해가면서까지 일해요.”

그러나 형도 만만치 않았다.

그간 고생하는 부모님을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번 기회에 일까지 그만 두게 하려 했다.

아버지는 몬스터 사체를 운반하고 해체하는 회사에서 잡부로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전담하고 있었다.

둘 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된 노동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 노동이기에 버는 돈은 많지 않았다.

한 달에 이백 남짓.

내가 E급 던전 하나를 공략하면, 벌 수 있는 돈으로, 형도 짐꾼 일로 한 달에 4,5백은 벌었으니, 일반인과 헌터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집은 너희 뜻대로 하마.”

침묵하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집을 사자는 의견은 받아들였지만 일을 그만두지는 않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충분히 고생하셨기에 쉬실 자격이 충분하다는 말에도, 벌써부터 자식들에게 기대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다만, 오래전부터 몸이 안 좋았던 어머니는 이번 기회에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에 전념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고맙고 미안하구나.”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덧붙였다.

굳이 따지자면, 나로 인해 잃었던 집이다, 그것을 되찾았을 뿐임에도 아버지는 고마워했고, 자식들의 손을 빌리는 것을 미안해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눈을 통해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조금은 울컥해졌다.

김태빈의 기억의 영향으로 결정한 일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은 오롯이 내 것이었다.

***

다음 날,

오전에 잠깐 형이 수련하는 것을 봐준 뒤, 나는 마나석을 처분하기 위해 헌터 백화점을 찾았다.

집은 어머니가 일을 그만 둔 뒤, 형과 함께 차차 알아보기로 했지만 원하는 매물이 있을 경우 바로 살 수 있도록 마나석을 현금화 시켜 놓기 위해서였다.

“10억8천만 원, 입금 완료됐습니다.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A급 마나석의 가치는 10억. 세금을 떼고 9억 정도 받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 현상으로 공급이 줄어든 탓에 마나석 시세가 올라 이전보다 2억 높은 12억에 거래되고 있었고, 덕분에 세금 10%를 제하고도 10억8천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기대 이상의 소득에 나는 쓸 만한 암기 몇 개를 장만했다.

몬스터를 상대로 굳이 필요할까 싶긴 했지만 유비무환인 만큼, 준비해둬서 나쁠 건 없었다.

나는 여러 암기를 비교해가며 쓸 만한 것들을 골랐다.

일회성으로 사용할 것이기에 그리 비싼 것들은 아니었지만 몬스터의 피부를 뚫어낼 예기를 지닌 것들을 찾다보니, 몇 개 고르지 않았음에도 오백만 원이 훌쩍 넘었다.

물론 지금 내가 가진 돈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나는 구매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고른 것은 여섯 자루의 비수.

백화점을 찾았을 때와 달리, 나갈 때는 날카로운 비수가 꽂혀있는 혁대가 내 허리에 달렸다.

볼 일을 마친 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집으로 향하던 나의 발길은 이내 목적지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나를 따르는 수 개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전에 차예린처럼 능력에 비해 어설픈 미행이 아닌, 완전히 자신을 숨기고자 하는 미행이었다.

파악 된 수는 총 일곱. 하나가 더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아직은 확실치 않았다. 때마침 암기를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인적이 드문 곳에 들어서자, 내가 파악한 일곱 중, 셋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모습을 본 내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 때문이었다. 익숙하지만 지구에서는 보기 힘든 무복. 셋 모두 아직은 기억 속에 선명한 무림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살막의 문환이라 하오.”

무복을 입은 사내 중, 하나가 무림의 예법인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네 왔다.

복장뿐만이 아니었다. 포권을 취하는 동작 또한 단순히 흉내 내는 게 아닌, 몸에 배인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문환의 소개는 그들의 복장도, 자연스러운 포권도 더 이상 중요치 않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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