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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수다-27화 (27/150)

# 27

27화. 미확인 던전(3).

몇 개의 뿌리와 가지가 잘려나가자, 한참동안 날뛰며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나무의 움직임이 점차 잦아들었다.

무턱대고 날 뛰어서는 나를 잡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콰직. 콰직.

공격을 멈춘 놈이 다음에 취한 행동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놈이 나무기에 움직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수백 개의 뿌리가 나무의 다리가 되었고, 수백 개의 가지는 손이 되었다.

수백 미터에 이르는 거목이 움직이는 모습에 나는 무림에서 소문으로 들었던, 바닷가에 산다는 팔다리가 열 개인 문어 괴물도 나무보다는 못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쿵. 쿵.

나무가 걸음을 옮겼다.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소음이 일대를 울렸다.

직접 몸을 움직인 나무는 잘려나간 자신의 뿌리와 가지를 지표삼아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놈에게 감각기관이 없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은잠술을 푼 상태였다. 날 뛰는 놈을 버젓이 지켜봤고, 놈의 팔 다리를 잘라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나무는 나를 찾지 못했다.

눈이 없다는 것은 이렇게 불편한 것이다.

나무의 눈이 되어주는 수백 개의 뿌리와 가지를 뻗어 인근을 휘저었다.

평범한 생명체였다면, 그 수많은 손길을 피해내지 못했겠지만 무영보를 펼치는 나에게는 닿지 못했다.

나무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유혹을 이겨낸 순간, 나무는 더 이상 나보다 강한 상대가 아니었다.

커다란 크기에서 오는, 순간 주변 환경을 바꿔버릴 정도의 파괴력은 경이적이었으나, 대상에게 닿지 못해서는 무의미했다.

놈에 대한 파악을 마친 나는 드디어 적극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나는 나무의 뿌리와 가지를 피해 몸통으로 접근했다.

나무는 여전히 내가 마지막에 놈을 공격했던 주변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은 어렵진 않았다.

퍼억.

검기를 두른 내 검이 놈의 몸통을 벴다.

몸통 깊숙이 파고든 검에 나무가 몸부림쳤다.

검의 손잡이만 보일 정도로 깊게 베어냈기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표현했지만 나무의 크기를 생각하면, 작은 생채기에 불과했다.

그래도 확실히 뿌리와 가지가 잘렸을 때와는 고통의 정도가 다른지 반응 자체가 달랐다.

퍼억.

나는 재차 검을 휘둘렀고, 내 검은 한 번 베여 나갔던 몸통 부분을 또 다시 파고들었다.

애초에 얼마 전, 싸웠던 오우거는 우스울 정도로 두꺼운 몸통에 단숨에 잘라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처음에는 껍질이, 이번에는 속을 베어냈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피 대신 진득한 수액이 새어 나왔다.

뒤늦게 놈의 뿌리와 가지가 몸통을 보호하고자 움직였지만 몸을 빼내기에는 충분 했다.

시각이 없는 놈의 마구잡이식 공격은 검을 처음 잡은 이가 생각 없이 마구 휘두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그 범위와 파괴력은 비교조차 되지 않지만.

나는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쉴 새 없이 나무를 괴롭혔다.

나무의 크기가 사람과 같다고 치면, 나무에게 나는 작은 벌레 크기에 불과하다. 내가 만들어내는 상처 또한 사람이 벌레에게 물어뜯긴 정도.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라도 벌레에게 수백, 수천 번 물어뜯긴 다면, 충분히 목숨이 위험할 만 했고, 이는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수백 개의 검흔이 몸통에 새겨졌다.

처음에는 작게만 느껴졌던 생채기가 지금은 그 커다란 몸통에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나무의 피와 같은 수액은 땅을 적실 정도였다.

나는 일격에 나무의 숨통을 끊어 놓지는 못했으나, 수백 번 가해진 일격 일격에 살(殺)의 의지를 담아냈고, 이는 나무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죽여 나갔다.

녹빛의 푸르름을 자랑하던 잎사귀들이 생기를 늘어졌고, 뿌리와 가지도 여전히 난폭하게 날 뛰고 있었지만 처음에 비해 힘을 잃었다.

캬라라라....

잎사귀들이 울어댔다.

나는 나무가 서서히 죽음에 다가서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것 또한.

잎사귀의 울음에는 흥분과 분노가 아닌, 자신의 죽음을 감지한 생명체의 슬픔이 묻어나왔다.

‘조금 만 더.’

나무가 죽음에 가까워진 만큼, 나도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살행을 행하는 살수는 일격에 전력을 담는다.

첫 일격에 대상의 목숨을 끊어 놓지 못했을 경우, 십중팔구는 실패하기 때문에 뒤를 생각지 않는 것이다.

평생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나 또한 근본은 살수.

나무가 일격에 죽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적절히 힘을 분배하고자 했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일격 일격에 힘이, 놈을 죽이고자 하는 살(殺)의 의지가 강하게 담겼다.

그 와중에 심법을 운용하며 놈의 유혹을 떨쳐내고, 쉼 없이 무영보를 펼쳐 수백 개의 뿌리와 가지가 가하는 공격을 피해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행하기에 내가 쌓은 내공은 한 없이 적었고, 그 적은 내공이 바닥을 보였다.

놈의 죽음에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다음을 기약하고 도망쳐야 했을 지도 몰랐다.

쿵!

다행히 내 내공의 고갈보다 나무가 쓰러지는 게 한 발 빨랐다.

마지막 한 줌의 내공으로 찔러 넣은 검에 나무의 거체가 쓰러지며 수액을 토해냈다.

뿌리와 가지가 축 늘어졌고, 푸르름을 잃고 누렇게 변했던 잎사귀들이 말라 떨어져 내렸다.

수만 잎사귀들이 나무가 쓰러지며 흩날리는 광경은 방금 전까지 벌이던 치열한 전투를 잊게 만들 정도로 화려했지만 감상에 젖기에는 육신과 정신이 모두 지쳐있었다.

털썩.

나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주저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애초에 던전에서 나를 위협할 만한 존재는 나무뿐이었고, 격전으로 사방 수백 미터가 황폐화된 탓에 벌레와 새들 따위도 이미 휩쓸려 죽거나 도망친 뒤였기 때문에 안전은 걱정 할 필요가 없었다.

대기에 충만한 기운이 내 몸에 가득 들이차며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다. 비어버렸던 단전 또한 빠르게 차올랐다.

“후우...”

나는 기운을 일주천 시켜 내공과 체력을 일부나마 회복한 뒤,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곧장 나무의 사체로 향했다.

가지까지 더 하면, 족히 몇 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목에 더 이상의 생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나무는 생기를 잃었지만 썩어 가는 거목 주위로 작은 이파리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거목이 품고 있던 생기가 흩어지며 죽어있던 대지가 살아났다.

나는 사체를 헤집어 마나석을 찾았다.

어른 주먹 크기의 B급 마나석이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 하나의 값이 1억.

단 한 개의 마나석이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던전을 공략하며 본 마나석 전부를 합쳐도 B급 마나석이 가지는 값어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사체는 버리기로 했다.

너무 커서 전부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고, 보통의 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딱히 쓸 만한 부분도 없어 보였다.

장작으로나 쓸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곧장 마음을 고쳐먹어야 했다.

나무의 죽음 뒤에도 가시지 않은 유혹의 기운이 내 감각을 간질였기 때문이다.

나는 유혹의 기운을 따라갔다.

전갈의 죽음을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나무는 죽었다. 잠시 유혹에 매료된다 해도 위험할 건 없었다.

유혹의 기운은 마나석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나무의 가장 높은, 몸통이 끝나고 가지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른 주먹 크기의 B급 마나석보다 배는 큰 검은색 구슬은 본체가 죽었음에도 아직 힘을 잃지 않았고, 미약하지만 여전히 생명체들을 유혹했다.

그로 인해 구슬 주변에는 수많은 벌레들이 꼬물거리며 계속해서 꼬여들었다.

나무의 난동으로 전부 도망치고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은 놈들이 남아 있었다.

꼬여든 벌레들은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고, 찢어 죽이며 서로 구슬을 독차지하고자 아귀다툼을 벌였다.

미물에 불과한 벌레들의 싸움이었지만 내가 보았던 어떠한 전투보다 처절했다.

구슬의 유혹에 생존 본능마저 잃어버린 벌레들은 날개가 찢기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몸통이 잘려 누런 체액을 흘리면서도 구슬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처절한 싸움의 승자는 벌레가 아니었다.

나는 징그러운 벌레 떼들에 아랑곳 하지 않고 검은 구슬을 집어 들었다.

‘후두둑’ 소리를 내며 벌레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럼에도 벌레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내 손에 들린 구슬을 갈구했다. 몇몇 날개 달린 것들이 날아올라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내공으로 구슬을 감싸 힘을 차단하자, 벌레들은 더 이상 유혹을 느끼지 못했다.

뒤늦은 본능이 깨어났다.

벌레들은 내 몸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향기에 살고자 발버둥 치며 안간힘을 다해 나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내단같은 건가.”

멀어지는 벌레들을 무시한 채, 나는 구슬에 집중했다.

B급 마나석을 우스울 정도로 많은 마나를 품고 있는 구슬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영성을 가지게 된 영물들이 품고 있는 내단과 비슷했다.

그 안에는 수백 수천에 달하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껏 구슬이 나무의 몸으로 집어삼킨 생명들의 기운이리라.

“기연이군.”

나는 망설임 없이 구슬을 집어 삼켰다.

단단한 고체와 같던 구슬은 내 입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리며 내 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재차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시작했다.

대기에 충만한 기보다 몇 배는 더 집약되고, 정제된 순수한 기운이다.

최대한 많은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선 한 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이런!’

문제가 생겼다.

구슬이 품고 있던 기운이 내 생각이상으로 강했다.

절정을 넘어서는, 지금의 내 그릇으로는 담아내기 힘들 만큼, 강렬한 기운이 몸 속 가득 들이찼다.

이대로라면, 절반도 채 흡수하지 못할 정도였다.

‘차라리 이 기회에.’

어차피 당장 단전에 담을 수 없는 기운이다. 때문에 나는 그 기운을 이용해 임독양맥을 뚫고자 했다.

기운은 내 인도에 따라 김태빈의 몸에 쌓여 있던 탁기를 태우며 빠르게 임맥으로 돌진했다.

‘윽!’

기운과 막혀있던 임맥과 부딪치며 내 전신이 부르르 떨려왔다.

과거에 한 번 경험해 보았지만 여전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고통이 따랐다.

이미 고통이 수반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참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뚫어내지 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쿵! 쿵!

기운이 재차 임맥을 때렸다.

굳건한 성벽과도 같던 임맥은 계속된 공격에 서서히 허물어졌고,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기운을 일거에 몰아쳤다.

콰광!

임맥이 터져 나가며 길이 열렸다.

나는 기세를 몰아 독맥까지 곧장 기운을 내달렸다.

독맥은 임맥보다 더 격렬히 항거했지만 임맥과 마찬가지로 버티지 못했다.

“후우...”

나는 결국 임독양맥을 타통해 냈고, 내가 눈을 뜬 순간, 내 눈에서는 안광이 폭사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나는 일류의 경지에 오른 지 얼마 지나기도 않아 절정의 경지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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