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32화. 트라우마.
헌터협약.
던전 공략에 관해 헌터들이 맺은 조약이다.
처음 던전이 생기고 마나석과 몬스터의 부산물이 돈이 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헌터들이 던전으로 몰려들었다.
헌터협약은 고사하고, 길드와 팀의 존재도 명확하지 않았고, 공략 허가라는 개념도 존재 하지 않던 시기였다.
던전에 몰려든 헌터들은 서로 한 마리의 몬스터라도 더 잡기 위해, 하나의 마나석이라도 얻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였다.
단순히 헌터들이 몬스터만 두고 경쟁을 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만큼 던전이 빨리 클리어 될테니 말이다.
그러나 욕심에 눈이 먼 헌터들은 그러지 않았다.
마나석을, 부산물을 빼앗기 위해 동료 헌터들을 죽였다.
처음에는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던전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던전 밖에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던전 등급도 측정이 불가능하던 시기였기에 단순히 던전 안의 몬스터가 강했고, 그로 인한 피해라고 여겼다.
살아 나온 헌터들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운 좋게 같은 헌터들의 마수에서 살아 돌아온 헌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밝힌 진실은 헌터계를 너머 한국 전체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정부가 직접 나서 사건을 규명하기에 나섰고, 지금까지 미심쩍었던 사고들이 낱낱이 파헤쳐져 의문으로 남았던 헌터들의 사망 원인이 같은 헌터들에게 있었음이 하나둘 드러났다.
헌터들을 규탄하는 시위가 매일 같이 이어졌다.
헌터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정부에서 직접 규제, 관리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헌터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협회를 주축으로 공략 허가를 받지 않은 헌터는 던전 공략이 불가능하고, 타 길드와 팀 등이 공략을 진행하고 있을 때에는 다른 헌터들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한 헌터 협약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헌터협약은 헌터들에게는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도 꼭 지켜야만 하는 법과도 같았다.
차예린이 던전에 진입하는 것은 그러한 헌터협약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사내의 반대는 당연했다.
헌터 협약을 어길 경우 제약은 확실하다.
인명구조라는 불가피한 이유를 댄다 하더라도, 기본 헌터 자격 박탈에 심하면 구속까지 될 수도 있었다.
차예린이 아무리 국내에 셋뿐인 S급 헌터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상관없어요.”
헌터협약까지 들먹였지만 차예린은 단호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헌터협약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진입한 헌터들 신원 확인 됐습니다.”
그리고 그런 차예린의 결심을 더욱 확고히 하는 정보가 전달됐다.
주변 CCTV 등을 토대로 던전에 진입한 헌터들의 신상이 전해진 것이다.
“고작 B급 헌터 하나에 E급이 넷?! 이래도 구본승 헌터는 제가 기다려야 된다고 생각하나요?”
“하지만... 헌터협약 때문에...”
구본승이라 불린 사내가 말끝을 흐렸다.
B급 헌터가 한 명 포함 되어 있으니, 어찌어찌 공략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민들의 생존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아니 E급 헌터들도 마찬가지로, B급 헌터 홀로 생환해올 가능성에 높았다.
B급 헌터가 C급 던전까지 홀로 공략이 가능하다고는 하나, 정말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후... 저 안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제 동생이에요.”
차예린이 한숨과 함께 자신이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털어놨다.
그 말에 구본승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고, 옆에서 듣고 있던 박영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S급 헌터인 차예린이 헌터협약을 어기면서까지 던전에 진입하고자 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일단 협회에 말은 해놓겠습니다.”
구본승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이유가 없더라도 고집을 부리는 차예린을 말리기 쉽지 않은데, 동생이라는 이유가 있는 이상, 그녀를 말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미리 협회에 언질을 해 최대한 이해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던전에는 저 혼자 들어갈 테니.”
차예린은 짧게 덧붙인 뒤, 자신의 장비를 점검했다.
C등급 던전.
S급 헌터인 그녀에게는 가벼운 몸 풀기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과 수년 간 함께한 애병만 있다면, 다른 준비는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차예린이 던전에 진입하려는 순간,
“어... 어떻게?”
그녀는 던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략이 완료됐을 때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
던전 핵을 파괴한 나는 주변의 기가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불안정해진 기는 이내 갈라진 균열의 틈 새로 빠져나갔고, 탁하고 답답한 기운의 지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
환호성이 귓가를 울렸다.
총 여덟.
사라진 시민 셋과 그들을 구조하기 위한 헌터 다섯 전부 무사히 돌아왔다.
최상의 결과에 주변을 통제하던 헌터들과 통제선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시민들이 사라지는 던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나를 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살았다.”
“휴...”
시민들은 자신들을 향한 환호성과 눈앞에 펼쳐진 시가지를 보며 살았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고, 죽음이란 공포에 젖어있던 팀원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회색빛 건물에 텁텁한 공기가 느껴졌지만 그들은 그마저도 반가워했다.
“어... 어떻게...”
그 와중에 한 여자가 사라진 던전과 그 안에서 나온 나를 보며 놀란 눈으로 말을 더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초절정..?’
나 또한 그 여자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여자는 내가 지구에 와서 만난 헌터들 가운데, 가장 강한 존재였다.
여자의 몸속에서 흘러넘치다 못해 터질 것만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제대로 갈무리되진 않았으나 그 기운은 내 수준을 아득히 뛰어 넘고 있었다.
깨달음만 얻는다면, 충분히 다음 경지에 발을 디딜 수 있을 정도.
눈앞의 여자는 초절정의 끝에 도달해 있었다.
“언니!”
서로가 서로에게 놀라고 있는 와중에 세 명의 시민들 중, 한 사람이 여자를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며 달려 나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품에 안겼다.
“혜린아.”
차예린은 자신의 품에 안긴 동생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자신이 놀라는 것보다는 살아 돌아온 동생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나에게서 시선을 거둔 차예린이 자신의 품에 안긴 동생의 어깨를 도닥였다.
***
던전에 휩쓸렸던 시민들은 심신의 건강을 위해 병원으로 옮겨졌고, 나와 팀원들에 대해서는 간단한 조사가 이뤄졌다.
“당신이 던전을 공략해 낸 건가요?”
던전이 사라지고 믿지 못할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차예린이 물어왔다.
고작 B급 헌터 하나와 E급 헌터 넷.
동생이 무사한 것은 무엇보다 기뻤지만 여전히 어떻게 그들이 무사히 공략을 완수해낼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었다.
“네.”
“던전 내의 몬스터가 사냥꾼 거미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그럼 어떻게? 아무리 B급 헌터라고 해도 혼자서는 상대가 불가능했을 텐데...?”
차예린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질문을 쏟아냈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의 표정이었다.
B급 헌터가 C급 던전을 공략하는 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해야 할 몬스터가 사냥꾼 거미라는 것과 지켜야할 대상이 있는 상황에서 고작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만에 던전을 공략했다는 것은 충분히 놀랄 만한 사실이었다.
“그것까지 설명해야 합니까?”
인명 구조와 같은 상황에서는 던전 공략 후, 지금과 같이 간단한 조사가 이루어지곤 했지만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헌터가 어떻게 몬스터와 싸웠는지까지는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건...”
차가운 내 물음에 차예린은 꽤나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S급 헌터인 차예린을 나와 같이 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녀에게 이런 차가움은 익숙하지 않았다.
“흠흠. 차예린 헌터가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지만 그보다는 우선 시민들을 무사히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본승이 당황한 차예린을 대신해 나섰다.
조사도 조사고, 차예린도 차예린이지만 그 보다는 감사의 인사가 우선이었다.
협회에서 나온 관계자들도 S급 헌터인 차예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말을 않고 있을 뿐이지, 차예린이 연신 자기 궁금한 것만 물어대는 탓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사를 위한 자리지, 차예린의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결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의례적인 말로 답했다.
김시연의 강력한 주장이 없었다면, 외면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저 또한 협회를 대신해 감사를 전합니다.”
협회 측 인사는 내 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협회 입장에서 태빈은 연이은 승급으로 화제를 모아 협회에 쏠려있던 관심을 분산시켜준 고마운 헌터다.
비록 이를 협회에서 이용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이미 고마운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 이번에는 시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감수하는 헌터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마음에 들지 않을 리 없었다.
보상을 논의하는 등의 몇 가지 자잘한 절차가 남아있긴 했지만 조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과정이 어찌됐든 모두가 무사히 돌아왔다.
목숨을 걸고 고생한 헌터들을 이렇게 붙잡아 두는 것 자체가 실례였다.
***
차예린이 끝까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긴 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조사를 마친 나는 곧바로 팀원들과 얘기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중간에 던전 생성이라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긴 했지만 애초에 팀원들과 만나기로 한 목적은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전에 말했듯이 앞으로 C급 던전을 공략하고자 한다.”
내 말에 팀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방금 전, 일이 생각난 탓이다.
거미줄 안에 갇혀 무력하게 죽음만을 기다려야 했다.
태빈이 구해줄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이 있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훨씬 더 컸다.
무공을 가르쳐준 태빈을 따르기로 했지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팀원들이 공포를 떨쳐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네 명의 팀원들 모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김시연은 애써 초연한 척 하려 했지만 굳어진 얼굴을 쉬이 피지 못했고, 덩치 때문에 거미줄에 가장 칭칭 동여져 있었던 장만식의 그 큰 몸뚱이는 감전이라도 된 듯 부르르 떨렸다.
이재호와 김영기도 마찬가지. 입술을 깨물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무거운 표정을 한 네 명의 팀원들이 서로를 멍하니 바라봤다.
같은 경험과 감정을 공유한 서로를 보고 있자니, 그 때의 공포가 다시금 떠올랐다.
코앞까지 닥쳐온 죽음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만큼 무서웠다.
살고 싶다는 생각은 가득했지만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미칠 것만 같은 무력감이 전신을 휘감았고, 기적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