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35화. 트라우마(4).
불안한 얼굴이 일견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형.
매일매일 생사가 오가는 치열한 삶 뒤로 찾아온 휴식을 마냥 달가워하지 못하는 형의 모습이 나와 겹쳐보였다.
마력증후군에서 깨어난 이후로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헌터 일에 집중하고 있는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잃어버린 무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사실은 나 스스로도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평생을 속박 속에 살아온 나는 자유가 익숙하지 않았다.
살행이라는 족쇄에 벗어나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었음에도 과거의 경지라는 또 다른 족쇄로 나를 구속했다.
백살(百殺)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경지를 되찾겠다는 목표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원하던 자유는 무공에 있지 않았다.
“아니. 가르쳐줄게.”
나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형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조금은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향상심을 잃은 것은 아니나 이토록 모든 것을 제쳐둔 채, 조급해할 일은 아니었다.
잃었던 것을 찾아가는 것이기에, 잠시 여유를 가진다고 닿았던 경지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고, 얻었던 깨달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참에 뒤로 미뤄두었던 의문들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무림의 ‘언’이었던 자신이 지구의 ‘김태빈’의 몸으로 깨어나게 됐는지, 내가 기억하는 이들과 똑같이 생긴 이들이 왜 이곳에 존재하는지.
그 밖에 무수히 많은 의문들.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생각해 본들, 감조차 잡히지 않았기에 미뤄뒀던 것들이다.
“정말?”
불안하던 형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또 하나. 스스로 소중하다 여기며, 그리 대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가족에 대해.
***
집에는 무기도 없고, 수련자체가 마땅치 않기에 근처의 헌터 단련실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심법을 먼저 익히고 내공을 쌓는 게 우선이겠지만 불안함을 보이는 형에게는 당장 성취를 얻기 힘들고, 정적인 심법보다는 무공을 먼저 가르치는 게 나을 듯싶었다.
초식을 익히며 땀을 흘리다 보면, 잡념도 사라질 테니.
“편한 걸로 골라봐.”
내가 헌터 단련실에 구비되어 있는 훈련용 무기들을 가리켰다.
무기를 정해주고, 그에 알맞은 무공을 전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형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배움이 늦어 상승의 경지에는 오르기 힘들다.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높게 쳐줘봐야 절정이나 가능할까. 한계가 명확하기에 길을 정해주기보다는 형이 원하는 길을 걷는 게 나았다.
“흠... ”
“도?”
앞으로의 길을 결정하는 것이기에 신중히 무기를 고른 형의 선택은 도였다.
훈련용이기에 나무로 된 것이긴 하나, 도신이 두터워 충분히 철로 된 도의 무게감을 담고 있었다.
그럼에도 짐꾼 일로 단련된 형은 거뜬히 들어 올렸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자신의 손에 맞는지 확인까지 마쳤다.
“응. 익숙하기도 하고. 백일창, 천일도, 만일검 이라잖아. 늦게 시작한 내가 만일동안 검을 수련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까.”
형은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형이 호신용 무기로 들고 다니는 무기가 도였으니, 도를 선택할 건 예상했다.
그런데, 백일창, 천일도, 만일검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지만 나는 굳이 정정해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농담처럼 한 말에 정색으로 반응할 필요도 없고, 뭐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니까.
어쨌든, 형은 내 예상대로 도를 택했고, 나는 그에 맞는 무공을 준비했다.
참혼(斬魂)도법.
혼마저 베어버린다는 뜻을 가진 도법으로, 녹림 총표파자가 사용하던 도법이다.
내가 녹림 총표파자의 아들을 죽이고 얻은.
사파의 도법이긴 하나, 내가 알고 있는 도법 중에서 가장 도의 기본에 충실한 도법으로, 초심자인 형이 익히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도법이 가지는 수준 또한 팀원들에게 전해준 육합검법보다는 한 단계 높았다.
나는 우선 여섯 개의 초식으로 되어있는 참혼도법의 전반부 삼식을 선보이고, 이를 따라하는 형의 동작을 하나하나 집어주면서 몸에 익게 하도록 했다.
“이거 장난 아니구나.”
내공 없이 초식을 따라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형은 도법에 담긴 힘을 일부나마나 느꼈는지, 연신 감탄을 자아냈다.
한낱 삼류 무공이라도 그 안에 담긴 무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그저 휘두르고 베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하물며 녹림 총표파자의 독문무공이다. 무림 역사에 손꼽힐 만큼 뛰어난 도법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형이 놀라기에는 충분했다.
“가부좌 틀고 앉아봐.”
한바탕 도를 휘두르며 땀을 빼낸 형에게 심법 또한 전해줬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가 불편한지, 살짝 인상을 쓰긴 했지만 형은 군말 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직접 몸을 움직이며 도를 휘두른 덕인지, 어느새 형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과 초조함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내가 전해준 심법은 팀원들과 같은 혼원십법.
조화를 중시하는 심법으로, 내공이 쌓이는 속도는 늦다는 게 흠이지만 던전의 풍부한 기운을 생각하면, 더 이상 흠이 아니었다.
게다가 형에게는 단순히 구결만을 알려주고 스스로 기를 깨우치게 하지 않았다.
가족이니 만큼, 특별대우는 당연하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형의 등에 손을 얹고, 내공의 흐름을 직접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만으로 당장 단전에 내공을 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빠른 길임은 두 말 할 것 없었다.
도법과 심법을 한 번 가르치고 나니, 형은 숨 쉬는 시간도 아까워 보일 정도로 수련에 매진했다.
매일 같이 헌터 수련실을 찾아 참혼도법의 초식들을 익히는데 여념이 없었고, 던전이 아니면 효과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임에도 심법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늦었기에 그 차이를 메우고자 배는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 또한 여유를 가지고 미뤄뒀던 의문들을 해소하고자 했음에도, 절로 그에 영향을 받아 형의 수련을 도왔다.
참혼도법이 기본에 충실하다고는 하지만 근간은 사파의 무공. 아직 내공이 없는 형이 사도로 빠질 일은 없겠지만 무엇이든 처음이 중요했다.
자연히 의문들은 다시 뒤로 밀려났다.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기에 사실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당장은 현재의 삶이 더 중요했으니, 나는 이에 충실했다.
부모님은 매일 같이 이른 아침부터 헌터 단련실로 향하는 형제를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한동안 무기력하던 형의 열정을 막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형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고작 며칠의 노력으로는 단전에 내공을 쌓지도, 초식을 완전히 익히지도 못했다.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이다.
나는 그러한 형의 노력에 대한 작은 선물로 던전 공략을 진행했다. 팀원들과 약속한 일주일도 지났기 때문에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도 있었다.
최근 들어 던전 등급과 관련해 이상 현상이 자주 발생하고 있는 관계로, 예정된 공략을 뒤로 미루고 상황을 주시하는 헌터들이 많았기 때문에 허가를 따내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은 D급 던전으로, 공략에 부여되는 시간은 하루.
형이 거의 무아지경에 가까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터라, 부족한 감이 있지만 C급 던전에서 팀원 모두가 위험에 빠졌던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
당시에도 사냥꾼 거미가 먹잇감을 바로 포식하는 몬스터였다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전멸을 면치 못했을 테니 말이다.
“팀장님.”
“태빈군.”
오랜만에 팀원들과 짐꾼 아저씨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짐꾼 아저씨들은 호신공을 익힌 덕분인지, 신수가 제법 훤해 보였지만 팀원들은 전혀 아니었다.
“후우... 후...”
D급 던전을 눈앞에 두고 팀원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김시연과 장만식은 어느 정도는 이겨냈는지, 확실히 전보다 나아 보였지만 이재호와 김영기는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물론 정도의 차이일 뿐, 넷 모두 긴장하고 있다는 것쯤은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재호는 가쁜 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다들 왜 그렇게 굳어있어?”
팀원들이 겪은 일을 모르는 짐꾼 아저씨들이 어깨를 툭 치며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들락날락한 던전 중 하나일 뿐이다.’
다들 스스로를 다잡는데, 여념이 없었다.
수차례 머릿속으로 되뇌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봤지만 일전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이번 던전이 D급으로, 그리 어려운 던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진입한다.”
팀원들은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던전에 발을 들였다.
이겨냈다면, 뒤따를 것이고,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 그들의 선택일 뿐이다.
***
먼저 던전에 진입한 나는 뒤따라 들어올 일행을 기다렸다.
“다들 왜 그런디야.”
짐꾼 아저씨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아저씨들은 이전과는 다른 팀원들의 상태가 의아한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던전에 도착한 순간, 팀원들에 대한 의문을 접고, 던전에 집중했다. 밖에서와는 다르게 약간은 긴장한 기색을 보였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정도는 아니었다.
“후욱. 후욱.
그 뒤로 김시연과 장민식이 차례로 던전에 들어왔다.
아직 공포가 완전히 가시진 않았는지, 연신 거친 숨을 내쉬며 진정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던전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공포를 이겨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 약간의 시간을 두고 김영기가 도착했다. 이를 악문 그의 얼굴에도 꼭 이겨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가지.”
그러나 이재호는 끝끝내 던전에 들어오지 못했다. 삼십 분 가량으로 기다림이 길지 않았지만 그 이상 기다린다 해도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공략을 진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번 D급 던전에서 나타난 몬스터는 코볼트.
고블린보다 조금 더 영악한 머리와 근소한 우위에 있는 신체능력으로 인해 8급으로 분류되는 몬스터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코볼트는 그 수 또한 백여 마리로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D급 헌터가 두셋은 포함된, 십여 명의 헌터들이 와야 처리할 수 있을 정도.
그러나 B급 헌터이면서 A급 헌터와 같은 힘을 가진 나에게 코볼트들은 식후 운동조차 되지 않는 상대였다.
고작 코볼트 따위를 상대하는 데는 상승의 무리도 필요치 않았다. 나는 그저 무심히 검을 휘둘러, 베고, 또 베었다.
내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코볼트의 시체가 남았다.
팀원들의 시험을 위해 일부러 몇 마리를 흘리긴 했지만 백 마리에 달하는 코볼트들은 나 하나에 의해 몰살당했다.
공포를 이겨내고 던전에 발을 들인 팀원들은 처음에는 잔뜩 몸이 굳어 코볼트 한 마리에도 고전했지만 차차 나아져 갔다.
여전히 사냥꾼 거미를 생각하면 막막함이 앞섰지만 8급 코볼트를 무리 없이 상대하는 자신을 보며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리고 팀원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확실히 강해졌고, 앞으로 더 강해질 수 있음을.
공포를 극복하고 반짝이는 팀원들의 시선 속에는 코볼트들을 유린하는 태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