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화. 미확인 던전(2).
물론 일반적인 B급 헌터에 해당하는 얘기다. 그리고 그 일반적이라는 범주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
상대는 최소 절정의 기운을 지닌 몬스터.
단순히 경지로 비교하면, 지금 일류의 경지에 있는 나보다 한 단계 윗줄의 고수다.
그러나 나는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내가 십년에 걸쳐 행한 백살(百殺).
처음 세 번의 살행을 제외하고, 아흔 일곱 번의 살행 모두 나보다 약한 대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최소 동급이었고, 많게는 두 단계 이상의 고수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살행을 성공시켰다.
간신히 목숨만 붙어있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나는 살아남았고, 오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거리를 둔 채, 우선 놈을 살폈다.
나무는 한 눈에 다 담기 힘들 정도로 커다랬고, 굳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충분히 동태를 살필 수 있었다.
나무는 아직 내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죽어있는 대지에 홀로 살아있는 고고함, 그 속에서 끊임없이 꿈틀대는 마나가 아니었다면, 몬스터라고 생각지 못하고 단순히 수천 년을 살아온 커다란 나무로 치부해버렸을 정도로 미동조차 없었다.
나 또한 미동도 하지 않고, 두 눈을 나무에 고정시킨 채 기다렸다.
나보다 강한 존재를 상대할 때, 섣불리 접근해서는 안 된다. 놈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움직여도 늦지 않다.
그리고 그 대가가 목숨이라면, 이런 기다림은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 아니 몇 달이고 할 수 있다.
나는 과거 살행을 행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인내하며 놈을 살폈다.
꺄라라라. 꺄라라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족히 몇 시간은 흘렀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나무를 살폈다.
그러나 나무는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변화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흩날리는 바람에 잎사귀들이 기분 나쁜 소리를 만들어 냈고, 주변의 마나도 조금 짙어졌다. 또한 마나가 짙어지며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향이 나를 간질이며 유혹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기다린 변화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나.”
살행과 달리, 공략에는 시간제한이 있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언제고 인내할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낼 수 없었다.
삼일.
아직 몇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으니, 놈을 관찰 할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나 시간제약을 떠나 내 목적은 오로지 놈을 죽이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던전을 공략하고 수련을 하는데 있었고,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때문에 나는 놈에게 접근하고자 했다.
내가 놈의 거리 안으로 들어선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반응을 보일 테니.
사각 사각.
그러나 나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임을 보인 존재가 있었다.
죽은 회색빛 나무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전갈 한 마리.
지구의 전갈보다 크기가 수백 배는 컸지만 그 생김새는 분명 전갈과 같았다.
전갈은 겁도 없이 나무로 다가갔다.
아니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앞도 보지 못한 채, 나무에 부딪치고, 돌부리에 걸리면서도 나무를 향했다.
콰직. 콰직.
전갈이 나무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마침내 나무가 움직임을 보였다.
땅이 갈라지며 수십 수백 가닥의 나무뿌리가 솟구쳤다. 그 이상의 나뭇가지들이 전갈을 향해 허공으로부터 쏟아졌다.
고작 전갈 한 마리를 잡기 위함이라 보기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솟구친 나무뿌리와 쏟아진 나뭇가지들이 감옥이 되어 전갈을 가뒀고, 몸을 옭아맸다. 그리고 옭아맨 전갈을 나무둥치로 끌어 당겼다.
쩌어억.
나무둥치가 입처럼 위아래로 크게 벌어졌다.
그 안에는 나무로 된 괴기스러운 이빨이 가득했다.
딱. 딱. 콰드득. 콰드득.
나무는 벌어진 나무둥치에 그대로 전갈을 집어넣었고, 괴기스러운 이빨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전갈을 씹기 시작했다.
전갈이 살기 위해 반항했지만 나무는 전갈을 놓아 주지 않았다.
나무보다 몇 배나 단단해 보이던 전갈을 껍질이 힘없이 부서졌고, 몸체가 잘려나갔다.
나무가 부딪치며, 전갈이 부서지며 나는 소리가 황량한 대지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전갈은 가루처럼 잘게 갈려 나무속으로 사라졌다.
캬라라라라라.
식사가 끝나자, 잎사귀들이 만족스러운 듯 울어댔다.
나무뿌리는 다시 땅속으로 모습을 감췄고, 나뭇가지들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무둥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나무는 다시 평범한 커다란 나무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이 곳이 왜 황량하며 생명체가 나무 하나뿐인지 알 수 있었다.
나무가 전부 먹어 치운 것이다.
방금 전 전갈과 같이.
***
전갈이 나무에 당한 뒤, 나는 여러 실험을 행했다.
우선 놈의 거리.
나무가 전갈에게 반응한 것은, 전갈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그러나 나무는 그 전부터 전갈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툭.
나무는 내가 던진 돌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돌의 크기를 늘려보고, 나무와의 거리를 바꿔가며 몇 번을 더 행해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생명체가 아닌 이상, 놈이 반응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또 다른 생명체가 나타나주기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직접 접근하는 방법을 택했다.
나는 나무의 움직임에 따라 즉각 몸을 빼낼 수 있는 준비를 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에 대한 나무의 반응을 살펴야 했기 때문에 은신은 배제하고 최대한 내 존재를 드러냈다.
내 예상대로, 파악된 나무가 감지할 수 있는 거리는 100m 가량.
내가 접근하자, 나무는 새로운 먹잇감의 등장에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전갈을 잡아먹었다고는 하나, 나무의 크기에 비하면 한 입 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놈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포만감을 느끼기에는 한 없이 부족했다.
땅속의 뿌리가 움직이며 땅이 미약하게 떨려왔고,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차례로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주 작은,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반응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무의 흥분에 응하지 못했다.
나무가 움찔 거리는 순간, 나는 곧바로 발을 멈추고 몸을 빼냈다.
아직은 싸울 때가 아니었다.
그 다음으로 나는 나무가 생명체를 감지하는 방법을 알아내고자 했다.
겉보기에 나무에 눈과 코 같은 감각 기관은 없다.
그렇기에 시각과 후각 등의 감각을 이용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확신하진 않았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전부라 치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거리를 재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았던 나는 은잠술을 통해 황량한 대지에 녹아들었다.
경지가 낮아 완벽하진 않았지만 숨소리부터 나의 존재까지 전부 대지의 일부가 되었다.
그 뒤에 나는 다시 놈의 거리 안으로 들어섰다.
‘시각인가...?’
내가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뿌리를 비롯해 가지와 잎사귀가 반응을 보였던 것과 달리, 은잠술을 펼친 내 접근에 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면, 나를 발견하지 못할 테니, 지금 나무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내가 의문을 가질 때쯤, 뿌리부터 시작해, 잎사귀가 다시 한 번 반응을 보였다.
방금 전, 내가 접근하다 물러난 것 때문인지, 놈이 잠시 모른 체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무가 나를 인지한 것은 시각이 아니다.
나는 대지에 완전히 녹아들었고, 그런 나를 시각 따위에 의존해서는 찾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어쨌든, 나무는 나를 모른 체 하며 제법 머리를 썼지만 욕망을 숨기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잎사귀를 비롯해 땅 속 뿌리까지 흔들렸다.
나무의 갈등이 느껴졌다.
내가 다시 도망가지는 않을까. 지금 잡아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번에도 지체 없이 놈의 거리에서 벗어났다.
캬라라라라.
두 번이나 반복된 내 농간에 나뭇잎들이 분노를 담아 울어댔다.
여인의 높은 괴성과 비슷한 소음이 내 귓가를 찔렀다.
내가 서있던 자리에 나무뿌리들이 솟구쳐 주변을 헤집었다. 나뭇가지 또한 사방팔방으로 미친 듯 날뛰었다.
모두 내가 서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행해진 일이다.
나무가 자신의 힘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나는 더 이상 놈을 관찰할 필요가 없어졌다.
뿌리.
땅속에 수백 갈래로 뻗어있는 뿌리가 나무가 자신의 거리 안에 생명체를 감지하는 방법이었다.
전갈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두 번 모두 나무의 뿌리가 먼저 움직였고, 그 뒤에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차례로 반응했다.
땅속에서 지상에 올려 진 무게 등을 감지해 생명체의 접근을 인지해낸 것이다.
‘음?’
동시에 나는 변화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나무를 찾을 수 있게 해줬던 마나가 놈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대지에 마나의 흔적이 한 층 더 짙어졌다.
‘이래서...’
나는 나무의 마나에서 나조차 순간 혹할 정도의 유혹적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 힘이 너무 미약해 느끼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음에도 나를 흔들 정도는 아니기에 무시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알았다.
전갈이 홀린 듯, 나무로 향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음을.
나는 곧장 심법을 운용해 마나를 밀어내 위험을 넘겼지만 자칫하면, 전갈과 같은 꼴을 당할 뻔했다.
한 때, 절대자에 가까운 경지에 올랐던 나조차 이러할 진데, 본능에 충실한 몬스터 등의 생명체가 지금 정도의 유혹 을 견뎌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무는 생명체들을 유혹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역의 생명체들의 씨를 말려 버릴 정도의 식사를 거듭했던 것이다.
***
한껏 분노한 나무는 단숨에 주변 환경을 변화시킬 정로도 날 뛰었다.
나는 거리를 벌린 채, 나무의 분노를 지켜봤다.
땅은 지진이라도 난 듯 쉼 없이 흔들렸고, 사방으로 휘둘러지는 뿌리와 가지에 주변에 말라버린 나무들이 힘없이 꺾이고 터져나갔다.
그 크기에서 비롯된, 절정의 경지라고 보기에는 과한 힘이다.
서걱.
나는 분노에 이성을 잃은 나무의 가지를 잘라보았다.
사람으로 따지면, 머리카락 정도에 불과해 보이는, 수백 개에 달하는 나무의 가지가 놈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캬라라라.
가지가 잘린 나무가 고통스러운 듯 괴성을 질러댔다.
괴성 또한 놈의 잎사귀에서 흘러나왔다.
뿌리와 가지가 팔다리 역할을 대신하듯, 잎사귀는 놈의 입을 대신했다.
괴성이 고통에 의한 것인지, 주변의 내 존재를 확인하고 더욱 분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어느 쪽 이로든 효과가 있다는 점이었다.
서걱. 서걱.
나는 놈의 거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 가지와 뿌리를 몇 개 더 잘라냈다.
근본이 나무인 만큼, 방어력은 취약했고, 내 검은 사람보다 두꺼운 나무의 뿌리와 가지들을 어김없이 잘라냈다.
수를 생각하면, 효과는 미미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상대를 약화시킬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