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37화. 동기화(2).
살수시절의 나라면, 망설임 없이 내 손이 닿지 않게 된, 내가 남긴 흔적을 지웠을 것이다.
살막.
단지 이름이 같을 뿐일 수도 있지만 나와 척을 진 살막과 같은 이름의 단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흔적을 지워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만에 하나라도 이곳의 살막이 내가 기억하는 살막과 같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으니까.
흔적을 지우는 방법 또한 간단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죽은 자는 말을 하지 못한다. 무공 또한 펼치지 못하니, 흔적을 지우는데 이보다 완벽한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과거와 달리, 망설였고, 고민했다.
죽음이 이 세계와 어울리지 않다는 사실과 이재호와 이어졌던 찰나의 인연 때문에.
‘어째서?’
분명 과거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고민이다.
아무리 내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했더라도 말이다.
사실, 지금의 고민 외에도 과거의 나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을 몇 번이고 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형과 부모님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좀 더 특별하게 생각하고, 김시연을 비롯한 팀원들에게 무공을 전해주는 등의, 과거의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들이었다.
처음에는 마지막 순간에 7호가 만들어낸 감정의 동요가 만들어낸 가벼운 변화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평생을 잊고 살았고, 사라졌다 생각했던 감정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일어난 변화.
스스로가 너무 유해졌다고 느끼긴 했지만 더 이상 살수가 아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이번 이재호의 경우로 깨달았다,
지금 이 감정의 변화는 내가 생각하던 것으로 인한 변화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이 변화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었다.
‘김태빈’의 기억.
내 머릿속에 사라지지 않고 녹아 있는 그의 기억이 나를 이리 변하도록 만들었다.
가족에 대한 감정과 팀원들에 대한 안타까움 등, 모두 ‘언’이 아닌, ‘김태빈’의 기억으로 인해 느낀 감정이었고, 그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움직였다.
나를 ‘언’이라 굳게 믿고 ‘김태빈’은 단지 기억뿐이라 여겼는데, 사라지지 않은 그의 흔적이 남아 내 사고와 선택을 좌지우지 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극히 일부의 각성자들이 겪는 다는 기억의 혼재.
그 잔향이 짙게 남아 그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김태빈’인 내가 ‘언’인 척 하고 있었을 뿐이 아닌가 하는.
과연 지금의 나는 ‘언’이 맞는가?
나는 제 자리에 멈춰 선 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 본질에 대한 의문이었기에 지금까지 미뤄뒀던 의문들처럼 마냥 뒤로 미뤄둘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무림에서의 나와 지구에서의 나를 대조했다. 어느 부분에서 ‘김태빈’ 혹은 ‘언’의 기억이 내 행동에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하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의 내 행동을 하나, 하나 되짚어 보면서 커다란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는 순간마다 내가 과거의 ‘언’과 결정을 내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언’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이를 통해 나는 현재 내 이성은 ‘언’이 구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감성은 ‘언’과 ‘김태빈’이 반반씩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김태빈’의 기억이 반이나 섞여 있었기에 감성적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그 영향으로 과거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들을 내려왔던 것이다.
아마 김태빈이 2년 간, 마력증후군으로 누워있으면서 이성보다는 감성의 부분이 극대화됐고, 두 사람의 기억이 합쳐지는 과정에서 나 ‘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내가 왜 김태빈의 몸으로 깨어났는지 알 수 없으니, 그저 가장 높은 가능성을 토대로 추론해 본 것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지금의 내가 완전히 과거의 ‘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정확히 말하면, ‘언’과 ‘김태빈’이 뒤섞인, 그러나 ‘김태빈’보다는 ‘언’에 훨씬 가까운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불현듯 깨달은 본질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 냈음에도 나의 혼란은 가시지 않았다.
단순하게 봤을 때, 감성은 내 사고의 절반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감성의 절반을 나 ‘언’이 아닌 ‘김태빈’이 차지하고 있다.
과거와 다른 불안전한 정체성을 느끼며 혼란스럽지 않다면,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언’과 일부의 ‘김태빈’이 뒤섞인 나를 오롯이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혼란스러웠다.
‘나는 ’언‘이다.’
그러나 혼란은 길지 않았다.
‘김태빈’의 기억이 섞여 들며 내 사고 방식에 작은 변화가 있긴 했지만 이는 자아가 분열되어있는 것이 아닌, 기억의 잔재가 미친 영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잠시 혼란스럽긴 했지만 지금의 내가 ‘언’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면.”
이성적으로는 이재호를 처리해야 함이 옳았으나, 일단은 그에 대한 처분을 보류하기로 했다.
이 또한 김태빈의 기억이 남긴 영향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 변화 또한 내 일부로 수용했고, 더 이상 혼란에 흔들리지 않았다.
“꼭 이겨내고 돌아올 겁니다.”
팀원들은 그가 시간이 지나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내 뜻을 지지했다. 곧바로 [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다 ]며 이재호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방관했다.
이재호가 돌아온다면, 흔적을 다시 내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이고,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팀원들과 끈이 닿아있게 놔두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혹여 내가 지금의 결정을 번복하고, 그를 처리한다 하더라도 일이 더 수월해 질 테니 말이다.
“협조 요청은 어떻게 할까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다시 협회의 협조 요청 문제로 넘어와서 팀원들이 내 의견을 물어왔다.
“요청은 요청일 뿐, 굳이 따라야 할 필요는 없겠지.”
D급 던전. 전혀 위험할 것 없는 일이지만 동기화가 언제 발생할지 알 수 없는 만큼,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할 가능성도 있었다.
공략을 기피하며 시간이 남아도는 헌터라면 모를까, 나는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동기화가 헌터들이 공략을 기피하면서 발생한 문제이니 만큼, 협회 측에서도 내가 계속해서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상, 특별히 문제 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에 나는 이번 요청을 마음 편히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네.”
협회의 요청에 곤란해 하던 팀원들은 내가 결정을 내리자, 더 이상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굳이 나를 설득하고자 한다면,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애초에 절대복종을 전제로 구성된 팀이기도 했고, 무공을 가르쳐 준 뒤로 팀원들 전부가 진심으로 나에게 복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결정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그런데, D급 던전이라고 했나.”
“< 타락한 임프 무리 >로, D급 던전이 맞습니다만, 이상 현상이 발생했고, 현기 팀도 실패한 것을 감안하면, C급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C급이라. 그 정도라면,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직접 공략하는 게 낫겠군.”
김시연의 설명에 내가 덧붙였다.
예상등급 C급. 일전에 팀원들이 위험에 처했던 등급이긴 하나, 그 때는 지켜야할 시민들이 있었다. 만약 뒤에 시민들이 없었다면, 팀원들도 그토록 무기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도착할 때까지는 버텼겠지.
게다가 오늘 한 번 확인하긴 했지만 C급 던전은 팀원들이 실질적으로 죽음을 느꼈던 등급의 던전인 만큼, 정말로 팀원들이 공포를 이겨냈는지, 시험해 볼 기회이기도 했다.
“ㄴ...네?!”
내 말에 팀원들이 급격히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직접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섰던 만큼, D급과 C급 던전은 수준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몸이 기억하는 공포는 쉽게 지워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잔뜩 굳은 얼굴이었지만 그나마 김시연이 가장 빨리 평정심을 찾았고, 장만식과 김영기도 이내 신색을 회복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공포를 완전히 극복해 내기 위해서는 언제고 부딪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피하지 않았다. 두려움보다는 오늘 본 성장에 대한 희망을 향한 갈망이 더 컸다.
***
나와 팀원들은 공략에 대한 여독을 미처 풀기도 전에 < 타락한 임프 무리 > 던전으로 향했다.
만약을 대비해 일반인인 짐꾼 아저씨와 형은 제외한 채였다.
막 공략을 마치고 나오긴 했지만 실제 공략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고, 나머지는 수련으로 보냈기 때문에 팀원들 모두 피로가 쌓이거나 한 상태는 아니었다.
잠이 조금 부족하기는 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던전을 공략하기로 결정한 이상, 편히 자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협회 측은 자신들이 협조요청을 보낸 던전을 공략하겠다고 허가를 요구하자, 반색과 동시에 우려를 표했다.
공략에 성공한다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앞서 두 팀이 실패한 만큼, 또 다시 헌터들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동기화에 대비해 하염없이 헌터들을 대기시키는 것보다는 그 전력을 다른 곳에 돌리는 게 나았기 때문에 허가 요청을 반려하지는 않았다.
“강혁 헌터?”
던전 앞에 도착하니, 수십의 헌터들이 동기화를 대비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낯익은 헌터도 있었는데, 내가 짐꾼으로 공략에 참여했던 < 난폭한 리자드맨 군락 >의 공략팀, 스톰 팀이었다.
당시에 예상외로 많은 리자드맨이 튀어나온 탓에 열셋에서 일곱이 죽어 여섯밖에 남지 않았었는데, 그 사이 다시 인원을 충원했는지, 열 명의 헌터들이 팀장인 강혁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그 외에도 열 명 내외의 서너 개의 팀들이 각자의 팀원들끼리 뭉쳐 저들끼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던전을 앞에 두고 안일해보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동기화가 언제 발생할지 알 수 없으니, 다들 풀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김태빈 헌터? 오랜만이군요.”
강혁도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 아는 체를 해왔다.
“얘기 들었습니다. B급 헌터가 되셨다고요. 그 때도 평범한 헌터가 아닌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놀랍습니다.”
하긴 E급이면서 홀로 리자드맨 열 마리를 몰살시킨 헌터를 잊는 게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그 헌터가 불과 두 달 만에 B급 헌터가 돼, 헌터 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기까지 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소문과는 달리, 위기의 순간에 나를 포함한 짐꾼들을 외면한 자다. 웃으며 인사를 나눌만한 사이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