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31화. 던전생성(4).
나는 거미줄 위를 단단한 땅을 밟듯,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앞서 다리를 잃은 놈은 일단 제쳐뒀다.
다른 한 마리가 곁에서 지키고 있기도 했지만 어차피 거미줄을 쏘아대는 것 말고는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내가 신경 써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내가 노린 것은 단순히 가장 가까이 있던 놈이었다.
사냥꾼 거미가 무리지어 움직이고 사냥을 하지만 본능에 충실한 몬스터답게, 제대로 된 협공을 익힌 것은 아니다.
그들의 협공은 숙련 되었다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웠고, 한 마리 한 마리가 진을 이루는 주축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딱히 우선순위를 정할 필요는 없었다.
주요 공격수단인 거미줄이 무용지물이 되고, 비장의 수라고 할 수 있는 마비독도 사냥감의 민첩함으로 인해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냥꾼 거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긴 다리를 장창처럼 찔러대거나, 몬스터도 단숨에 조각낼 정도의 턱 힘으로 나를 씹기 위해 아가리를 들이미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다리를 내미는 족족 내 검이 잘라 버리고, 벌어진 아가리를 검기가 헤집어 놓자, 사냥꾼 거미들은 더 이상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유효한 공격수단을 모두 잃은 사냥꾼 거미는 개체로서도, 무리로서도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여덟 마리의 사냥꾼 거미가 고작 한 명의 인간을 어쩌지 못했고, 사냥꾼 거미는 더 이상 던전 내 최상위 몬스터가 아니었다.
더 이상 사냥꾼이 아닌, 반대의 입장으로 전락한 놈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검이 자신의 숨통을 끊어 놓기까지의 차례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키에엑...
마지막 사냥꾼 거미가 처연한 괴성을 흘리며 쓰러졌다.
마지막 놈은 결국에 사냥을 포기하고 도망치려 했지만 그냥 놓아줄 내가 아니었다.
어차피 던전 공략을 완료하기 위해서는 사냥꾼 거미를 모두 죽여야 했다.
나는 죽은 사냥꾼 거미는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팀원들에게도 향했다.
팀원들이 거미줄에 당하고 시간이 적잖이 흘렀다.
사냥꾼 거미의 침과 달리, 거미줄에는 독성이 없었지만 오래 둔다면, 호흡 곤란 등의 이유로 죽을 수도 있었다.
후읍. 후읍.
다행히 고치와도 같은 거미줄 속에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곧장 검기로 거미줄을 잘라낸 뒤, 안에서 팀원들을 끄집어냈다.
거미줄의 점성이 상당했기 때문에 뜯어내다시피 해서 떼어냈다. 그 과정에서 팀원들의 방어구와 옷가지가 찢겨 나가긴 했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쿨럭... 쿨럭...”
“허억... 허억...”
거미줄에서 꺼내진 팀원들이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 곤란은 해결됐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남았다.
전신을 꽁꽁 감싸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는 상황이 팀원들을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헌터님.”
“이제... 끝난 건가요?”
오히려 한데 뭉쳐있던 시민들의 상태가 나았다.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긴 했지만 이미 한 번 생을 포기했던 경험 때문인지, 꽤나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내가 상황을 정리하자마자, 즉각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시민들이 아니라, 팀원들이 문제였다.
“저리가!”
“오지 마!”
단숨에 숨이 끊어졌다면 느끼지 못했을 죽음의 공포에 팀원들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팀원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두르며 주변의 접근을 차단하고자 했다.
이미 사냥꾼 거미 전부가 시체로 변했음에도 팀원들의 눈에는 당장 자신들을 집어삼킬 듯, 혀를 날름거리는 사냥꾼 거미의 환각이 보일 정도였다.
“정신 차려라!”
내 입에서 사자후와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소림의 것처럼 항마의 기운이 깃든 것은 아니나, 내공이 담긴 일간은 잠시나마 팀원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팀... 팀장님.”
“끝났군요...”
내공이 담긴 외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팀원들이 날뛰던 행동을 멈추고 상황을 파악했다.
사냥꾼 거미들의 사체와 나를 번가라 바라보며 전투가 끝났음을 깨달았고, 팀원들의 입에서 가느다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공포를 잊지 못한 몸은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다.
거미줄에 갇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한 채, 죽음만을 기다려야 했던 순간.
결코 잊혀지지 않을 기억이었다.
“그래. 수거 끝나는 대로 밖으로 나간다.”
팀원을 바라보는 내 눈은 여느 때보다 진중했다.
죽음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공포다.
이겨내지 못한다면, 팀원들은 앞으로 헌터로 살아갈 수 없을 지도 몰랐다.
무림에서도 수없이 보았다.
임무에 실패한 뒤, 간신히 살아 돌아온 살수들이 그랬고, 죽음의 문턱에서 기사회생한 무인들 또한 그랬다.
이겨내는 경우에는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고, 더 이상 무인으로 살아가지 못했다.
억지로 무인으로 살아간다 해도 열에 아홉은 비슷한 상황에서 몸이 굳어버린 듯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얼마 못가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이 일상인 무림에서도 그런데, 이제 막 헌터가 된 팀원들이 죽음이라는 놈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공포를 이겨내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문제였다.
“알겠습니다.”
시민 구조라는 목적으로 준비 없이 던전에 입장한 탓에 짐꾼들이 함께하지 못했다.
당연히 수거는 전부 팀원들의 몫이었다.
팀원들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공포에 몸을 떨면서도 한 시 빨리 던전을 벗어나기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비독 조심해!”
“거미줄은 이쪽으로 옮겨!”
사냥꾼 거미는 다른 몬스터들에 비해 챙겨야 할 부산물이 많은 편이다.
순간접착제의 접착력을 뛰어넘는 점성을 가진 거미줄과 오우거도 마비시킬 수 있는 마비독은 그 효용이 높았다.
팀원들은 사냥꾼 거미의 몸통을 갈라 마나석을 챙기고, 입에서는 마비독을, 항문 부위에서는 거미줄을 채취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를 정도였다.
그마나 다행인 건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몸에 떨림이 조금은 잦아들었다는 것이다.
팀원들은 잠시나마 공포를 잊고 집중할 수 있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이것만 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죠?”
시민들도 옆에서 거들었다.
사체가 징그럽고 참혹하긴 했으나 자신들을 구해준 헌터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시민들도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한 시 빨리 던전을 나가고 싶어 하는 것도 한몫했다.
“끝났군.”
덕분에 수거 작업이 조금은 빨리 마무리 됐다.
전투는 끝났고, 마나석과 부산물의 수거까지 마쳤다.
이제 던전 핵을 파괴하고 밖으로 나가는 일만 남았다.
다른 때 같으면, 지금부터 수련을 했겠지만 시민들도 있고, 팀원들 상태도 정상이 아닌 탓에 그냥 나가기로 결정했다.
“크윽... 살았어. 살았어.”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시민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처음 던전에 휩쓸렸을 때와 사냥꾼 거미를 마주했을 때, 하루에 두 번이나 죽음을 마주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았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쩌저적.
던전 핵을 파괴하자, 던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침착하십시오. 공략이 완료됐다는 것을 증명하는 신호입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시민들이 당황하긴 했지만 내가 직접 그들 곁에서 안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행히 시민들은 금세 안정을 찾았고, 혼란은 없었다.
***
던전 안에서 전투가 한창일 때, 던전 밖도 나름의 이유로 소란스러웠다.
태빈을 던전 주변에서 끌어내려했던 천하길드의 박영식이 지금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던전 앞에 서있었다.
그 이유는 옆에서 자신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는 국내에 셋 뿐인 S급 헌터, 차예린때문이었다.
고작 C등급 던전이다.
아무리 시민이 휩쓸렸다고는 해도, S급 헌터의 등장은 말이 되질 않았다.
“지금부터는 저희 신의 길드에서 상황 통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영식 헌터님은 현재까지의 상황 설명해주세요.”
차예린은 아랑곳 않고 상황설명을 요구했다.
던전이 생성된 당시, 박영식이 가장 빠르게 현장에 도착하기도 했고, 지금까지 현장을 책임지고 있던 가장 높은 등급의 헌터였기 때문이다.
“네. 오후 5시 20분 경. 던전 경보음과 함께 던전이 생성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민 세 명이 던전 생성에 휩쓸렸고, 팀으로 보이는 헌터 다섯이 구조를 위해 진입한 상황입니다.
추가적으로 던전 등급은 C급이며 확인된 출현 예상 몬스터는 사냥꾼 거미로 추정됩니다. 이상입니다.”
박영식은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이 4성 장군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꼿꼿한 차렷 자세로 답했다.
“팀이 들어갔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사냥꾼 거미는 제대로 된 공략대가 진입해도 상위등급 헌터가 없다면, 공략이 쉽지 않은 몬스터에요.
고작 팀 단위로 공략이 가능할까요? 진입한 팀은 출현 몬스터가 사냥꾼 거미라는 것도 모를 텐데?”
차예린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우려를 표했다.
팀 단위의 헌터는 그렇다 쳐도 시민 셋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들이 어느 팀인지, 무슨 등급인지는 알고 계신가요?”
“그것도 잘... 하지만 하나같이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헌터 등급은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박영식이 민망함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시민을 구조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던전 진입을 감행한 헌터들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차마 던전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렇군요.”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지만 차예린은 박영식을 탓하지 않았다.
주변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헌터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지금 자신이 그를 붙잡고 묻고 있는 것도 헌터 등급을 이용한 월권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이제 진입한지 두 시간 정도 지났다고 했죠?”
“네. 현재 시간이 일곱시 삼십 분이니, 두 시간이 조금 지났습니다.”
“후... 공략이 진행 중이라면, 아직 한창이겠군요.”
차예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쉰 차예린의 얼굴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굳어있었다.
“아무래도 던전에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차예린이 지금껏 묵묵히 그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내를 보며 말했다.
등급을 알 수 없는 헌터 다섯.
박영식의 말대로 그들이 죽음을 각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면, 공략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시민을 구조하기 위해 목숨을 건 용기는 높게 사지만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네?”
사내가 반문했다.
차예린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따를 수는 없었다.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하지만 헌터협약이...”
사내가 헌터들에게는 법이나 다름없는 헌터협약을 언급하며 차예린의 결정을 만류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