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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34화 (34/150)

# 34

34화. 트라우마(3).

“아니... 그럼 사람들을 구할 리 없는데...”

무언가를 물으려던 차예린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묵묵히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녀가 나를 공격할 의사가 없음은 확인했지만 여전히 경계는 거두지 않은 채였다.

“등급이 잘못 된 건가...?”

차예린은 자신의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결론을 도출해냈다.

C급 던전을 무사히 공략해 낸 것부터 자신의 미행을 눈치 챈 것까지, 태빈이 보여준 능력은 결코 B급 헌터가 보일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빈이 A급 이상이라고 한다면, 전부 설명이 가능하다. 결국 현재 B급이라는 등급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닌가요?”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차예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무표정한 내 얼굴만 봐서는 어떠한 정보도 읽어낼 수 없었다.

“조사는 아까 끝난 걸로 아는데?”

B급 헌터가 된 뒤에 기연으로 예상보다 빠르게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그로 인해 A급 헌터와 같은 수준이 됐고, D급과 B급 때와는 달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승급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승급에 뒤따르는 주목이 꺼려지기도 했고.

이러한 것들을 설명하기도 귀찮거니와, 애초에 내가 차예린의 질문에 답할 의무는 없었다.

나는 차예린의 미행이 단순히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함에 있었음을 안 순간,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한국의 셋 뿐인 S급 헌터. 초절정의 끝에 닿아 있는 그녀의 무위에 조금의 관심은 있었지만 그녀의 호기심을 해결해 주는 귀찮음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이봐요!”

내가 처음 한 마디를 제외하곤 침묵으로 일관하다, 종내에는 자신을 무시하고 등을 돌리자, 차예린의 뾰족한 음성이 들려왔다.

세상이 변하고, S급 헌터가 된 이후, 남녀, 지위 고하를 떠나 모두가 자신에게 숙이고 들어왔다.

자신을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 겪는 반응에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온 고성이었다.

“뭐지?”

“당신. 내가 누군지 몰라요?”

“S급 헌터 차예린. 신의 길드의 부길드장. 조사과정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차예린의 선택은 자신의 신분을 내미는 것이었지만 그런 것이 나에게 통할 리 없었다.

무림에서 수없이 봐왔던 행태다. 소위 거대문파라는 곳에 소속되어 있던 작자들이 행하던.

차예린은 그들과 달리, 배경을 믿고 그러는 것이 아니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 대한 내 반응은 한결같았다.

굳이 나서서 척을 지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았다.

차예린과도 마찬가지.

지구의 인연들에게 피해가갈까 선공은 미뤘지만 더 이상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고개를 돌린 내 눈과 차예린의 눈이 맞닿았다.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무심한 시선에 차예린은 한기마저 담겨있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눈빛이... 아니 잠깐 대화 좀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대화였나? 취조가 아니라.”

“아니. 그건...”

내 짧은 대답에 날카로웠던 차예린의 목소리가 급격히 힘을 잃었다.

상대를 미행한 것도 모자라, 넘치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 쏘아붙이듯 질문을 쏟아내고, 지위를 내세워 상대를 찍어 내리려고까지.

자신의 잘못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후... 이러려던 게 아닌데. 미행부터 귀찮게 한 건 죄송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동생을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차예린이 사과와 함께 본연의 목적인 감사를 전해왔다.

사실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태빈을 미행한 것이 아니었다.

주체하지 못하는 호기심 때문도 있었지만 제대로 전하지 못한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팀원들과 있을 때는 심각한 분위기에 눈치를 보다 접근하지 못했고, 어쩌다보니 미행을 하게 됐을 뿐이다.

그러다 자신의 미행까지 눈치 채버린 태빈으로 인해 의심이 싹텄고, 이를 주체하지 못해 버렸다.

누가 봐도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음.”

한숨과 함께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린 차예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의외였다.

무림에서 보통 제 분을 이기지 못해 무기를 꺼내 들거나, 후회하게 될 거라는 등의 으름장을 놓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혹시라도 이어질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차에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제가 진짜 한 번 꽂히면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궁금한 것만 생기면 앞뒤 재지 않고... 이게 참... 고쳐야 되는데...”

차예린이 변명 섞인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삽시간에 뒤바뀐 차예린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맥이 풀려버렸다.

“그래서 말인데, 설명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진짜 이해가 안가서 그러는데, 어떻게 C급 던전을 공략해 낸 거죠. 제 미행은 또 어떻게 알아 차렸고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차예린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후...”

일견 간절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상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무시했을 뿐이다.

“거미줄로 묶어 놓은 탓인지, 사냥꾼 거미가 팀원과 사람들을 곧바로 죽이지 않더군. 그 사이 놈들을 죽였다. 미행은 굳이 자신을 숨기고자 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알아차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칠 정도로 간단한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차예린은 이해했다는 듯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빈이 B급 헌터가 아니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려놓았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차예린에게도 사냥꾼 거미쯤은 그저 죽였다는 표현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몬스터다. 그런 사냥꾼 거미가 먼저 다른 사람들을 노리지 않는다면, 놈들을 상대하면서 일행을 지키는 게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미행 또한 애초에 자신이 정체를 숨기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조용히 뒤따랐을 뿐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다 여겼다.

“그렇군요. 살막이나, 타이탄. 아니, 어쨌든 다행이네요.”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어진 차예린의 말에 이미 무표정하던 내 얼굴이 한층 더 굳어졌다.

적이라는 판단에 하대하던 말투가 존대로 바뀐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살막이란 단어를 지구에서, 이런 상황에서 듣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고맙...다고요.”

“아니. 방금 살막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살막이요?”

차예린은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듯 되물었다.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네? 제가요?”

그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차예린의 모습에 나조차도 순간 헷갈렸을 정도다.

그러나 나는 나의 청각을 믿었다. 내 귀는 분명 그녀가 살막이라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오히려 그녀의 모른 체가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분명 말했습니다. 살막과 타이탄이라고.”

“...”

차예린은 확신에 찬 내 표정에 마냥 잡아 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어 담을 수는 없었다.

살막과 타이탄.

두 단어는 대부분의 헌터들이 알지 못하는, 최소 A급 이상의 극히 일부 헌터들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당연히 태빈에게는 말해줄 수 없었다.

차예린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각성자들이 모두 헌터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시죠?”

“그렇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예린의 말대로 각성을 했다고 해서 전부 헌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E급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등급에서도 헌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많았다.

“그들 중, 일부가 모여 만든 살막과 타이탄이라는 단체가 있어요. 그 외에도 몇몇 단체들이 있긴 하지만 일단 헌터가 아닌 각성자들이 만든 단체 중 가장 큰 곳은 살막과 타이탄 두 곳이에요.”

차예린은 태빈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이어갔다.

살막은 시스템으로 인해 생긴 능력을 무공에, 타이탄은 마법과 오러 등에 빗대어 자신들을 무협 소설 속에 나오는 무림인이나, 판타지 세계의 인물들과 같이 여기는 이들이 모인 단체들이었다.

무협과 판타지.

단순히 소설을 떠올리면 정의로운 영웅이 먼저 떠오를지 모르나, 두 단체는 결코 좋은 목적을 가진 단체가 아니었다.

차예린의 설명 속에 살막과 타이탄은 현재 지구의 음지를 양분하고 있었다.

“솔직히 당신이 두 단체에 소속 된 사람이 아닌지 의심했어요. 하지만 그랬다면 무리해서 사람들을 구할 이유가 없죠. 그들은 그럴 존재들이 아니니까요.”

“흐음...”

차예린의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심쩍은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충분히 앞선 차예린의 행동을 수긍할 만한 이야기였다.

“어쨌든, 오늘 동생을 구해준 건 정말 고마워요. 제 연락처에요.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주세요.”

내가 납득하는 듯하자, 차예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행여나 내가 더 깊이 물어올까 급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숨길 수 없다 생각해, 밝히긴 했지만 당연히 전부를 말해 준 것은 아니었다. 차예린이 태빈에게 말한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차예린이 감춘 가장 큰 사실은 살막과 타이탄에 속한 이들이 실제로 무림인과 판타지 세계의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단지 기억뿐일지라도.

***

차예린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생각에 잠겼다.

살막.

기억속의 이름은 과거 나의 첫 살행 대상이었던 노인과 닮은 이재성을 만나면서 가졌던 의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혹시 이 세계에 내와 인연이 이어졌던 이들이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러나 악연이든, 선연이든 수백 수천의 인연들 가운데, 고작 하나일 뿐이고, 단체 또한 살막이라는 이름만 같을지도 모르는 한 곳뿐이다.

무언가를 추론하기에는 아직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 단편적이었다.

정보가 더 필요했다.

그렇게 내가 의문으로 인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

“태빈아.”

나를 부르는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의 목소리에는 섭섭함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굳이 묻지 않아도 이유는 알고 있었다.

팀원들에게 무공을 전해주고, 짐꾼 아저씨들에게도 호신을 위한 간단한 가르침을 내렸다. 그런데, 아직까지 형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에게는 좀 더 상승의 무공을 전해주기 위해 시간을 들인다는 것이 본신의 무공을 되찾기 위해 집중하다 보니, 차일피일 시일이 미뤄져 버린 것이다.

“어.”

형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 안 되는 현재의 연이다.

나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연에 대한 상념을 잠시 미뤄두고 형에게 집중했다.

“전에 말했던 가르침? 말이야. 좀 더 기다려야 될까?”

형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일전에 짐꾼 일은 나와 함께 할 경우에만 하는 것으로 약속했기 때문에 내가 B급 헌터가 된 뒤로 형은 백수처럼 지내고 있는 형이었다. 마냥 기다리는 게 적잖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지난 2년 간, 치열하게 살아온 형이다. 조금은 쉬어도 될 텐데, 그간의 치열함이 잠시의 휴식도 형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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